말과 글

(93) 革 (가죽 혁)

나무^^ 2010. 3. 19. 02:10

                                   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93)                                                     

                                                                                            2009. 8. 3 (월) 영남일보 

               革 (가죽 혁 : 짐승의 껍데기를 홀딱 벗긴 가죽)

 

 

             일반적으로 '가죽'이라 하면 거의 동물 중에서도 길짐승의 겉을 벗긴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같은 가죽이라 할지라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순히 살에서 겉을 벗긴 그것을 '皮'(가죽 피)라 하고,

                  둘째,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몸통 부분에서 꼬리까지 홀딱 벗긴 것을 '革'(가죽 혁)이라 하고,

                  벗긴 가죽을 잘 다듬은 것을 '韋'(가죽 위)라 한다.

 

                 '革'이란 문자 그대로 "짐승의 가죽을 벗겨 그 털을 제거한 것"(獸皮治去其毛)을 말한 것이다.

                  즉 머리에는 이미 일곱 구멍이 뚫려 있을 뿐 아니라, 단단한 머리 골 위에 얇게 덮인 터라,

                  머리는 머리대로 잘라 버리고 그 나머지를 홀딱 벗겨 뒤집은 채 털을 제거한 모양 그대로를 본 뜬 글자가 바로 '革'이다.

                 '皮'는 살에서 가죽만을 분리시켜 놓은 것을 일컬은 것임에 비하여 '革'은 홀딱 뒤집어 털까지를 벗긴 것이기 때문에

                 '皮'보다는 '革'이 훨씬 쓸모가 있는 것이며, 또한 홀딱 뒤집어 버린 것이기 때문에 "革은 更也"라 하여

                 '바꾸다'(更;고칠 갱)라는 뜻도 있다.

                  털을 심어 둔 채 굳은 가죽 속에 오랫동안 몸집을 담아 두고 있으면 그런대로 편할 것 같기는 하나

                  오래되면 제 몸집을 키울 수 없다. 따라서 때로는 제 몸집을 불리기 위해 다소 쓰라린 고통을 참아 내고라도

                  가죽(허물)을 벗어 버릴 필요도 있다. 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 어김없이 닥쳐드는 것이 삶의 형편인데

                  마냥 가죽 속의 제 몸집만 고스란히 지키려 들자면 나날이 커져가는 외부의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잃은 나머지

                  스스로 망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남의 가죽을 벗겨 제 옷으로 삼았던 시절은 대체로 사냥으로 삶을 영위해 왔던 수렵시대의 일이었다.

                  어디 몸통만을 가죽으로 둘렀던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가죽을 변형시켜 발을 보호했기에 '革'에 '化'를 붙여

                 '靴'(가죽신 화)라 하였다. 사냥시대가 청산된 지도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가죽으로 이뤄진 옷이나 제품들은

                  누구나 지니기를 바라는 기호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가죽 옷에 가죽 신을 신고

                  비싼 가죽 띠를 차고 거들먹거리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다.

                  같은 물이라도 "냇물은 밤낮으로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나 너른 연못에 고여 스스로 맑아지게 되면

                  그림자를 제대로 얻어낼 수 있다"(川流不息 淵澄取映· 천자문)라고 하듯 제 몸을 가죽 속에만 담아둔 채 성취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봄바람이 불면 가죽 띠를 벗어 버린 채 풍욕(風浴)을 즐기고 일단 서늘해진 몸으로 달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달뜨자 줄판을 살며시 당겨 한 곡조 시름을 풀어보는 자신만의 풍류를 즐겼던 옛 어른들의 삶"이 일상을 벗은

                  홀가분한 멋이 아니었던가. 바쁘다는 말은 마음 옆으로 어떤 것을 버렸다는 말로 '忙'(바쁠 망)이라 썼다.

                  그러나 한가롭다는 말은 모든 복잡한 일들을 위로 승화시켜 버렸다는 말로 '忘'(잊을 망)이라 하였다.

                 "하루라도 맑고 한가로움을 지닐 수 있다면 그 하루의 신선이 된 것이다"(一日淸閑, 一日仙·명심보감)라는 말처럼

                  바쁜 가운데 한가로움을 찾는 여유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