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음악, 미술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 김홍도

나무^^ 2022. 2. 24. 19:32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본,  유명한 풍속화가 김홍도에 관해서 쓴 책이여서 , 2019년 개정판 2쇄 (2001년 초판, 2016년 개정판 1쇄)를 사서 읽어보았다.  재미있고 유익하여 인터넷에서 그림들을 찾아 올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제 1장 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화가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 본 조감도법을 사용한 그림 <씨름>은 사방에 사람들이 가득 있지만 오른쪽 가운데를 비움으로 답답함을 열어주고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밖을 향해 신발을놓았다. 탁월한 공간활용의 대가인 것을 알았다.

사람들의 표정을 다양하게 그림으로 흥미를 더한다.

김홍도는 모든 분야의 그림을 다 잘 그린 천재화가이다. 특히 그의 풍속도는 그 당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1745년~1806년 조선 영·정조시대를 살았으며, 단원이외에도 간구, 단옹, 단노, 서호, 취하사, 고면거사라는 호를 사용했다. 아마 그때 그때의 심정에 따라 호를 쓴 것 같다. 김해 김씨 무관 집안의 서열 출신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태어나 양반이 오를 수 있는 벼슬을 할 수 없었다. 10~14세 전후 유명한 화가였던 강세황, 심사정에게 잠시 그림을 배우고 20세가 되기 전 도화서에 들어가 화원이 되었다. 그 후 실력을 인정 받아 벼슬을 받음으로 발령을 받기도 하고 궁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그 당시 유명 화가들의 그림도 소개되면서 김홍도의 그림과 다른 점들을 비교 설명해 준다.

21세 때 영조의 왕위 40주년 기념, 71세 생신 축하 병풍 <경현당에서 술잔을 받는 그림 병풍(경현당수작도계병)>을 그렸는데 기록만 있고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29세 때 영조 어진을 그리고 사재감의 종6품 주부직 벼슬을 받아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시험성적이 좋지 않아 쫓겨났다가 다시 장원서 별제직에 발령 받고는 <말을 삼가는 사람(신언인도)> 그림을 그린다. 스승 강세황이 글을 써준다.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일을 많이 벌이지 말라. 하늘의 도를 알 수 없으나 항상 착한이와 함께 한다'는 내용이다.

 

 

<여러명의 신선(군선도)>은 노자, 장과로, 마고 하선고 등 도교에 나오는 신선들 19명을 그린 그림이다.

원래 8폭 병풍으로 제작하였는데, 현재는 3점의 족자로 꾸며져 있다. 

 

<바다위의 신선들(해상군선도)>는 도교에 나오는 신선들 19명의 조선옷을 입은 신선으로 그린 그림이다.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서왕모가 곤륜산 옆의 큰 연못에서 연회를 베푸는 그림 <요지연도>를 김홍도는 바다를 건너는 신선들만 그렸다. 이 그림은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다. (비단에 색, 각 150.3×51.5 국립중앙박물관)

비단에 이렇게 세밀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4년간은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그 기회를 그림 그리고 화가들과 교류를 하며 지냈다. 이때 그린 <부채에 그린 서원에서의 모임(선면 서원아집도)>가 대표작이다. 중국 북송 때 서원아집처럼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던 것이 18세기 조선에서도 유행하였다. 그에 김홍도는 친구들을 그림에 등장시켜 풍류를 즐겼다. 이 부채에 그린 그림 말고 병풍으로도 여러 점 남아있다. 비단에 그린 6폭 병풍은 스승 강세황이 김홍도의 그림을 칭찬하며 자신의 글씨가 아름다운 그림을 더럽힌다며 겸손한 글을 써주었다. 사제지간을 넘은 인간적 우애를 나눈 두 사람이다.

 

1778년에 그린 <행려풍속도 8폭병풍>은 선비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가 병풍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것은 당시 병풍을 살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비의 취향을 반영하여 먹으로 담담하게 그렸다. 세상을 많이 구경하기 위해 나귀를 탄 선비가 자주 등장한다.

그림 내용은 제1폭 <거리의 판결>, 제2폭 <길가 대장간>, 제3폭 <나루터>, 제4폭 <어물장수>,제 5폭 <놀란 나그네>, 제6폭 <타작>, 제7폭 <길거리에서의 만남>, 제8폭 <훔쳐보기>이다. 그림의 핵심을 콕 집어 글로 표현한 스승 강세황도 대단하다. 예를 들어 <훔쳐보기>에는 '부서진 안장 야윈 나귀에 차림새 몹시 피곤해보이는데 면화 따는 촌색시를 눈여겨볼까.' 등이다.

 

또 그가 그린 <단원 풍속화첩>은 25장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공책같은 화첩이다. 

<서당>에는 훈장님께 야단맞고 훌쩍이는 아이와 쳐다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다양하여 재미있다. 아래부분을 비움으로 공간의 미를 살렸다.

 

<대장간> 그림은 쇠를 다듬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배경을 생략함으로 주제가 더 돋보인다. 

 

<주막> 그림은 시장했던 패랭이 쓴 손님이 그릇을 기울이며 음식을 맛나게 먹고 옆에 앉았는 사람은 식후 담배를 피우려고 쌈지에서 담배를 꺼내려고 한다. 지붕 밖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들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새참>은 여러 사람을 단조롭지 않게 그린 구도이다. 이 그림 또한 배경을 생략함으로 주제가 더 잘 드러난다. 젖 먹이는 아낙네와 아이 등 한 사람 한사람의 몸짓을 다양하게 참 잘 그렸다.

 

<춤추는 아이>의 동작,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동작이 역동적이고 둥글게 잡은 구도가 남다르다. 

 

<타작> 바쁘지만 즐겁게 일하는 하인들의 모습을 편히 기대누워 담뱃대를 물고 바라보는 마름의 모습이 가관이다.

 

<저잣길>에서 만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를 옷 속에 넣어 업은 아낙의 모습이 좀 남성적이다. 

 

<고두놀이하는 총각들> 힘든 나뭇짐을 내려놓고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총각들, 잠시 여유로운 모습이 평화롭다.

 

<나룻배>는 두 척의 나룻배에 사람과 짐승이 가득 실렸다. 앞을 보고 있는 소, 돌아선 소, 사람들의 동작이 다양하다.

 

<편자박기> 장제사와 조수가 말을 묶어 눕혀놓고 편자를 박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탁발>은 스님들이 바닥에 모연문(募緣文 : 보시를 권하는 글)을 놓고 시주를 받는 모습이다. 목탁과 광쇠를 두들겨 시선을 끌고 여인은 치마를 들추어 복채를 꺼내려 한다. 머리를 땋은 처자가 심부름을 가는지 음식 그릇을 이고 장죽을 들고 있다. 

 

<담배썰기>는 한여름에 힘껏 한 손으로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담배를 써는 이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 더워서 웃통을 벗고 담뱃잎을 차곡차곡 다듬는 이, 주인인 듯 부채질을 하며 책을 보는 이를 그렸다. 역시 조감도법을 사용하였다. 

 

<자리짜기>는 단촐한 서민 가정의 모습이다. 남편은 돗자리를 짜고 부인은 물레질을 하며 아들은 돌아앉아 글을 읽는다. 

 

<길쌈하기>는 위에서는 물레질한 실에 풀을 멕이고 아래는 길쌈하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어린 아이. 그림은 아름답지만 예전 양반이 아닌 여인들은 집안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노년에는 며느리의 봉양을 받을 수 있었다.

 

<우물가> 그림은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물을 청한 사내에게 물바가지를 주는 젊은 아낙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기와 잇기>  아래에서 올린 기와를 지붕에서 받는 이의 모습, 그 모양을 올려다보는 주인양반 등 동작들이 재미있다.

<논갈이> 밭을 일구어 봄농사를 시작하는 소와 농부들의 모습이 역동적이다. 위를 향해 잡은 소가 돋보인다.

 

<신행> 사모관대 차려입은 신랑이 견마잡이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가는 뒤를 매파가 뒤따른다. 대각선으로 선을 그어 진행방향에 변화를 준 점이 다른 화가의 그림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 당시 다른 화가들도 풍속화를 많이 그려 300여점이 넘는 조선인의 풍속화가 독일, 영국, 덴마크 등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의 만남>  소를 탄 부부를 앞에 그려 강조하고 말을 탄 선비를 뒤에 반대 방향으로 놓아 거리감을 살렸다.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을 빨고 선비는 부채를 펴고 슬쩍 훔쳐보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렸다.

 

<행상>  중간에 언덕선을 사선으로 그려 넣었다. 말이 방향을 바꿈으로 거리감과 그림의 깊이를 더했다. 

 

김홍도의 선배 강희언은 '선비들의 활쏘기' 그림에 활 쏘는 사람들 뒤로 계곡물이 흐르고 빨래하는 여인들을 그려넣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두 개의 장면을 따로 그리고 배경을 생략하여 주제가 더욱 뚜렷하게 창의성을 발휘하였다. 

<활쏘기>그림은 교관의 지도를 받는 궁사의 표정, 활을 만지는 동작이 각각 다른 두 궁사를 그렸다. 
<빨래터> 그림은 바위 너머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선비를 그려 해학적이다.

 

<그림보기> 선비들이 둘러서서 그림을 펼쳐놓고 보는 장면이다. 들고 있는 화지에 왜 그림을 안 그렸을까?

 

<고기잡이> 바다에서 어부들이 싸리, 참대나무 따위의 어살(어전)을 둘러 꽂고 그 가운데 그물을 달아 고기를 잡는 모습이다. 맨 위 고깃배에서 잡은 고기를 넘겨 받고 중간 거룻배에는 솥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밥을 해먹는 것 같고 맨 아래 배는 짚으로 지붕을 만든 것이 한 여름인 것 같다. 깊지 않은 바다인 모양이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큰 머리의 여인>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 그림인데. 커다란 가발을 얹고 거울을 보는 여인의 표정이 사뭇 또렷하다. 

 

<미인(사녀도)> 김홍도가 37세인 1781년에 연파관 주인에게 그려 준 그림이다. 곱게 단장하고 부채를 든 여인의 자태가 고요하여 신선처럼 느껴지고  연한 갈색과 청색을 사용하였다.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을 두번 째로 그리고, 그 공로로 동빙고의 별제직을 받아 일하는 동안 정조와 세 차례 만났다. 왕이 그의 그림을 명화로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평가받게 해준 <소나무 아래  사나운 호랑이(송하맹호도)> 는 그 섬세함과 기개가 놀랍게 생생하여 옛날 그림 같지 않은 사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 당시는 호랑이가 많았으며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김홍도는 38세 1782년에는 부채에 나비를 그린 <호접도>를 그렸다. 강세황은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듯 하네. 하늘의 조화를 빼앗음이 여기까지 이름을 보고 경탄하여 한 마디 적는다.' 라고 감탄하였다. 실제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황묘농접도> 는 누군가의 고희 잔치에 장수하길 바라는 내용을 담아 그린 그림이다. 즉 바위는 변하지 않음으로 장수를 뜻하고 파랭이 꽃은 석죽화로 불리며 청춘을 의미한다. 또 제비꽃은 만사가 뜻대로 된다는 뜻의 여의초이다. 고양이와 나비 역시 노인을 상징한다. 김홍도의 그림 중 이렇게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고운 느낌의 그림도 있다.

 

2 장. 나랏일을 돌보며 풍류를 즐기다

 

<단원도>는 문인들의 모임을 기념하는 아회도이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고상한 모임으로 아집도라고도 한다. 선비생활에 관심을 갖고 박달나무 정원이라는 뜻의 '단원'이란 호를 쓰기 시작한다. 성품이 매우 고상한 명나라 문인화가이자 학자의 의 호를 따서 지었다. 실제로 단원은 인물이 잘 생기고 성품도 맑아 고상하였다고 한다.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으로 복귀한 뒤 <벼슬하지 않는 선비의 풍류(포의풍류)>, <파초정원에서 차를 맛보다(초원시명)>를 그렸다. 그림에는 선비가 지켜야 할 유교적 덕목을 잘 따르되 마음과 정신은 신선처럼 자유롭게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림 속 모든 물건들은 유교적, 도교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들이다. 

 

<대나무숲에서 거문고를 타다(죽리탄금도)> 당나라 왕유의 시 '죽리관에서'를 그림으로 그려 시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홀로 깊은 대숲 속에 앉아 거문고 타고 긴 휘파람을 분다 / 깊은 숲을 아무도 모르는데 밝은 달만 와서 비친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 여행에 올라 100여점의  초본을 그려 이를 바탕으로 두루마리 그림을 그려 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금강산 8첩병풍>을 남겨 많은 후배들이 교본으로 삼았다.

정조는 김홍도에게 영남, 남해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린 후 대마도 지도를 몰래 그려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에 김응환과 함께 수행하던 중 부산에서 김응환이 갑자기 병이 나 죽는다. 장례를 치루고 대마도 지도까지 그려온 후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때문이었는지 심하게 앓는다. 청나라 사절단으로 가기로 한 것도 가지 못하였는지 그 흔적이나 기록이 없다고 한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부채에 그린 <나귀 타고 먼길을 떠나다(기려원유)> 그림에는 강세황이 제자의 회복을 기뻐하며 그의 얼굴을 대하는 듯하다는 글과, 김홍도가  '검문 가는 길에 이슬비를 맞다'는 남송 시인 육유의 시가 적혀있다. 사천성의 험한 산 검문을 비를 맞으며 오르는 나그네의 쓸쓸한 모습을 친구를 잃은 자신의 심정에 견준 글이다.

옷은 흙먼지와 술자국에 찌들고 / 멀고 먼 유람길에 나그네 시름 풀 곳 없다 / 이 몸은 아직도 시인이랄 수 없지만 / 

이슬비에 나귀타고 검문(劒門)으로  들어가네.  

 

간신히 병을 이겨낸 김홍도는 봄을 바라보는 특별한 마음을 <소년행락>, <기려행락>, <유하인물>, <자장기마>로 나타낸다. 책에는 그림에 쓰여진 시를 설명하여 그림의 의미를 더욱 느끼게 한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을 받아 여러 무예 관련 책을 종합한 군사훈련 교본인 <무예도 보통지>에 그림을 그렸다. 이 책은 그의 지도 아래 여러 화원이 그린 것으로 4권 4책, 470여 점의 그림이 실려있다. 그리고 10명의 노인들이 계를 만들고 그날을 기념하기 위한 <십로계첩> 화첩이 전해져 왔는데, 절개를 지킨 사람들의 모임을 그린 이 그림이 낡아서 강세황과 김홍도가 다시 공동작업으로 <십로도상첩>을 그렸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공동작업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화성(수원)에 용주사를 세우고 김홍도에게 대웅전에 걸어놓을 불화를 그리게 한다.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전통과 형식은 그대로 따르되 서양풍의 명암과 원근법을 써서 매우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기존의 붉은색과 녹색에 옅은 청색과 갈색을 쓴 것도 특징이다. 김홍도의 지휘 아래 궁중화원과 승려화가들이 함께 완성한 명작이다. 정조 임금이 용주사를 세우며 불교 진리에 믿음이 깊어진 것처럼 김홍도도 신앙심이 깊어졌다.

 

<송석원시사의 밤모임> 송석원시사는 천수경이 이끈 문학 단체로 1786~18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구성원들은 중인, 서얼, 서리 등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이었다. 이들을 위항 문인 또는 여항 문인이라 한다. 천수경의 집이 인왕산 동쪽 옥계 부근에 있어 옥계시사라 불렀는데 그의 호를 따서 송석원시사로 바뀌었다. 월 1회 서울 명승지에 모여 시를 짓고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하거나 위로했다. 시인 장혼은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자를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하였으니 그 모임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791년 보름 옥계에 모인 동인들을 김홍도가 그리고 서예가 마성린이 제시를 썼다. 참으로 운치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유월 더운 밤에 구름과 달이 아스라한데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래 혼을 빼는구나.' 

 

<남해관음> 그림이다. 김홍도는 용주사 불화와 어진 제작을 완수한 공으로 충청도 한 작은 고을 연풍에 현감이 되었다. 심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러 공정산(현재 조령산) 상암사에 갔다가  48세까지 자식이 없던 그는 정갈한 절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녹봉을 모두 시주하고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아들을 얻자 몹시 기뻐하며 연록이라 이름지었다. 후에 아들도 도화서 화원(김양기)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관음보살 그림이여서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보살의 옷자락이 파도와 조화를 이루며 환희심이 느껴진다.   

 

<구름 위의 신선들 (운상신선)> 외뿔소를 탄 신선을 중심으로 구름위를 걷는 맨발의 아이들을 그린 편안한 그림이다. 

 

<혜능이 매화를 감상하다(혜능상매)> '그윽한 향기가 구름처럼 온 하늘에 가득하다' 라는 글로 당나라 선종의 6대조인 혜능 대사가 가르치는 법의 향기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그림이다. 매화 나무 속에 들어앉은 듯한 구도는 혜능이 황매산에서 수행하였음을 암시해준다. 창의적이고 멋진 구도이다.

 

3장. 화선으로 이름을 드높이다 

 

연풍 현감 이후 궁중 화원에서 활동한 김홍도가 받은 첫 임무가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의궤는 왕실에서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그 과정 전체를 세밀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는 몇 명의 뛰어난 화가들과 교정을 거쳐 2년만에 101건을 발행하였다. 정리자라는 활자를 만들어서 찍어내어 그때 발행한 의궤가 현재 서울대 규장각, 고려대도서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는데 목판화, 채색목판화, 직접 그린 육필화, 이렇게 세 종류의 의궤가 남아있다. 7박 8일의 일정 중 대표적인 행사장면 8개를 선택해 병풍으로 만든 <화성능행도 병풍>은 1796년 김홍도 52세 때 비단에 그린 것이다. 크기를 달리해 15건을 만들었다.

9일 창경궁을 출발한 행렬은 시흥행국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10일에는 화성행궁에 도착한다. 11일에 문성왕묘를 참배하고(알성도), 낙남현에서 과거시험을 치룬다(방방도). 12일에는 사도세자 묘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관람한다(서장대성조도). 13일에는 가장 중요한 행사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봉수당에서 치룬다(봉수당진천도). 14일에는 신풍루에서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낙남헌에서 경로잔치를 베푼다(낙남헌양로연도). 신시(오후3~5시)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불꽃놀이를 즐긴다(득중정어사도). 15일에는 다시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시흥행궁에서 1박을 한다(시흥환어행렬도). 16일 시흥행궁을 출발해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 창덕궁에 도착한다(한강주교환어도).  정말 세밀하게 그려져 그림을 보면 무슨 행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화이자 풍속화이다.

 

 

김홍도는 화원으로 활동하면서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 외에 주문받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1795년 을묘년에 부자 역관(통역사) 김한태에게 그려준 <을묘년화첩>에 나오는 그림 중 <총석정>, <독수리(해암호취)>, <소나무 아래 사슴(송하유록)> 3점이 남아있다.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의 바닷가 돌기둥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바위의 농담을 조절하여 거리감을 살리고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에 주력한 그림이다. 정자는 오른쪽 위에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다. 독수리를 닮은 물위의 현무암 바위를 호방하게 표현하였다. 커다란 바위와 노송 밑의 사슴을 대조시키고 오른쪽 공간을 트여 주어 공간의 미를 살렸다.

 

<푸른 바다와 물결 위의 갈매기(창해낭구)> 그림 2점은 해암호취 그림과 비슷한 그림인데 좀 더 보기좋다.

'그윽한 물가를 가고 오니 한가로움 이기지 못하겠구나.' 라는 제시(題詩)도 같다. 단원의 그윽한 마음이 드러난다.

 

<풍속화 8첩병풍>은 51세가 되어 그린 병풍으로 34세에 그렸던 풍속화보다 원근감이 늘고 주제가 더 잘 드러난다. 그림 내용은 <관리행차(관인원향)>, <정자의 풍류(모정풍류)>, <술파는 할미(노방로파)>, <고기잡이(해암타어)>, <꾀꼬리 소리(마상청행)>, 들밥 내가기(수운엽출)>, <봄날 밭갈이(춘일우경)>, <나루터 나그네(진두과객)>이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고단한 생활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해학적인 미를 살려 풍속화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특히 <마상청행>그림은 독립해서 절제미를 살리고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꾀꼬리가 드러나게 그렸다.

봄날의 서정을 잘 드러내는 배경에 쓴 제시 내용은 꾀꼬리 소리와 어울어지는 자욱한 봄강을 상상하게 한다.  

'예쁜 여인이 꽃그늘서 부는 구성진 생황소리요 / 시인이 술동이 앞에 놓은 한 쌍의 귤이라 할까 /

냇가 버드나무에 황금북이 분분히 오가며 / 안개와 봄비로 봄 강의 물결을 짜는구나.' 

 

김홍도 52세 되던 병진년에는 <병진년 화첩>을 그린다. 그의 후배 유한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화첩이라며 '단원절세보'라 불렸다. 모두 20점이 들어있는 이 화첩은 그의 기량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산수화와 풍속화, 화조화까지 다양하다. <옥순봉>은 그가 연풍 현감시절 그곳에 가서 보고 그렸다니 끝부분 작은 유람선에 탄 인물이 그일 듯 하다.  

 

<사인암>  역시 실경을 보고 좌우배경을 생략하여 가로 세로 결이 진 바위를 주제로 농담이 다른 나무들을 그렸다.

 

<낚시(조어도)> 늘어진 나무등걸, 낚시하는 두 사람이 정답다. 

 

<강 거너기(기우도강)> 물이 불어서일까? 소를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 이채롭다. 

 

<봄까치(춘작)> 나뭇가지에 앉은 세 마리 까치, 날아가는 까치의 구도가 아름답다.   

 

<헤엄치는 오리(유압)> 마주보며 노니는 오리를 향해 날아드는 새들, 한가롭다.

 

<두 마리 꿩(쌍치)> 배경을 연하게 거리감 주고 마주보는 꿩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비학도> 마주 보는 모양이 다정하다.

 

<해탐노화도>는 게 두 마리가 갈대꽃을 물은 그림으로 과거 시험인 소과, 대과에 모두 합격해 장원급제하길 바라는 뜻이다. '해룡왕처야횡행'이라고 쓴 화제는 '바닷속 용왕님 앞에서도 나는야 옆으로 걷는다'는 말로 장원급제하여 조정에서 일할 때 권력에 굽신거리지 말고 백성을 위해 바르게 정사를 돌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붓의 힘이 느껴진다.

 

<밭을 건너는 백로(백로횡답)>  여백의 미가 멋지다. 모두 종이에 연한색 26.7×31.6㎝

 

<김홍도 자화상>  마르고 곳곳한  느낌이다.                                                           

 

김홍도는 불교 경전 <불설 대보부모은중경>을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1796년 정조는 이 책을 인쇄하여 용주사에 보관하라 명하였다. 효심 깊은 임금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아 기르고 보살피는 과정을 차례로 나열하고, 자식이 저지르는 불효의 죄와 부모의 은혜가 막중함을 비유하였으며 보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예전에 있던 책과는 여실히 다르게 변상도는 앞쪽에 넣고 경문은 따로 분리시켜 그림의 아름다움을 살렸다. 이 변상도는 목판화 뿐 아니라  동판으로도 만들어졌고 1799년에는 석판에도 새겨졌다. 흔히 <부모은중경>으로 부르는데 부모님의 은헤가 크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나이가 들수록 여실히 깨닫게 되는,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의 은혜이다. 

 

<부처님의 예배(여래정례)>

 

<열 달 동안 품고 지켜주신 은혜(회탐수호은)>

 

<아기를 낳을 때 수고하신 은혜(임산수고은)>

 

<아기를 낳은 후 고통과 근심을 잊은 은혜(생자망우은)>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먹여주신 은혜(인고토감은)>

 

<진자리 마른 자리 가려 누인 은혜(회건취습은)>

 

<젖을 먹여서 기른 은혜(유포양육은)>

 

<손발이 닿도록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세탁불정은)>

 

<먼 길을 떠날 때 걱정하시는 은혜(원행억념은)>

 

<자식을 위해 나쁜 일까지 감당하는 은혜(위조악업은)>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은혜(구경연민은)>

 

<수미산을 돌다(주요수미)>

 

<지옥에 떨어져 받는 고통(아비타고)>

 

<높은 세계의 즐거움(상게쾌락)>

 

김홍도와 오랜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 김응환의 사위 이 명기가 함께 제작한 <서직수 62세 초상>은 각자의 장점을 살려 그렸다. 풍족했던 서직수의 주문을 받아 고매하기 이를데 없이 그렸는데 정작 자신은 제시에 쓰기를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는데 두 사람은 그림으로 이름난 이들이건만 한 조각 정신은 그려내지 못하였다. 아깝다. 내 어찌 산림에 들어가 도를 닦지 않고 이름난 산과 잡기에 마음과 힘을 낭비하였던가? 그 평생을 대강 논의해 볼 때 속되지 않았음만은 귀하다고 하겠다. 병진년 여름날 십우헌 예순 두 살 늙은이가 자신을 평가하다' 라고 자기 인격의 부족함을 탓하였다. (비단에 색. 148.8×72㎝ 보물 제1487호)

 

김홍도가 53세 되어 정조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고 고쳐 <오륜행실도>책의 밑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책의 내용은 효자 33명, 충신 35명, 열녀 35명, 형제 31명 , 친구 16명 등 총 150명의 이야기와 판화가 실려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다르게 그림을 먼저 싣고 이야기를 뒤에 실음으로 회화성이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부모은중경>과 함께 정조 시대 판화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책에는 몇 개의 그림이 소개되어 간단히 내용을 설명해주어 재미있다.

<오륜행실도> 중 <제상이 충렬을 보이다(제상충렬)>는 신라왕의 두 아우가 일본과 고구려에 잡혀가자 박제상이 몰래 구출해배에 태워보낸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일본왕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해 죽는다. (목판본 32.3×19.3㎝)  

 

<누백이 호랑이를 잡다(누백포호)> 고려시대 15살 누백이 사냥나간 아버지가 호랑이에 물려 죽자 원수를 갚으려고 도끼를 메고 산에 갔다. 배가 불러있는 호랑이를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져와서 장례를 지내고 무덤 곁에 풀집을 짓고  살았다. 충효를 제일로 치던 시대의 그림이다. ( 종이에 색. 22×15㎝)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석진단지)> 조선시대 고산의 아전이었던 석진은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보살폈는데, 아버지의 병은 산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 마시면 낫는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병을 낫게 했다는 내용이다.

 

<자강이 무덤을 지키다(자강복총)> 조선시대 성주 사람 자강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살다 돌아가시자 합장하고 3년간 무덤 곁에서 살았다. 자강이 아버지를 위해 또 3년을 지키려 하자 아내와 친척들이 말리며 풀집을 태워버렸다. 그러자 자강이 무덤 앞에서 사흘간 일어나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풀집을 지어주어 3년 동안 무덤 곁을 지켰다. 

 

<은보가 새를 감동시키다(은보감조)> 은보와 서즐은 조선시대 장지도라는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자식이 없는 스승을 부모 모시듯 하다 스승이 돌아가시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스승의 무덤을 지켰다. 그러던 중 은보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무덤을 지켰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상위에 있던 향합이 날아갔는데 그들을 보고 감동한 까마귀가 향합을 물어다 놓았다.

 

김홍도가 54세에 그린 <남산에서의 한가로운 대화(남산한담)>에는 왕유의 시를 화제로 적고 자신의 호를 '단옹'이라 적어 스스로 늙은이라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다. 그림 옆에 틀린 글자 '睡'를 '陲'로 고쳐 썼다.

중년부터 불교를 아주 좋아하여 / 노년에는 남산 모퉁이에 집을 지었네 / 흥이 날 적마다 홀로 나서니 /

좋은 일들은 나 혼자만 아네 /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 앉아서 구름 이는 때를 바라보고 /

우연히 산노인을 만나면 /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며 돌아갈 때를 잊는다네.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다(월하고문)> 당나라 시인 가도의 '호젓하게 사는 이응에게 바침'이라는 시중에서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들고 /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라는 구절을 그린 그림이다. 

 

<배 위에서 매화를 보다(선상관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소한식날 배 안에서' 중 '나이들어 꽃들이 마치 안개 속에서 보이는 듯하다.' 는 구절을 그렸다. 주제를 부각시키는 구도가 남다르고 여백이 멋진 그림이다. (종이에 연한색 164×76㎝) 

 

4장 노년의 빛과 그늘

 

정조는 규장각 <홍제전서>에 김홍도가 올린 <주부자시의도> 8폭 병풍을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주부자는 성리학자 주희를 말한다. 어람용 그림답게 그림 위에 주자의 시를 쓰고 잔글씨로 남송의 학자 웅화의 해석까지 적어 꼼꼼하고 정교하게 그렸다. 정조는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 며 자신의 화운시를 덧붙였다고 홍재전서에 전한다. 주자가 시를 통해 <대학>의 이념을 드러내고자 했고 이는 정조의 통치이념이었다. 그림 내용은 <집집마다 노적가리(가가오름도)>, <파국에 보리밥 드시네(총탕맥반도)>, <생신 아침에 술잔 올리다(생조거상도)>, <달도 가득 물도 가득(월만수만)>, <만고에 푸르른 산(만고청산도)>, <봄물에 큰 배 뜨다(춘수부함도)> 이다. 아쉽게도 제1폭, 제5폭이 사라지고 현재 6폭만 남아있다. 

 

김홍도는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조를 그리워 하던 중 건강이 좋지 않아 병치례가 잦았다. 11살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가 수두에 걸렸는데 하루만에 거짓말 처럼 사라지자 그 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김홍도에게 그림을 의뢰하였다. <삼공의 벼슬을 줘도 바꾸지 않는다(삼공불환도)>는 송나라 시인 대복고의 시 <낚시터(조대)> 한 구절을 제목으로 쓴 것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세 정승의 권력과 부를, 가난하지만 마음 편히 사는 어부의 낚시대와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림은 후한 때의 문인 중장통이 병을 핑게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전원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내용을 그렸다. 그러나 정작  이 그림에는 부유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했던 권력층의 바램이 담겨있다. 김홍도는 젊었을 때와 달리 배경을 그려 여백을 남기지 않았다. 또 선비가 이층 누각에 앉아 날아가는 새를 보며 단소를 부는 모습, 정자에 앉아 연못의 거위를 감상하는 모습, 마당에서 노니는 학과 사슴을 그린 것은 그림을 주문한 한용구와 홍의영의 문인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대단히 길이가 긴 그림이다. 1801년 (57세) 비단에 연한 색. 133.7×418.4㎝ 아래 그림은 세부도이다.

 

김홍도는 오래전부터 앓아온 천식이 심해지고 과부가 된 딸도 병이 들어 위독했다. 정조가 승하하자 그의 풍류벽과 음주벽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 때의 상황을 나타내는 그림 <낚시하고 돌아오는 고기잡이 배(조환어주)>는 제시에 쓴 글 '옳고 그름은 고기 낚는 데 미치지 않고 / 영광과 치욕은 항상 벼슬아치들을 따르네.' 세상살이 쓸쓸함이 느껴진다. 

 

60세가 되어서는 생활고로 규장각에서 실시하는 자비대령화원 시험에 참여하여 어린 후배들과 경쟁을 하였다. 그즈음에 쓴 호가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단구(丹邱)'이다. 말년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장려하는 권농을 하며 지낸 듯 하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자연을 그리며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자 함이 드러나는 그림.  살기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는 김홍도를 보는 듯 하다. 

 

<뱃노래 한 소리에 산수가 더 푸르다(애내일성)>

<조각배로 바다를 건너다(편주도해)>

<산을 바라보며 발을 씻다(관산탁족)>

<석양에 둥지로 돌아가다(석양귀소)>

<목동이 집으로 돌아가다(목동귀가)>

<밭을 갈다(경작도)>

 

김홍도가 1804년 개성에 사는 64명의 노인들이 모여 송악산 아래 옛 왕궁터인 만월대에서 계회를 연 장면을 그린 <나라에서 베푸는 경로우대 잔치(기로세련계도)> 그림이다. 기는 예순 살, 노는 일흔 살, 세련계는 나라에서 베푸는 잔치를 뜻한다. 안개를 그려 두 장면을 조화롭게 공존시켰다. 송악산부분은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고원법으로 그리고, 만월대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렸다. 하나의 작품이 진경 산수화이자 풍속화이며 계회도이자 기록화가 되었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계첩이 아닌 계축으로 그렸다. 계첩은 계회도를 책처럼 엮어서 장황했다는 뜻이다. 축화는 계회도를 수직으로 걸 수 있도록 장황(그림 뒷면에 종이나 비단을 발라 두껍게 하고 앞면 가장자리를 종이나 비단으로 두르는 것)한 것이다. 조선 전기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계축으로 그린 것은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저력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비단에 담채. 137x53.3cm)

<늙은 매화(노매도)>

 

<버드나무 아래 인물(유하인물)>과 <지장이 말을 타다(지장기마)> 그림은 모두 당나라 시인 하치장을 그린 그림이다. 두 그림 모두 술에 취한 하치장이 몸을 가누지 못해 시중들의 부축을 받고 가는 그림이지만, <유하인물> 연록색 버드나무와 풀, 연붉은색 옷과 조화를 이루며 운치를 더하는데 비해 10년 후인 60세에 그린 <지장기마>는 배경을 모두 없애고 휘갈기듯 제시를 써 넣었다.  '지장은 말타기를 배 타듯 한다 / 술에 취해 몽롱하여 / 우물 가운데 떨어져 / 잠든다.' 

 

김홍도는 노년의  고단함을 잠든 선동을 그리며 위로받고 싶었을까? 세파에 아랑곳 않고 이렇듯 휴식을 취하고 싶었나보다. 

<선동이 앉아 잠들다(좌수도해도)>

<새우를 타고 잠들다(승하좌수도해도)>

<청명낭화도>는 바다에 파도, 안개 뿐 아예 인물이 없다.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까? 

 

김홍도는 힘겨운 말년을 불교에서 많은 위안을 받은 듯하다. <습득>은 중국에서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칭송받은 인물이다. 당나라 말경 국청사라는 절에서 한산과 함께 살았는데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그의 특징만 살린 이 그림에 '오소선법 단구'라고 거침없이 적었다. 명나라 때 도석인물화를 잘 그린 오위의 호가 소선이다. 그가 그리는 법을 따라 그렸다는 뜻이다.

 

<염불하며 서방 정토로 올라가다 (염불서승)> 은 구름 위 연꽃에 앉은 선승의 뒷모습과 은은한 달빛이 고상하기 이를 데 없다. 김홍도는 구차한 현세를 떠나 이렇듯 서방정토인 극락으로 떠나고 싶었던 것 같다. (모시에 연한 색. 28.7×20.8㎝)

 

<늙은 스님이 염불을 외우다(노승염송)> '입으로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끝없이 염불하네. 단구' 라고 적었다.

 

회갑을 맞아 불교적인 주제로 그림을 그리며 김홍도는 힘든 생활고를 버티어냈다. '훈장님께 보낼 월사금이 없어 한탄스럽다'는 글이 남아있다. 가장인 그는 굶주리고 아픈 상태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잘 알고 지내던 전라도 관찰사인 심상규를 찾아갔다. 그곳 전주에서 조선 최고의 화가임을 알리는 작품 <가을바람 소리에 부쳐(추성부도)>를 그렸다.

송나라 시인 구양수의 글 '추성부'(구양수가 52세 되던 가을밤에 책을 읽다가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인생의 덧없음을 탄식하는 글)를 화제로 삼은 것은 마치 자신의 쓸쓸한 노년의 처지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이 년도가 적힌 그의 마지막 그림이 되었다. 저자는 '한국 회화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화가' 인 그는 62세가 되던 1806년에 세상을떠났다. (종이에 연한 색56×214㎝) 

 

<날아가는 학(비학도)> 그림에는 당나라 시인 이원이 지은 '학을 잃다(실학)'의 한구절이 적혀있다. 

'화표주 위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후 /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구나.

화표주는 무덤 앞에 세우는 여덟 모로 깎은 한 쌍의 돌기둥이다. 산비탈 나무로 화표주를 대신하고 

 날아가는 학의 모습이 비로소 자유롭게 신선의 세계로 올라가는 고고했던 김홍도의 영혼처럼 보인다.

 

이 책을 통해 그림 몇 개만 보았던 김 홍도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다. 멋지게 잡은 탁월한 구도, 자연스럽게 거침없이 그린 다양한 그림뿐만 아니라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음을 화제(畵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한 천재화가의 일생을 들여다 보는 즐거움이 큰 책이었다. 그가 말년에 병과 생활고에 시달렸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술인의 사회보장이 없었던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림에 관심있는 학생, 어른 모두가 즐겨 볼 수 있는 교양도서로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