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 김재순 · 법정 · 최인호
출판사 샘터
* 2004년에 펴낸 책이니, 세월이 많이 지나 고인이 된 분들의 대화이다. 이 책을 지인에게 선물하려고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정치인이자 샘터 출판인이신 우암 김재순님과 문필가이신 금아 피천득님의 대화를 1부에 담고, 2부에는 법정 스님과 소설가 최인호님의 대화를 담은 책이다.
금아는 전 생애를 통해 존경했다는 도산 안 창호님의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동지에게 피해가 갈 때만 거짓말을 해야하겠지만 그조차도 침묵이 더 좋다고 말씀하신다. 우암은 '신앙이란 홀로 있는 것, 신이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 '기도는 소원이나 구원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감사의 기도'라고 말씀하신다.
두 분은 음악에 대해서도 대화하는데, 베토벤이 청각을 잃은 가운데 작곡한 교향곡 9번에 대한 감동과 공감을 말씀하신다. 운명을 극복하고 작곡한 불후의 명작은 누구나 공감하는 가치이다.
그 외에 잉그릿드 버그만을 좋아한 이야기와 우리말, 우리 교육에 대해서 담론하신다. '말이 곧 조국이다'에서는 망가져가는 교육을 염려하신다. 나 역시 고운 우리말을 두고 너무도 상스러운 말들이 범람하고, 외국어를 섞어 써야만 지식인인 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예를 들어 왜 '아내'라는 예쁜 말을 두고 너나 할 것 없이 '와이프, 와이프' 라고들 할까? 또 아예 말을 줄이는 유행은 새로운 말들을 마구 만들어 나이든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잊혀진 순수한 우리 말을 찾아내 사용하기보다는 있는 말조차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아 염려된다.
금아는 정치가 민주적으로 나아지는 것 같다며 '이젠 아무도 쿠데타 따위로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은 못하잖아요. 이것이 그나마 문화적으로 향상된 면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그에 답하는 우암은 정치의 보편적인 가치를 말하며 '가능성의 기술'인 정치가 제몫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밤 10시경 난데없이 계엄이 발표되고, 그 위험한 시간을 깨어있는 민주시민들과 의로운 군인,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막아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도 잔불이 사회 곳곳에 남아서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지며 민주시민들을 생고생시킨다. 이런 시대적 퇴행이 벌어지다니!
또 꿈과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대해서, 영혼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친구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젊은 날의 방황과 욕망, 분노, 초조감 같은 것들이 지그시 가라앉고 안정된다는 의미이지요. 인생을 관조하고 지난 날을 회상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구요. 늙음이란 물론 젊음만은 못하겠지만, 잘 늙는 경지에 이르면 노년도 아름다울 수 있고 또 어느 순간 죽음이 닥쳐와도 두렵지 않겠지요.' 금아는 말씀하신다.
나는 젊음은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어여뻐서 좋고, 늙음은 정신적으로 안정되어서 좋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이 다가오기에 살아있는 날이 하루하루 더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우암은 '키케로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했는데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철학의 종착지가 아닐까 합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삶을 잘 살아왔듯이 죽음도 당연하고 순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제2부 '산다는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 에서 법정 스님은 단발머리 소녀의 사진을 한쪽 벽에 걸어놓고 봉순이라 칭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박물관에 가서 보는 문화재들처럼 즐거워하며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최작가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원형에 가까운 충실한 사랑이길 바란다.
스님은 기쁨이나 행복이 제 안에 있으므로 소욕지족(小慾知足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알다)하면 행복하다 한다. 나역시 그 말씀이 진리인 것을 나이들면서 공감할 수 있었다.
가족의 해체가 빈번한 것은 신의와 예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며, 수많은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야하는 곳이 가정이어야 한다며, 그 예로 막말을 삼가야함을 강조하셨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함으로 막말을 하게 됨을 조심해야한다.
교육에 있어서는 난사람이 아닌 '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역사와 예술 작품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대화한다. 또한 스님이 되고 싶은 적이 있었던 작가는 소설 '길 없는 길'을 집필하게 되고, '아름다움과 진실을 찾아내어 그에 알맞게 표현하는 창의력이 소설가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 외 제가 지은 업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에 관하여, 또 세상을 재는 자는 표준이 아니라 탄력이 있어야 함도 말씀하신다. '깨어있음'이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주위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지식인이 아닌 참 '지성인'임을 강조한다. 지식인은 넘쳐나지만 지성인은 많지 않은 세상이다.
진정한 나눔이란 베품이 아닌 수평적 관계의 나누는 일이다라는 말씀은 나누는 자의 겸손을 뜻하는 것이다.
종교와 죽음에 대해서도 대화하신다. 종교의 그릇된 신념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불화는 종교의 본질을 벗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탐구하는 노력이 끝나면 늙음과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므로 육신의 나이의 걸맞는 정신의 새로움을 죽는 날까지 추구하다 보면 죽음을 두려워 할 새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