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음악, 미술

카스트라토의 역사

나무^^ 2024. 9. 4. 17:18

파트리크 바르비에르  지음

이혜원 옮김.  김시연 펴냄.  일조각 발행

 

오래 전 지인이 자신의 딸이 번역했다며 선물해주어서 읽었던 책이다. 

'어린아이나 여자와 비슷한 성질의 목소리를 유지하도록 거세한 남자, 이탈리아에 많다.' 이는 1778년 프랑스 아카데미 사전의 카스트라토 정의이다. 그들은 교회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 배경으로 보호받은 존재였다. 실제는 극음악인 초기 오페라로 약 230년이나 유행하다가 낭만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무대에서 사라졌다. 

유명한 영화 <파리넬리>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카스트라토이다.

자필 회고록이 거의 없는 가운데 고문서 등에 의지한 그들의 관한 연구는 17, 18세기 대활약한 것에 비해 빈약하기만 하다.

최근 바로크 음악의 관심이 그 음악세계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그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벨칸토'는 아름답게 노래하기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로 소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특정 성악 양식이다. '고른 음색으로 음역 전체를 오르내리기, 완벽한 호흡 조절을 통해서 유연하게 레가토를 구사하기,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음을 정확하고 민첩하게 표현하기, 고음에서도 유려하고 깨끗한 음색을 유지하기 등이 벨칸토에서 중시한 표현 능력이다' 라고 설명한다.

이 능력을 가진 존재가 카스트라토였다. 바로크 시대와 함께 그들은 인기를 잃고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 전통은 소프라노와 카운터 테너들의 등장으로 살아 남았다. 조아키노 로시니, 빈첸초 벨리니, 가에타노 도니체티 세 명의 작곡가가 주도하는 오페라군이었다. 그후 바그너, 슈트라우스 같은 독일 작곡가와 베르디, 푸치니 등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새로이 등장하고 마리아 칼라스, 조안 서덜랜드 등의 걸출한 성악가들이 벨칸토 오페라들을 재조명하며 공연과 녹음을 하였다.

 

카스트라토 황금기에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탈장 치료를 핑게로 아들을 거세시켰다. 고음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12세기에 최초로 음악적 목적을 위해 거세를 한 곳은 에스파냐였다. 한 무리의 고자들이 모사라베 문명으로부터 전해졌는데 그들의 놀랍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해 고자 가수들이 기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교황청 성가대에 이탈리아인 카스트로토가 처음 입단한 것은 1599년으로 교황령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카스트라토가 되기 위해서 8살에서 10살 사이, 정소의 생식선이 활성화 되기 전에 2개의 정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거세수술을 받아야 했고 열악한 수술환경은 소년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 자식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성생활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성호로몬이 분비되지 않는 여러 가지 기현상들이 있었다. 또한 성공한 소수 외에는 우울증 내지 가정을 이루지 못한 고독감 등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의 양성적인 목소리를 장엄하면서도 관능적인 기교로 표현했던 그들의 초능력적인 목소리는 천사에 비유되었다. 그 덕분에 교회로부터 특권을 부여받고 신과 인간, 그리고 음악 사이에 특별한 연결고리로 받아들여졌다. 대표적인 곡이 카톨릭 성가인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이 곡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연주되었는데 너무도 아름다워 신을 잊을까 우려하여 성당 밖에서의 연주를 금하였다. 모짜르트는 4부합창, 5부 독창의 이 곡을 한 번 듣고는 10부로 작곡해 연주했다. 유튜브에서 들어보니 정말 아름답고 성스럽기 그지 없다.

 

교회 봉사로 시작된 교육은 성가대에서 경력을 쌓아 이탈리아 음악극 오페라로 옮겨가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대표적인 극장을 꼽자면 나폴리에 있는 산카를로 극장이다. 그 뒤를 이어 밀라노의 라 스카라,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을 들 수 있다. 책에서는 그 규모와 화려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카스트로토의 사치스러운 옷차림과 화려한 무대장치, 관객들의 열기 등 그 당시 오페라는 일종의 축제와 같은 것으로 극장에만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회적, 종교적 생활에 스며들었다.

 

오페라의 역사는 극에서 출발하여 음악으로 표현되는 그리스 비극에 뿌리를 두고 있음으로 시와 노래, 율동이 조화를 이룬 종합예술로 발전하였다. '레치타티보'(노래하듯 말하는)와 '아리아'의 발달과 함께 바그너에 이르러서는 순수예술로 나아가게 되었다. 점차 기교를 넘어서는 표현력에 중점을 두는 스타일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안단테로 불리는 <창백한 태양>, 아다지오로 불리는 <이 얼마나 부드러운 포옹인가> 같은 곡들이다.

헨델도 그들을 위해 곡을 작곡하였다. <메시아>에 아리아를 써넣었으며 <고아원 성가>를 작곡했다.

그 당시 표현력이 뛰어난 카스트라토는 영웅이나 귀족의 역할을 모자람 없이 잘 전달했다고 한다. 반면 뛰어난 카스트라토 중에는 거만하고 변덕스러우며 사고를 빈번히 치는 이들도 있어 많은 일화가 소개된다. 그들에게 지급되던 보수도 상당하여 일반가수들의 부러움을 샀다.

 

한 유명 카스트라토가 결혼하기 위해 교황에게 청원서를 냈으나 고자에게 결혼을 금지했던 법을 들어 '제대로 거세시켜라' 명하였다고 하니 그들의 불합리한 권세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교황청의 위선에 반발이 심해지자 소프라노 음역을 노래할 수 있는 여성가수들을 허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카스트라토는 소멸해가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 성가대보다 보수가 더 좋은 극장쪽으로 가수들이 빠져나가면서 더욱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회인으로서의 카스트로트에 대한 예를 여러 가지 면에서 서술하여 재미읽게 읽었다. 여성 소프라노 가수들과의 대립과 알력도 소개되었는데 그들이 훨씬 우세하였다. 또한 후원자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남색으로까지 진전하기도 했다. 인품이 훌륭했던 파리넬리와 메타스타시오 두 사람이 나눈 우정어린 극진한 사랑은 죽을 때까지 삶의 동반자로, 영혼의 쌍둥이로서 이어진 것을 그들이 나눈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탈리라 고유의 카스트라토는 유럽으로 전파되어 '이탈리아 음악' 이라는 수출 상품이 되어 호황을 누렸다. 프랑스에서는 파리넬리를 제외하고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우울증에 빠져있던 펠리페 5세는 9년간이나 파리넬리와 함께 하며 신뢰를 보였으며 왕이 사망한 후 그는 대공의 지위에 올랐지만 계몽주의 왕이 집권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70세라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 일부 카스트라토도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비교적 길었다.

프랑스인들이 주도한 카스트라토에 대한 공격은 거세로 인한 도덕적 문제들에 대하여 경각심을 일으키고 교회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세기에도 교황령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소년들이 거세 수술을 받아 성가대원이 되었고 유럽의 많은 지성인이 그들의 노래를 들으러 몰려갔다. 마지막 카스트라토의 일원이었던 무스타파와 그들을 반대하는 음악 감독 페로시와의 대립 속에서 교황은 금지령을 내리고 그들을 추방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전혀 알지 못했던 카스트라토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과 그들의 애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쓴 후 이 책을 가곡반 선생님께 선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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