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눈
나무
Ⅰ.
몇 년전 올캐가 키우는 하얀 개가 새끼를 세 마리 낳자
고물고물 귀여운 강아지를 내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정 못 키우겠으면 도로 가져와요.'
개를 만지는 것도 꺼리던 나는
가엾은 작은 생명이 전하는 따스함에 가슴 뭉쿨해져
얼마나 귀엽던지 가슴에 꼭 끌어안고 집으로 왔다.
시끄러운 전철 소리에 혼절한 듯 꼼짝않고 온 강아지는
그날 밤 거실 조그만 상자에서 죽은 듯이 자고 또 잤다.
다음 날은 정신이 났는지 기여코 안방에 들어오겠다고
문을 긁으며 성화를 해 버티던 날 이기고 발치로 기어들었다.
볼수록 맑고 예쁜 눈 인디언 이름 처럼 '맑은눈'이라 부르며
어린 강아지를 데리고 우리는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어찌나 영리한지 도무지 성가시게 하는 일이라곤 없는데
나는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며 투덜대곤 했다.
'아휴! 이 털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나갔다 들어올 때면 옷을 갈아입고 안아야 할 만큼
격렬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녀석은 귀신같이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나는 녀석의 영혼에 내 어머니께서 깃든 건 아닐까 의아하곤 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매일같이 현관에 앉아 기다리는
녀석의 그리움은 눈물겹도록 끈질겼다.
'이젠 오지 않는단다. 기다리지 말아.'
오랜 여행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나의 부재까지
견디기 어려운 녀석에게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사다주었다.
제 밥까지 주고 물러나 앉곤 하던 녀석의 소외감이 더해가더니
덜컥 장염에 걸려 병원간 지 이틀만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나는 짐승도 외로워서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아픈 나는 친구하라고 사왔던 '꼬마눈'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
Ⅱ.
어느 날 아파트 입구에서 오락가락 헤매는 어린 강아지
주인을 찾아주려고 일주일을 기다려도 나서지 않는다.
다시는 키우지 않겠다던 마음과 달리 꼼짝없이 거두었다.
엉덩이 살랑거리며 기어들어 머리를 부비는 귀여운 녀석
곱슬거리는 갈색털, 예쁘고 맑은 눈, 떠나간 녀석이 다시 왔다.
혼자 두고 나가면 온통 난리를 치며 제 나름 살림을 한다.
거실 가득 하얗게 널려있는 휴지와 물어뜯어놓은 신발들
현관 벽지 도배를 세번이나 하고 이런저런 장치를 해본다.
이제는 물어뜯으며 말썽부리는 때가 지난 듯 잠자코 기다린다.
아들의 여친은 녀석의 간식과 장난감을 떨구지 않고 보낸다.
아들이 들어오면 달려가 어린애처럼 끙끙거리며 어리광 부리고
내가 들어가면 반가움과 원망이 뒤섞인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제발, 조용히 해! 너 땜에 아파트에서 쫓겨나겠어!'
이 방 저 방 쫄쫄 따라다니며 옆에 앉았는 녀석을 보노라면
무조건 살아서 존재해야 하는 생명의 다름없음이 느껴진다.
산에 함께 가면 흙과 푸른 나무와 어우러진 녀석이 한결 정겹다.
녀석과 함께 사는 시간 쌓여갈수록 나누는 교감이 인간보다 미덥다.
도둑이 와도 오줌 저리며 반가워 할 녀석의 별명은 '요실금'이다.
아들과 나를 웃기는 녀석은 이제 가족처럼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서로 다른 종(種)이 함께 사는 어려움을 묵묵히 참게 한다.
암놈으로 세상에 왔으니 새끼를 낳아보아야 할 텐데
나는 또 그게 걱정된다. 함께 존재해야하는 생명의 짐스러움
오늘도 내 앞을 쫄랑거리며 산을 오르는 맑은눈 아름다운 세상이다.
'엄만 자기일만 해. 나랑 안 놀구...'
'나 찍는거예요? 이왕이면 예쁘게 찍어줘요!'
'아, 따뜻해! 난 오빠 이불 속이 좋더라~ '
'아, 심심해!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내 장난감 꺼내줘요.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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