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11. 9.5 (월) 영남일보
우리들의 주식으로 수천년 동안 생명을 이어준 곡식 중에 가장 큰 곡식은 오직 ‘쌀’이다.
이처럼 귀중한 쌀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모양을 그대로 본 뜬 글자가 곧 ‘米’(쌀 미)다.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 八(팔)과 아래에서 위로 그어진 八(팔)은 모두 다 흩어진 낱알을 나타낸 것이라면,
八(팔)과 八(팔)을 경계 짓고 있는 十(십)은 사방으로 흩어진 낱알들을 그대로 경계 짓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것임과
동시에, 또한 주식으로서의 쌀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 나간 아름다운 곡식임을 뜻하기도 한 것이다.
인류가 취하고 있는 주식으로서의 곡식은 크게 구분해 보면 쌀과 밀일 뿐인데, 이들 두 가지는 각각 성능이
서로 크게 다르다. 우선 땅에서 재배되는 시기가 서로 다르다. 밀이나 보리는 가을에 심어서 늦은 봄에 거두어 내지만,
벼는 봄에 심었다가 가을이 되어 거둔다. 그렇기 때문에 밀과 보리는 차가운 겨울을 지나며 자라지만,
벼는 뜨거운 여름 동안 성장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쌀은 그 자체가 더운 여름 동안 성숙하기 때문에 열을 머금은 발열제이고,
밀이나 보리는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자라는 작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차가움을 지니는 해열제인 것이다.
또한 벼는 주로 알곡 자체로 밥을 짓지만, 밀은 빻아서 가루로 만든 뒤에 다시 뭉쳐 빵을 만든다.
따라서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인의 주곡으로는 열을 흩어줄 수 있는 밀가루 음식이 좋을 수밖에 없고,
육식보다는 채소를 즐겨 먹는 동양인에게는 아무래도 열을 낼 수 있는 발열제가 훨씬 맞는 식생활이라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고기류는 아무래도 양에 속하는 것이지만, 채소류는 고기보다는 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부식이라도 음을 택한 자는 양을 먹어야 하고, 양을 먹는 자에게는 음을 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치 않게도 학생이 학교로 들어가는 입학의 계절도 서로 큰 차이가 있다.
동양인은 봄에 입학하기 마련이지만, 서양인은 가을부터 학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고기와 빵은 고기의 기름기를 빵이 흡수해 주지만, 아예 쌀밥은 쌀 자체에 기름기가 촉촉하게 함유되어 있다.
또 일단 가루로 빻았다가 뭉쳐 쪄먹는 빵은 아무래도 가루음식이기 때문에 알곡으로 밥을 지어 씹어먹는
우리들로서는 소화시키는 과정상 약간은 거북스럽기도 하며, 쌀을 빻아 떡을 만들어 먹을지라도 빵과 같이
부드럽게 소화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식성은 이미 쌀로 길들여져 거의 쌀 중독성이 깃든 체질로 순치 된 셈이며,
같은 밥일지라도 여름에는 보리를 섞어먹기 마련이나 찬바람이 일면 보리밥이 제맛을 잃는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
벼농사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 나간 모양을 ‘米’라 하였다 하지만, 벼도 기후조건이 알맞아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 안에서 최대의 곡창인 호남평야에서는 햅쌀이 나오는 추석을 크게 기리고,
벼농사의 적지로 최북단의 선을 그어 보면 강릉이기에 단오제를 크게 기리게 된 것이다.
이미 유전적으로 길들여진 우리의 식생활을 더욱 활착시키기 위해서는 쌀농사가 우리네 근본이라는 점을
다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