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禮 (예도 예 : 신 앞에 풍성한 예물을 바치는 모양)
아주 옛날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는 자연적인 현상을 아주 두렵게 여겼다.
하늘 저편에 어떤 절대자가 숨어 있어 사람을 응징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우레가 치는 때는
번갯불이 번뜩이고, 파도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더욱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늘을 항상
두려운 존재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번개나 비를 막아 하늘을 가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에
하늘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공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하늘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작용했고, 가장 이상적인 인간 실천의 최종 목표는
하늘까지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至誠感天)’는 말이다.
즉 하늘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새로운 자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이런 자각의 핵심은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하늘이 감동하고, 결국 하늘을 감동시킬 요소가 인간의 마음 자체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뜻에서 하늘을 향한 가장 큰 경외심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도는 되도록 풍성한 제물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제물로 나타낼 수 없다면 참다운 뜻이 없다(無物不誠)’는 말이 바로 이런 말이다.
이런 면에서 ‘ ’(예도 예) 자와 ‘禮’(예도 예) 자는 똑같은 뜻을 지닌 글자로, 다 같이 하늘 끝에 계신 신성한 신을
나타내는 ‘示’(神의 古字)에 각각 ‘乙’과 ‘ ’을 붙인 글자다. 즉 ‘ ’는 하늘 저 꼭대기에 군림해 계신 해, 달, 별 등과 같은
하늘신에게까지 정성을 뻗쳐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뜻을 지닌 글자다. 지금은 ‘禮’를 간략히 쓴 글자로 쓰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글자 뒤에 나온 글자로 ‘禮’는 풍성한 제물을 바친다는 뜻을 나타낸 글자다.
따라서 똑같은 ‘禮’를 표현한 전후의 글자 모양을 보고, ‘예’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앞선 ‘ ’는 정성 자체를 강조한 것이나, 후자인 ‘禮’는 정성을 풍성한 제물로 보고 이를 강조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 천지와의 교섭관계가 원활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인데, 다만 그 표현이
다르게 나타난 사실은 그만큼 그것에 대한 자각의 농도가 달랐다는 증거다.
이후로 주자는 ‘예’를 풀이하기를, ‘하늘 이치의 마디와 무늬를 그대로 본떠다가 사람 살아가는 일의 거동과
법칙으로 삼은 것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하였다. 즉 예는 본디 하늘에서 그 줄기를 잡아내어
실제 사람이 살아가는 행동이나 법칙으로 꾸려낸 것이라는 말이다.
흔히 말하기를 ‘천리인욕(天理人欲)’이라고 해 ‘無欲’한 하늘에 ‘사람들의 욕심’을 대비시켜 경계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주자의 풀이에 의하면 누구나 인간 자체에 깊숙이 숨어 있는 天理(仁: 어짊, 곧 양심)를 끌어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이룩해야 함’이 곧 ‘禮’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을 공경의 주된 대상으로
여겨왔던 자연신앙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우선 인간이 서로를 경외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것을 강조한 것이
‘하늘도 공경할 줄 알고, 인간들끼리도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敬天愛人)’는 주자의 큰 바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