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인이 읽어보라고 빌려주어서 읽게 된 책이다.
예전에 남편이 사주어서 읽었던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를 쓴 작가인지라 흔쾌히 받아 읽었다.
남편은 그 책을 한 동료에게도 선물로 주었었다. 그 때 일들이 생각난다.
삼년(1987~1989)간의 유럽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작가 특유의 유유자적하는 분위기로 쓰여져 편안히 읽었다.
글을 시작하며 쓴 작가의 글이다.
'어느날 문득, 나는 도무지 긴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딘가 멀리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아주 먼곳에서, 아주 먼 시간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희미하게 들릴락말락.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나는 기여코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 것이다...'
여행이란 사람마다 그 목적이나 취향, 느낌이 모두 다를 것이다.
나는 한때 견디기 힘든 슬픈 시간들을 바람처럼 실어가 버리고 싶었다.
다시 일어서야 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낯선 곳을 향해 길을 떠나고 또 떠나기를 반복했다.
남루한 감정 대신 희열에 찬 희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행은 가는 곳마다 쓸쓸함을 몰고왔다. 그 당시에는...
작가는 이탈리아 로마, 그리스 아테네, 스펫체스섬에 머물면서 일상적인 생활의 느낌들을 들려준다.
스펫체스섬에 며칠간이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온갖 쓰레기들을 뒤덮은 어마어마한 양의 분꽃더미, 무너진 돌담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그대로 쌓아올리는 마을 주민들. '블록담과 비교하면 구름과 진창 같은 차이다. 큰 비만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멋들어진 벽이다.' 그러나 몇년 후에 태풍은 또 다시 온다. ㅎ
작가는 며칠씩 계속 비내리는, 휴가철이 지난 미코노스섬의 썰렁함을 묘사하였다.
나는 친구와 터키에서 그리스 아테네, 미코노스섬과 산토리아섬을 봄에 여행한 적이 있었다. 섬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꼭 동화속 나라에 온 것만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과 풍차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에게 해의 푸른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황홀한 일몰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을 그리스 여행하기 전에 읽었다면, 차로 일주하기에 알맞은 섬이라는 로도스 섬을 가 보았을텐데...
산 속 계곡에 있고 공작이 많다는 특이한 레스토랑 '에프타 피게스' 가 멋질 것 같다.
'몸이 바싹 메말라 언어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극한적인 상황까지 몸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장편소설은 그만큼 절실한 지점에 도달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마라톤 경주와 비슷하여, 그런 지점까지의 조정에 실패하면 막판에 숨이 막혀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소설은 나중에 <노르웨이의 숲>이 되는데, 이 무렵에는 아직 제목도 정해지지 않았었다... 이래 가지고선 안 되겠어, 도저히 삼사백 매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이듬해(1987년) 사월까지 시실리, 로마로 옮겨 다니며 소설에 푹 빠진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구백 매로 완성되었다.'
작가는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쓴다. 체력관리를 위해 달리기를 두어시간씩 한다.
글에서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꾸준히 글을 쓰는데 있어 아내는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로 도움이 클 것이다. 어쩌면 아내에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영국 런던을 잠깐 여행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사이클링으로 캣슬 쿰이라는 작은마을로 가는 내내 자전거가 말썽이였다. 간신히 마을에 한 곳 밖에 없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자칫 굶을 뻔 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음식이 더 맛있었겠는가!
결국은 기아가 완전히 분해된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오 킬로미터를 걸어가야했지만 그는 그 여행이 행복했다고 한다.
한여름, 으슬으슬 비가 내리던 자욱한 런던의 거리에서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던 경험은 얼마나 낭만적이었가!
여행에서는 온갖 예상치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고 꼼짝없이 겪을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그 모든 번거로움이 싫다면 아예 나서지 말고 안락한 집에 머물러야 한다. 따라서 여행을 하면서 숱한 일을 겪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시야는 넓어지고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많은 경험들은 미숙했던 심신을 성숙하게 한다.
작가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중 토스카나 지방 의 '캔티'를 꼽는다. 우선 경치가 아름답고 사람들도 부드러우며 포도주도 유명하다. 장인에게 맛좋은 포도주를 사러간 이야기가 나온다. 농가를 개조한 여관이 많아 숙박도 편리하다.
그 중 포도원 한 가운데 있는 '치구정'이라는 숙박시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스위스의 한 변호사 부인이 별장용으로 이 집을 구입했는데, 그 전에 미국 어떤 가이드 북에 '매력적인 작은 여관'으로 소개되는 바람에 휴식을 즐기려 온 그녀에게 예약전화가 걸려왔다. 열린 마음의 후덕한 그녀는 몇명의 손님을 받아들여 함께 즐기면서 이 집은 간판 없는 유명 여관이 된 것이다.
성실한 그녀는 알뜰살뜰 집안을 청소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장을 보아다 손님들의 아침식사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여관을 나설 때, 여러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아주 즐거웠어요.라고 말하자 부인은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그러나우리가 이 다음에 왔을 때 그 부인이 여전히 여관을 경영하고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렇게 굉장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상당한 중노동이라고 생각하니까...' 여행하는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B&B인거다.
이탈리아의 우편제도의 불성실함이 그처럼 고약한지 글을 읽고 알았다. 오죽 미덥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넘어가 원고를 보냈을까! 또 로마에는 좀도둑이 많아 떠나기 바로 전 날 아내가 백을 날치기 당한다. 그래서 다시 발급받아야하는 항공권과 카드 등을 재발급 받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반면 그리스에서는 일년 가까이 살면서 도둑에 신경 쓴적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여러 여행 중 아프리카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목에 걸었던 작은 항공용 헝겊지갑을 날치기 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혼잡한 곳에서 얼마나 쏜살같은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여권, 카드, 핸드폰을 분실한 그녀는 며칠후 그 도시를 떠나야할 때 한국으로 돌아갔다.
부부는 영화나 음악회 감상을 자주 간다. 작가의 음악적 심미안이 대단한 것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여행을 하면서 부부가 함께 영화나 음악을 즐기는 모습은 얼마나 보기 좋은가!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나도 남편과 살때 많은 즐거움을 나누며 살았다. 지금도 그때가 그립곤 하다.
'나에게는 지금도 저 먼 북소리가 들린다. 고즈넉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을 귀로 느낄 수 있다. 까닭없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일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기적이며 일시적인 나 그 자체가, 내 존재의 영위 그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란 행위가 아닌가, 하고.
그리하여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아무데도 갈 수 없는 것이다.'
코로나 감염으로 외국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때에 작가의 글을 읽으며 마음으로 함께 여행을 다녔다.
작가의 필력과 노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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