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91)
2009. 7. 20 (월) 영남일보
본디 다른 것은 많다. 우선 색이 다르다는 말을 두고 '흑백'으로 갈라 이른바 '흑백을 가린다'라고 하고,
모양이 다르다는 말은 '모난 것과 둥근 것'으로 구분지어 "지혜는 둥글게 갖추고 행동은 반듯하게 하라"
(智圓行方·명심보감)고 가르쳐 왔다. 높은 하늘과 넓은 땅이 다르고, 서서 움직이는 동물과 한 군데에 자리를 잡고
커가는 식물이 다르고, 너와 내가 각각 다르다 하나 실은 전혀 다른 것은 '삶과 죽음'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내 삶은 곧 조상의 죽음(희생)에서 얻어진 결과일 따름'이라.
그래서 "손가락이 능히 땔나무를 다 공급할 수는 없어도 불은 붙어 가는 것이고 언제 종말이 올지는 알 수 없다"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장자)고 하였다.
나 하나라는 개체의 삶은 유한하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오고 또 물려온 것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흐르는
나 하나라는 개체의 삶은 유한하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오고 또 물려온 것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흐르는
뜨거운 생명의 불은 꺼져 나갈 수 없는 노릇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집집마다 조상의 아름다운 뜻을 숭상해 온
우리네 조상들은 집안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갖은 정성을 다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릴 때도 이미 돌아가신 고인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을 앞세워 마치 고인이 바로 앞에 살아계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의 정을 다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뒤집어 쓴 것을 '탈'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일러오는 탈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 때에 뒤집어 쓴 것을 '탈'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일러오는 탈의 기원이 된 것이다.
그렇기로 사실 '탈'이란 곧 본디 '귀신의 머리' 그 자체인지라, '鬼'(귀신 귀)자에서 머리 부분만을 떼고
거기에 '又'(또우;손이라는 뜻으로 十처럼 변형된 것)를 붙인 '卑'(낮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동안 탈을 잡고 서 있는
나이나 신분이 낮은 동자'를 뜻하는 글자다.
또 귀신은 누구에게나 다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너나없이 두려움으로 잘 받든다는 뜻에서 '귀신 머리' 밑에
너와 나를 뜻하는 두 사람을 붙여 '畏'(두려워할 외)를 귀신을 받드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글자로 쓰게 된 것이다.
흔히 "죽음은 한편이 삶이요, 삶 자체는 곧 죽음으로 향하는 행진이다"라고 하여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을
흔히 "죽음은 한편이 삶이요, 삶 자체는 곧 죽음으로 향하는 행진이다"라고 하여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굳이 깊은 철학적 사유에서 얻어진 말로만 받아들일 게 아니라, 장자의 말처럼 나무와 불의 관계로만
해석해도 "삶은 곧 죽음의 근본이요 죽음 또한 삶의 바탕이다"(生 死之本 死 生之本·음부경)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탈을 뒤집어 쓴 모습과 탈을 벗은 모습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귀신 머리를 받든 모양을
본 뜬 '異'(다를 이)자를 전혀 다르다는 뜻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써 오고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발한 발상으로 만들어진 글자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코 탈을 뒤집어 쓴 겉모습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발한 발상으로 만들어진 글자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코 탈을 뒤집어 쓴 겉모습과
탈속에 가려진 속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분명코 삶과 죽음의 모양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탈을 쓴 사람이나 벗은 사람의 다름은 쓰고 벗은 차이 말고 더 이상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래서 전혀 다르다는 말까지도 실은 겉과 속을 구분하고 보면 다를 뿐이지, 겉과 속을 구분하지 않고 본다면
실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조상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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