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10. 3. 1 (월) 영남일보
본디 '새'란 말은 아무리 빽빽한 숲일지라도 사이와 사이의 틈새를 잘 빠져 난다는 뜻에서 '새'라 하였다. 날랜 물고기를 좌우로 살피면서 먹이를 쪼아 먹을 때 좌우로 번득이는 눈을 그대로 본뜬 글자다. 그런데 뚫어지게 노려본다는 뜻에서 '보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저구새' 같은 무리는 제 스스로 먹이를 잡아먹기보다는 남이 잡아먹다가 버린 먹이나, 아껴둔 것을 슬쩍슬쩍 좌우를 살피며 먹는 습성이 있다. '舊'(옛 구)도 본디 '저구새'라는 말인데, 지금은 이를 오랜 것을 나타내는 '옛 구'로 사용하게 됐다. 까마귀는 눈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체가 검기에, 새에서 눈을 생략한 모양을 '烏'(까마귀 오)라 하였고, '검다'는 뜻으로도 쓰게 됐다. '鳴'(울 명)은 새가 운다는 뜻으로 '울다'라는 말이 되지만, 까마귀가 운다는 뜻인 '嗚'(슬플 오)는 까마귀 떼가 몰려와 짖어대면, 반드시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긴다는 뜻에서 '슬프다'는 말로 쓰게 됐다.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말처럼 죽음에는 으레 원인이 있기 때문에, 어찌 죽었는가 하는 의문이 뒤따르는 법이다. '烏'(까마귀 오)는 '어찌'라는 말로도 쓰고 또는 '없다'라는 말로도 쓰게 됐다. "공에서 태어난 몸이라 결국에는 공으로 돌아간다"(空手來空手去)는말을 바꿔 '烏有'(오유; 사물이 아무 것도 없이 됨) 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의 '烏'(까마귀 오)는 곧 '無'(없을 무)라는 뜻이며, '烏石'(오석)이라 말할 때의 '烏'(까마귀 오)는 '검다'는 뜻이다. 어둠이 있다는 말로 풀이하는 이도 있다. '無'(烏; 어둠)에서 밝음이 나와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과정 자체는, 모양과 빛깔을 갖춘 형형색색의 '有'(존재)이기는 하나, 그런 형형색색은 한정된 것이라 끝내 죽음으로 치닫다 '烏有'(오유)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검은 것에서 밝음으로 나왔다가 다시 검은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자도 일찍이 이르기를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듦에 비어야 비로소 그릇의 효용이 있게 되는 것이며, 집을 지음에 창과 문을 뚫고 벽을 쌓아 빈 공간을 둬야 집으로서의 효용이 갖춰지게 되는 것이다.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 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도덕경 11장)"라 하여 有가 큰 것이 아니라, 有를 담는 無가 훨씬 크다고 無를 강조했다. 그보다 더 높은 새는 저 태양 속에 갊아(감추고) 있는 검은 까마귀이다. 그런 점에서 까마귀는 흉조가 아니라, 오히려 길조이며,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땅히 돌아가야 할 편안함이라고도 하였다.
같은 새라 할지라도 타고난 특성은 각각 다르다. '觀'(볼 관)은 본디 황새라는 말로, 논두렁의 황새가
본디 명사였던 것이 다른 뜻으로 굴러 쓰이게 된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는 말자체도 아무리 밝은 해가 만물을 비춰 낳고 기른다 할지라도, 저 태양의 중심에는
구만리 창공을 날며 바람을 내는 봉황새는 생명의 자유를 상징하는 새 중의 왕이라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