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10. 2. 22 (월) 영남일보
새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누면 꼬리가 긴 새로서 '隹'(새 추)가 있고, 꼬리가 긴 큰 새를 말하는 '鳥'(새 조)가 있다.
이 큰 새는 부리와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자국을 그대로 본뜬 글자다.
크고 작은 모든 새들은 분명 땅을 의지해 살아가기는 하지만 대부분 낮 동안에는 하늘을 누비며 날아다닌다.
마치 풀 돋은 그 자리 위에 해가 떠서 '早'(아침 조)가 되듯 일찍 일어나 날기 때문에 그 소리 값 자체도 '조'라 하였다.
작은 새들이 짝지어 울면 서로가 화답한다는 뜻으로 '唯'(대답할 유)라고도 하고, 또 오직 대답하기 때문에
'오직 유'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큰 새들이 소리하면 '鳴'(울 명)이라 하여 '울다'는 뜻으로 썼는데,
이는 개가 소리하면 '吠'(짖을 폐)라 하여 '짖는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대부분 새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상당 수 새의 이름은 그 소리를 붙여 부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꾀꼴꾀꼴-' 울기 때문에 '꾀꼬리'라 하였고, '뜸북뜸북-'소리내기 때문에 '뜸북새'라 하였다.
이와 같이 '구구구-'하는 새는 '鳩'(비둘기 구), 제 주인이 아니면 반드시 '아아아-'소리치며 끈질기게 달려드는
새는 '鵝'(거위 아), 입을 크게 벌려 어금니까지 드러나도록 '깍깍깍-'짖어대는 새는 '雅'(까치 아)라 하였다.
'오리'는 제 먹이를 부지런히 찾아 온종일 물위에 떠서 '자아자아-'하기로 '鴨'(오리 압)이요,
'갈매기'는 무리를 지어 '꾸악꾸악-' 소리치며 바다를 누비기로 '鷗'(갈매기 구)라 하며,
'고니'는 '꾸억꾸억-' 뭔가를 찾는 듯 소리치기 때문에 '鵠'(고니 곡)이라한다.
소리만으로 새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소리와는 달리 그 고유한 성질을 본뜨기도 하였으니,
좋은 예를 들면 사람과 가장 익숙한 '닭'을 들어 볼 수 있다.
닭은 참 묘한 놈이다. 한 무더기 모이를 수북이 주어도 반드시 차곡차곡 먹지 않고 발로 '닭닭닭-'
흩어놓고 하나하나 쪼아 먹는다. 그래서 '크다'(大), '작다'(小)에 '발톱'(爪)을 붙여 '鷄(닭 계)라 하였고,
'닭'이라는 우리 말 역시도 '닭닭닭-' 헤친다는 뜻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수많은 새 중에서 제일 큰 새는 역시 큰 바람을 일으키는 '鳳'(봉황 봉)이기 때문에 '바람'(風)을 붙였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봉황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 아니겠는가.
천년을 굶주려도 그 굶주림을 참아 내었지 결코 좁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게 바로 봉황이다.
장자는 봉황을 두고 이르기를 "벽오동이 아니면 앉지 않고, 요천의 맑은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고,
죽실(대나무 열매)이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非梧桐不捿, 非川不飮, 非竹實不食)"라고 했다.
봉황은 새 중의 왕으로 위대하기도 하지만, 그 봉황을 어김없이 잘 받쳐 주는 오동도 참으로 고상한 나무다.
이름만 오동이라고 다 오동이 아니다. 개오동에 앉을 수는 없다. 오직 벽오동을 찾아 앉는다.
이런 뜻에서 "매화는 일생동안 차가운 속에서 꽃을 피우니 그 향기를 함부로 내지 않고,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언제나 가락을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梅一生寒不賣香, 桐千年老恒藏曲)"라 하였다.
봉황을 맞으려면 벽오동을 심어야 하듯 의식이 높아져야 새 바람이 이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