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10. 3. 29. (월) 영남일보
생명체는 종족보존의 이치 때문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새끼를 친다. 사람이나 털 달린 짐승들은
태를 빌려 낳고, 날개 달린 새들이나 비늘 덮인 고기들은 알속에서 깨어나고, 벌레 또한 알속에서 깨어난다.
모든 생명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음양의 조화를 통해 이뤄진다. '몸'이라는 말도 '음양의 모임'을 뜻한 말이며,
'새끼'라는 말 역시 '음양의 사이에 끼었다가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생명체가 맨 처음으로 태어난 모양은 여러 형태가 있다. 새끼들의 공통된 모양은 머리와 몸통의 두 부분으로
집약시켜 나타낼 수밖에 없는데 '夭'(어릴 요)는 처음 태어난 새끼의 모양, 바로 그것을 본뜬 글자였다.
'幼'(어릴 유)는 아직 힘이 없는 아주 어린 아이를 뜻한다. 흔히 사용하는 '幼兒'(유아)는 '힘도 없고 머리마저
아직 여물지 아니한 어린 아이'를 뜻한다. '먼저 태어나 머리가 이미 여문 아이'를 뜻하는 '兄'(맏이 형)과는
구별되는 말이다. 제 스스로 돌아다니기는 하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아이'는 '童'(아이 동)이라 한다.
즉 '幼'와 '兒'(아이 아)는 자라서 '兄'도 되고 '童'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幼'는 비록 작은 것이기는 하나 장차 클 것이며, 아무리 큰 것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작은 것이 커진 것이라는 말은 틀림없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아주 작은 털끝 같은 씨앗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천리를 향한 여행도 한 걸음 발밑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合抱之木 始於毫末, 千里之行 始於足下)'는 말은
뜻하는 바가 매우크다.
산이 깊으면 골도 그윽한 법이라 '深山幽谷(심산유곡)'이라 한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에 골이 작다는 뜻에서
''를 쓴 것이 아니다. 너무 멀어서 가물가물하게 여겨진다는 뜻에서 '크다'(깊다)는 뜻으로 썼다.
새끼는 새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끼가 크면 큰 것이 된다. 바위가 부서져 돌이 되고 모래가 되며
흙이 된 것만이 아니라, 흙이 뭉치면 모래나 돌만이 아니라 바위도 되고 산도 된다는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새끼를 잘 기르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어미의 뱃속에 든 태아를 가르치는 태교는
태어난 뒤 스승을 모시고 10 년 공부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는 종래 사주당 이씨의 태교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숨은 것보다 더 나타난 것은 없고, 작은 것보다 더 드러난 것은 없다.
(莫現乎隱 莫顯乎微)(중용)'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그루 나무가 시원찮은 까닭도 애당초 싹이 시원찮지 않았던가를 잘 살필 필요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 싹이 시원찮은 까닭도 종자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결과를 두고 뉘우치기보다는 원인을 잘 살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예로부터 동양인의 기본생각이다.
공자도 이르기를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니 근본이 잘 서면 길이 열린다(君子務本 本立道生)"라 했다.
나무도 좋은 종자를 골라 바르게 심어 거름을 잘 주어야 알찬 열매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