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邑 (고을 읍)

나무^^ 2011. 7. 25. 23:04

 

                                                    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11. 4. 25 (월) 영남일보

 

                           邑 (고을 읍 : 고대의 작은 나라 도읍)

 

                 

                지도는 육지와 바다로, 육지는 산과 강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산과 강은 서로 관계가 깊다.

                예부터 지금까지 산과 산은 물의 흐름을 가두어 흘러내는 강의 울타리이기 때문에 산이나 강이

                이곳과 저곳을 갈라놓는 경계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씨족사회가 부족사회로 커지고, 부족사회가 다시 부족연맹으로 성장했다.

                초기의 국가적 형태를 이루는 그 사회의 지리적인 중심축은 아무래도 산이 아늑하게 막아주고,

                그 산 아래에 제법 큰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 적당한 자리였다. 그래서 생긴 글자가 곧 '邑’(고을 읍)이다.

                작은 나라의 도읍이 될 법한, 필요충분 조건은 인구가 모이되 산이 감싸돌면서 제법 많은 물이 흘러야 한다고 여겼다.

               '口’는 '인구’를 말하고 '巴’는 산과 물이 감싸도는 것을 나타낸 글자다.

                예로부터 작은 나라는 오늘날 '郡’(고을 군)에 해당되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군소재지를 '읍’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정작 나라다운 나라로 규모가 커진 형태를

                비로소 '邦’(나라 방)이라 했다. 그러니 '邦’이란 '邑’이 커졌다는 뜻에서 '邑’에 '크다’는 뜻을 붙인 것이다.

                즉 '邑’을 소재지로 한 작은 나라와 작은 나라가 백성들이 서로 출입하는 더 큰 '邑’이 생기자 이를 중심으로

                뭉쳐진 나라를 곧 '방’이라 하고 '방’의 소재지를 일러 '都邑’(도읍)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따라서 '都邑’이란 '읍 중의 읍’이란 뜻으로 모든 읍 사람들이 뭉치는 구심점을 말한 것이며,

                이 같은구심점에는 반드시 '邦’을 이끄는 임금의 선조들을 모시는 '宗廟’(종묘)와 '社稷’(사직)을 두어

                작은 나라의 연합적 성격을 굳게 했다.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기는 하나 그 명맥은 오직 새롭다(周雖舊邦 其名維新)’는 대학
의 글귀를 보더라도

                중국 고대에 있어 주나라는 인근의 작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구심점이 되는 선진 나라였다.

                그런데 그 선진적으로 이끌어 가는 구심체로는 '도읍’으로서의 체모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역대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도 있어야 했고, 또한 씨앗의 원조인 '稷’(곡식귀신 직)과 더불어

                강토를 지키는 신으로서의 '社’(토지귀신 사)를 모시는 사직도 있어서 명분상 종묘사직을 지켜야 했다. 

                조상의 거룩한 뜻을 물려받는 일이 곧 '효에 바탕을 둔 충’이요,

                나라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현실적인 권위의 상징은 씨앗과 영토를 지켜 주는 곡식귀신과 토지귀신을 섬기는

                우두머리가 곧 왕이라는 뜻에서 종묘사직은 매우 중요한 나라의 상징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어느 나라가 딴 나라로 쳐들어가 도읍을 점령했을 경우에도 점령지의 위신을 고려해

                종묘는 함부로 훼손하지는 않았다. 군사를 통솔하는 장군이 더욱 큰 장군이 되어 '도원수’가 되듯

                작은 나라의 소재지인 '읍’이 커져 '도읍’이 되고 도읍을 지닌 나라를 비로소 나라 중의 나라로서

               '邦’이라 일렀던 때만 해도 인심이 소박했던 때라, 큰 나라를 다스리던 왕이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종묘로 나아가 근신하고, 항상 씨앗과 영토를 지킨다는 자신의 뜻을 되새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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