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도르프만 作
연출 이 성영 극단 백수광부
출연 예수정, 한명구 외 다수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완성도 높은 연극을 보았다.
남미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는 '아리엘 도르프만'은 칠레의 군부독재를 피해 나찌 독일의 점령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했을 때 이 작품을 처음 시로 썼다고 한다.
그의 시는 다시 소설이 되었고 그후 희곡으로 집필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2 살때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12 살때 칠레로 이주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31 살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그의 유배적 삶의 흔적들은 그의 문학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1992년 발표한 그의 또 다른 희곡 <죽음과 소녀>는 영화화되어 상영되었다.
그는 어느날 저녁 강가에서 물에 밀려 떠내려온 시신의 손을 잡고 있는 한 여인을 우연히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밤을 새워가며 시를 썼다고 했다.
작가 후기에서 그는 말한다.
'길고 어두운 유럽의 밤을 지새우며 내 안의 어둠으로부터, 망각과 무관심 속에 그 여인이 덫에 걸려있는 세상 저편의
어둠으로부터 그녀를 끌어내려 애썼다. 나는 거기 앉아서 그녀가 하는 말, 그리고 내가 뜻하지 않게 살게 된
낯선 세상에서는 들어줄 사람이 거의 없는 말을 한마디 한마디 남김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시를 썼고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해 1978년 소설 "과부들'을 집필했다.
그토록 심한 상실에 대해 쓸 수 있었던, 그가 누린 안정과 기쁨은 바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빼앗긴 것임을
그는 자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1985년 다시 희곡으로 태어나기까지 그의 삶에 가장 길고 가장 힘든 창조의 여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늙은 여인을 만들었다. 나는 그 여인과 그녀의 가족과 그 강과 그녀에게 어떻게 대처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위를 창조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상상력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작품에서 최종적으로 묘사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세계에서 실제 시신들을 찾아다닌 현실의 여인들이 그녀를 생명의 불꽃으로 탄생시키고
영감을 불어넣어 거기 존재하게 했기 때문이다...
저 기다리는 여인들에게, 이십년 전 꿈처럼 내게 다가온 이 이야기의 숨겨진, 침묵하는 이야기꾼인 여인들에게,
그들에게 마침내 <과부들>을 바친다...'
이 작품에서 딱히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연출자 이성열씨는 아마도 관람객 개개인마다
보고 받아들이는 여러 가지 형태의 느낌을 자유롭게 놓아두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삶과 죽음을 접하고 이해할 만큼 나이가 들었음에도 굳이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적인 미적 감각과 감동의 시간을 즐기기 위함이다. 그리고 어렵게 작품을 올리는 이들의 열정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혼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 세련되고 아름다운 무대와 조명, 이야기가 펼치는 상상력에 동화 또는 공감하는
즐거움은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는 신선한 감흥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문제는, 그 일을 다루는 군인들과 마을 여자들의 다른 의미성에서
충돌한다.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여인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강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는 장소로 강물에 떠밀려온 시체는 그 강에, 그들의 삶에 문제가 생겼음을 드러낸다.
마을 여인들이 고집하는 장례의식은 그들 삶의 전통을 의미하며 정부의 폭력을 고발하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지 않고 그의 상상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고발하는 문학적 예술성을 발휘한다.
기다림은 작가가 표현한 무언의 끈질긴 저항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루어질 역사적 심판을 의미했다.
실제로 몇년후 칠레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매장된 시체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맞닥뜨려 그것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아야 하며, 설혹 우리를
수치심에 떨게하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그 과거를 발가벗겨야 한다. 설령 그것이 아프다 해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간 감춰온 진실들을, 우리 동포들의 고통의 댓가로 맛본 기쁨을 서로에게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유왕무 교수의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에 나타난 역사적 현실과 문학적 창조'에서)
그는 그렇게 그의 작가적 운명을 자신의 존재이유라고 믿었다.
1부 마지막, 여인들의 애타는 기다림과 좌절등을 화해시키는 춤은 이 연극의 백미라 하겠다.
무거운 분위기의 내용에 화기애애한 느낌을 멋지게 불어넣었다. 그리고 허밍코러스를 포함한 음악도 아름다웠다.
여인들의 소박한 옷차림에서 보여주는 색의 조화도 세련되고 보기 좋았다.
2부 마지막 장면, 항거하는 여인들의 강인함은 붉은 조명 아래 인상적이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길고 짧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내 안의 희망일 수 있어야만
우리는 때때로 힘에 겨운 삶을 버터낼 수 있다. 또한 누구나 합리적인 위선자가 될 수도 있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종내는 '용서'와 '화해'라는 미덕을 베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토요일 오후, 거리공연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생기 발랄함을 보면서 함께 웃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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