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

순진한 걸음 (순진 作)

나무^^ 2017. 12. 12. 14:19

 

순진한 걸음

 

        

2010년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라는 이 책은 카톨릭 신자인 지인을 통해서 읽게 되었다.

              작가의 본명은 김수진이고 '순진'은 그의 필명이다. 이름처럼 영혼이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젊은이인 것을 느끼게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쪽 발목이 아픈 그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걸음, 마치 달팽이처럼 천천히,

              천천히 걸으며 하루하루를 깨알같이 적어내려간 소중한 일기책이다.

              마음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글, 재미있었다. 마치 함께 그 길들을 걸어온 듯 느껴진다.

 

              산티아고 순례를 무사히 끝낸 듯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힘겨웠던 히말라야 트레킹의 경이로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체력이 약해서 나는 일행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매일을 혼자 걸으며 '고독한 순례자'가 되곤

              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일기조차 쓰지 못하고 사진만 좀 찍으며 메모에 그쳤던, 강행군의 나날이었다.

              순진님처럼 혼자는 떠날 생각도 못했던, 지인의 꾐(?)에 넘어가 시작했던 트레킹이었지만 정말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ㅎ...수호천사가 되어주겠다며 권하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않았을 일이었다.   

              우리보다 젊은 팀장의 욕심 아닌, 좀 더 배려가 있었다면 무사히 5,800km 고지까지 갈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나는 5300km에서 하루를 쉬어야 했다. 팀장은 안나푸르나까지 한 코스 더할 생각에 무리했지만 결국은 그도

              지쳐서 국립공원에서 며칠을 쉬어야만 했다. 돌아가는 비행기 일정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된 경험은 상대적으로 대단한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게 해주고 자기성찰을 할 수있게 해준다.

              너무 힘들고 아파서 울기도 많이 한 순진님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서른살의 젊은 그는 마냥 느린 속도가 부끄러웠지만 스스로 느린 것을 인정하고 그래도 걷고 있는 자신에게 행복해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어오른 오른쪽 발목의 통증과 함께 걸어가야 하는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다. '삶은 자신과의 싸움'

              이라고 하지 않던가!  누구나 모두 형태가 다른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건...

              심리학 공부를 할 때 의학상으로 원인이 드러나지 않는 육체적 이상이나 통증은 심리적 트라우마에 의한 것일 때가 있음을

              배웠었다. 심리적 고통으로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육체적 이상반응으로 주의를 돌리게 하여 무사히 생존하려는 현상이다.

              신기하게도 심리치료로 그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게 되면 그 이상현상은 사라진다. 순진님도 어쩜 그런 것일지도...

              나는 어릴적 다친 왼쪽발목 관절염으로 몇십 년간 통증이 심했던 경험이 있는터라 순진님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길을 떠나야했던 그의 절박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상처를 받는다는 건 주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려고 애를 써도 내가 나를 상처 입도록 허락하지 않으니 상처받지 않았다. 아, 이런 거였구나. 지금까지 내가

              받은 상처들은 남이 내게 주기 전에 내가 먼저 내게 입힌 것이었구나...>

              시종일관 절룩거리면 걷는 그는 문득 문득 이러한 성찰들을 하면서 내면의 의식을 성숙시켜간다.

              맞다. 정신적 상처나 고통은 어리석은 자의 몫이었다. 무명(無明)을 깨우치면 어둠은 사라진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는 수많은 천사들을 보았고, 수많은 생각지 못했던 기적들을 경험한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목을 놓아 통곡했다.

              참회의 눈물이었다. 나는 아픈 오른발과  내 몸과 나자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내게 모질었던 사람들이 나를 대한 방식

              그대로 나 자신에게 혹독하게 굴었던 것을 깊이 사과했다. 용서의 고개에서 내가 했던 질문의 답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제일 먼저 용서해야할 사람도, 제일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 답을 얻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와야했던 것이다. 그랬던 거였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그는 발의 심한 통증이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억장해소'를 경험한거다. 나역시 힘든 트레킹을 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맑아지는 영혼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힘든 여정을 고집스럽게 하는지 해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평생 그리워한 엄마의 꿈을 꾸고 그 꿈얘기를 타인과 하면서 그는 '참 나'를 발견한다. 더는 엄마에 집착하지 않는 나였다.

              또한 <어떤 간청도, 간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내 존재 자체가 이 순간 가장 완벽한 기도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서른살의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성찰이 아닐 만큼 그는 인간 실존의 깊은 정체성을 깨닫는다.

              젊을 때 우리는 왕성한 의욕과 열정에 치우쳐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감사하지 못하고 지니지 못한 것들에 촛점을

              맞추고 고통스러워한다. 사회적 경쟁심리는 이러한 욕구를 부추기며 성공을 향해 달리라고 채근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을 즐기고 음미할 여유라고는 잘 없었다. 

 

            <길에서 만난 멋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감당하기 힘들도록 아픈 사연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이 없다. 고통과 슬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이토록 넓고 따뜻하게 가슴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지금것 내가 겪어온 이 모든 시간도 넓고 따뜻한 사람이

              되는 길로 나를 데려다 줄까? 카페에서 마르티나와 향기로운 차를 나누며, 아름다운 사람들 속에 박혀있는 고통의 순간들이

              어쩌면 보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가슴에 박혀있는 그 보석에선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광채가 뿐어 나왔다...>

              곪고 곪은 조개속에서 진주알이 나오듯 인간도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내는 만큼 인간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나는 기도하지 않고 있다. 이 길을 더나오기 전부터, 또 걷기 시작한 이후로 날마다 마더 테레사의

             '매일의 기도'와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주문처럼 읊었다...사소한 것 하나하나 내안에 계시는 누군가에게 여쭈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내 질문에 그분은 항상 '넌 어떻게 느끼니?'하고 되물으셨고 '네가 좋은대로 하렴!'하고 답하셨다.

              그러자 점점 그분께 여쭐 것이 적어졌다...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그분 사이의 간극도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바로

              내가 신인지도 몰랐다. 나는 나를 만들고 나를 둘러 싼 세계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미 스스로 완전했다.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내존재 자체가 이미 기도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신과 하나가 되는 이 느낌, 그가 이 순례길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이제 산타아고를 떠난다. 지금까지 모든 게 꿈 속의 일인 것만 같다... 내가 소중했다고 또는 아팠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시간의 저쪽 편에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건너왔지만 그 시간이 나는 아니었다. 순례길 위에서 겪었던 것뿐만 아니라 내삶

              에서 겪었던 상처와 갈등들이 이미 내가 지나와 버린 시간의 저쪽편에 있었다. 이쪽에 와서 보니 저 건너에 있는 일들은

              지금껏 내가 생각해온 것 만큼 큰일이 아니었다. 내가 꽁꽁 간직하거나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문득 좋은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도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되고 싶은 것들은 이미 내 안에 다 있었다.

              뭔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나였다  

              저 길에서 나는 내가 평생 보물인줄 알고 품고 다닌 돌맹이와 진짜 보물을 맞바꾸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먼 길이 그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저 강을 건넌 뒤 나아가기 위해서 배는 버리라고 한 말씀이 생각난다. 

              삶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집착들에서 놓여날 때 비로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레이나 소피아 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로니카'를 보며 느끼던 기쁨과 희망, 용기와 위안처럼 그의 작품도,

              아니 그의 삶, 나아가 그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 것 처럼 작가는 좋은 책을 열매처럼 내놓았다. 

              어디 까미노만 인생의 축소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그러하거늘 '울트레이아! (가슴에 기쁨을 안고

              나아가라는 여행자들의 구호) 삶은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일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쉽게 읽히지만 보석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