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기메일 : 안은주, 시 '무화과나무'에서 가져온 사진)
몇 년 전에 읽고 밀어놓았던 책인데, 책장정리를 하며 이제야 간단한 독후감을 쓰고 다른 이에게 주려고 한다.
젊은 시절 '광장'을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 작가인지라 구입해서 읽었던 1,2권으로 된 두꺼운 책이었다.
여러 곳에 밑줄을 쳐 공감을 표시하고 독후감을 쓰려고 했던 책이었다. '화두'라는 제목은 작가가 인생의 내면을 찾아가는 의식의 길이었다. 나역시 내 인생의 화두가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듯이...
'화두'는 불교에서 수행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 화두를 붙들고 깨달음이 올때까지 참선을 한다고 한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우리 나라 참선수행자들이 널리 채택하여 참구한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등이다.
‘구자무불성’은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고승들이 이 화두를 참구하고 가장 많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무(無)”라고 답하여 이 화두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책을 펼치면 '21세기 독자에게' 라는 서두와 함께 짤막짤막한 문장으로 서문이 나온다.
<사람은 한 번 밖에 살 수 없어서 슬프다.
살다보면 인생 한 벌만 가지고는 풀 수 없는 숙제가 사람이 산다는 일이다.
이 지구 위에 생겨서 진화해 온 생물의 고급 종류에 속하는 모든 개체가 밟게 된 이 조건이 고통스러워진 종이 인간이다. 이것이 종교의 뿌리다.
이 점에 대하여 이 책의 초간본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썼다. '비늘들은 이 거대한 몸의 운동에 따라 시간 속으로 부스러져 떨어진다. 그때까지를 개인의 생애라고 불러볼까. 옛날에는 이 비늘들에게는 환상이 주어져 있었다. 비록 부스러져 떨어지면서도 그들은 이러저러한 신비한 약속에 의해서 본체 속에 살아남는 것이며 본체를 떠나지만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러나 오늘의 비늘들에게서는 그런 환상이 거두어졌다.'
이 글을 적는 지금, 이 대목은 그때보다 더 사무치게 강조하고 싶다.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재심'도 없고 '부활'도 없다.-'개인'에게는. 그리고 논의의 중심은 개인에게 있다.-적어도 종교에게는, 아니 처음은 어쨌든 차츰 종교의 중심도 그렇게 이동해온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데 '부활'도 '윤회'도 없게 되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만일 종교가 불가능해지면, 그 상태는 인류라는 생물의 한 '종'이 다른 생물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내용을 잃게 된다.
이 상황은 인류 문명사상 일찍이 없었던 국면이다.
'부활'과 '윤회'는 인류에게 꼭 필요한 환상이고, 희망이고, 꿈이었다.
'지금의 나'를 되풀이 하고 싶다는 희망.
생명이 바로 '지금의 상태'가 연속되는 운동이다. 다른 상태가 아니라 자기 종에 의해 지시된 방식의 되풀이가 생명이다. 개체의 종말은 자손에 의한 계승이라는 방식으로 극복되었다.
그것은 번식을 통한 '부활', '윤회'다.
개인의 생애 자체가 나날의 부활, 날마다 겪는 '윤회'다.
'전생(前生)의 나'는 '전일(前日)의 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윤회'하고 매일 '부활'할 뿐만 아니라, 하루 중에도 매초 매순간 '윤회'하고 '부활'한다.-이 파악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선행한 자기를 자기라고 붙들 수 있는 의식의 힘-즉 '기억'이다.
'기억'은 생명이고 부활이고 윤회다.
예술은 약속에 의해서 기억의 엄청난 증폭과 초월이 허용되는 '기억'놀이다. 예술 속에서는 개인의 생애를 몇 번씩이나 '부활'할 수 있고 '윤회'할 수 있다.
문장의 작성자에게는 퇴고(推敲)라는 작업방식은 그의 직업상의 '부활'이요 '윤회'다. 자기의 작업적 전생(前生)을 그때마다 다시 산다...
2002년 늦은 봄 화정에서 최인훈 >
내가 작가의 서문을 거의 모두 옮긴 것은 작가가 느낀, 이 자전적 소설의 여정을 압축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애를 문득 소설처럼 바라보게 되는 시기를 나 역시 겪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아직도 멈추지 않은 진행형 속에 멈춰져 있다. 재능의 부족함과 함께 또 다른 마음 가는 일들에 떠밀려서...
<예술은 슬픔이 아니라 묘사와 감상의 기쁨이며,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푸념하는 표현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표현하는 예술가나 그것을 보고 즐기는 수많은 감상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가의 이 문장이 마음에 쏙 와 닿는다.
<...잃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잃는다는 일이 가져오는 무력감을 모르는 사람들-그것이 새 세대이다. 실지의 잃음이 아닌 '잃음'이라는 '말'은 다른 종류의 소유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바로 '다른 종류'의 삶이다. 이 원론을 소박하게 믿는 힘이 새 세대에게는 있다. 꿈에 취하는 힘에 밀려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당분간 이 힘은 막강하다. 그러나 꿈속에 산다고 해서 그에게서 현실의 생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활은 꿈의 영양이면서 동시에 끊임없는 오염원천이다. 세포막 안에 유지되는 꿈이라는 폐쇄공간을 해체하려고 현실은 온 힘을 다한다...> 세대간의 저항하는 차이를 설명하는 글 중 일부이다.
책 1부 말미에 저자가 뎀버에서 산으로 돌아가던 길에 겪었던 생리적 소외감과 함께 창작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움을 토로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밑 빠진 항아리를 채우려는 콩쥐의 물붙기 같은 것이었다. 한 번 깨달으면 그만인 어떤 일이 아니라, 그 깨달음의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해야 하는 '되풀이'의 운동이었다. 쓴다는 것도 삶의 한 형식이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삶이 '습관'이라고 불리듯 한 틀 한 모양의 되풀이인 것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는 종류의 글이라는 것은 되풀이는 되풀이되, 그렇다, 삶의 뒤로 몰래 다가가서 갑자기 삶의 눈을 두 손바닥으로 가리는 그런 것이어야 하고, 그때마다 다른 걸음으로 다른 속도로 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말은 그렇지만, 다른 걸음, 다른 속도가 그렇게 장마다 꼴뚜기도 어려웠고 엿장수 마음대로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소설에 지쳤고, 끝내는 그 '소설'이라는 것이 얹혀야 할 '말'에 대해서도 내 살갗처럼 자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알지는 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삶에의 고충과 힘겨움이 있듯이 작가 또한 자신의 삶에 있어 창작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뒤돌아보지 말라... 인간의 지각은 생물과 공유하는 수준만으로는 가난하고 가난하다. 풀을 먹는 짐승은 언제까지나 고개를 숙이고 땅을 기어다녀야만 하고 자기보다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은 점심 한 끼니를 위해서 아기를 밴 다른 짐승의 암컷을 습겹해서 태연히 그 뱃속의 태아를 꺼내 먹기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언제나 현재의 노예다. 그들의 욕망이 현재다. 배를 채우고 나면 그들은 자리를 떠난다. 피를 흘리며 태양빛 아래 열려있는 희생자의 자궁을 뒤돌아보는 일은 없다...
-즉 자기와 싸워야 한다. 사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자는 그가 사자가 된 이후 지금까지 사자로 사는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생물이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은 그런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의미있는 명령이다. 뒤돌아볼 힘이 있는 존재에게 대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작가는 신화나 전설에서 전해지던 각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뒤돌아 보는 힘' 즉 이성의 목소리를 역설한다. 한 개인의 삶의 방향을 잡는 일, 나아가 사회적 이성의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부당한 힘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성'은 감정의 보다 세련된 모습이며, '감정'은 요약된 '이성'임을 깨닫고 있는 이상이었다. 이성과 감정을 기계적으로 대립시키지 않는 것이 유교의 자세이며, 그런 대립은 미숙한 것으로 낮게 평가되었으며 노력 끝에 그 두 극이 마침내 자유자재하게 되는 경지를 이상적 상태로 생각하였다...> 감정과 이성을 통합하여 '실천'을 중시하던 유가의 사상이 무너지고 분열된 조국에서 방황하던 우리 민족의 비애, 밖에서 내 안의 꿈을 현실화 하고 싶은 욕망에 좌절해 가는 개인들을 잘 드러내 표현 하였다.
<그것은 우리 기억 속에 있다.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트로이 성은 다시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트로이 성이다. 트로이 성은 나다. 내가 진리요 길이다. 진리와 길이 어느 성벽 안이나, 신전 안이나, 광장 위에 있다고만 사람들이 믿게 되는 시대에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진리나 길은 그런 곳에 있지 않고 너회들 '안'에 너희들 '기억' 속에 있으며 성벽과 신전과 광장은 오직 그 '기억'의 표현이며 기억의 보강물이며, 망각에 저항하기 위한 보조물은 될 망정 '기억' 자체는 아니며, 만일 너희들이 그토록 어리석고 염치없어서, 지나간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기념비에 지나지 않는 그래서 그대들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이는 그 기념비가 말하는 인간의 상태는 유지될 수 없음을 잊어버리고 성벽과 광장과 신전 - 그저 돌멩이에 지니지 않는 그것들에게 정화수를 떠놓고 돼지를 바치고 춤추기만 하면 복락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너희는 다시 짐승이 되리라.
이런 목소리가 트로이 성을 떠난 피난민들에게 얽힌 전설의 뜻인 성싶다.-
러시아 차는 맛이 좋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러시아라는 나라를 여행하며 쓴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내 안의 부처를 찾기 위해 수행하라는 부처님 말씀이 생각난다. 불안정한 소유, 불확실한 내일,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 또한 곧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생명이며 무한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지 않은가!
짐승과 달리 이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우주만물에 측은지심을 지니고 선하며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내가 품은 선하거나 악한 감정은 다시금 나에게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삶은 죽는 날까지 나라는 한 인간을 끊임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과정이 목표가 되어야 함을 또 다시 깨닫는다.
* 절차탁마(切磋琢磨) : 시경 '기욱'의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에서 나온 말로, 절(切)은 뼈나 뿔을 자르는 것이고 차(磋)는 이것을 곱게 가는 것이며, 탁(琢)은 옥이나 보석을 쪼는 것이고 마(磨)는 이것을 더욱 곱게 다듬는 것인데, 학문이나 수행 역시 순서에 따라 더욱 정진함을 비유한다. (전통문화연구회 주해천자문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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