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외국 영화

엘리자베드 비솝의 연인 (미국 시인의 사랑)

나무^^ 2019. 8. 4. 15:29

    

 

감독  브르노 바레토

제작  브라질 (2013. 113분)

출연  미란다 오토, 글로리아 피레스 외 다수

 

 이 영화의 원 제목은 'Riching for moon'이다. 의미하는 바가 심오하다.

엘리자베스 비숍은 20 세기 4대 여류시인(에밀리 디킨스, 메리언 무어, 실비아 플라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녀는 여류시인이라는 호칭을 싫어했다지만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은  때였으니 그리 불렸을 게다.

이 영화는 그녀의 삶 속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던 연인 '로타 수아레스'와의 15여년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미국 출신의 그녀는 1살 때 건축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살 때는 어머니 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그녀와 격리된다. 그후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그녀의 섬세하고 불안한 성격은 이러한 상실로 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의 구애를 끝내 거절하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외로웠던 그녀지만 남자에게는 끌리지 않았나 보다.

 

1951년 뉴욕에서 살던 그녀는 시적 영감의 부진함을 느끼고 브라질에 사는 친구 메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인 로타와 만나게 된다. 건축가였던 로타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인다. 친구 메리와 연인인 로타의 호의를 마다하며 떠나려 하지만, 결국은 그녀의 애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연인이 된 로타는 비숍이 문학에 전념할 수있는 집을 손수 건축하여 제공하며 그녀를 보살핀다. 그 와중에 메리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로타는 메리를 달래며 그녀가 평소 원했던 어린 아이를 입양함으로 모두 한 가족이 되는 합리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로타는 그녀를 사랑했던 메리의 도움 또한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타가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플라멘구공원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남아있다.

그녀는 남성 못지않은 활발함과 창의성으로 사회활동을 하며 사랑에도 거침없는 유능함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대범한 성격은 남성들이 여성을 지배하던 시절에 결코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사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두 여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지만, 브라질의 정치혼란은 그녀의 사업에 차질을 가져온다. 또한 로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던 비숍은 플리처 상을 받으면서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부터 강의를 요청받아 갈등한다. 그녀는 로타에게만 의지하는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립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로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떠나고 만다.

병원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며 매일 쓰는 로타의 편지는 질투심에 마음 상한 메리에 의해 비숍에게 전해지지 않고 버려진다. 로타의 사랑을 비숍과 나누지 않으려는 메리의 질투어린 이기심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한 때 친구였던 그들은 로타의 연인이 되면서 연적이  되고 말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로타는 마침내 뉴욕으로 그리운 그녀를 만나러 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강하면 부러진다고...

 

상실은 가장 큰 인생수업이라 하던가!  인생은 그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인 것 같다. 찢기고 또 찢기며 남루해지는 가슴을 보듬고 또 보듬으며 쓰다듬는 사랑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 사랑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이든, 내 자신이든 우리는 사랑으로 그 아픔을 달래며 삶을 견디어 내는거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묘비명을 써 달라고 청한 비숍의 내면은 상실의 아픔으로 가득했다.

삶이 원래 그런 것임을 수용할 수 없었던 그녀의 욕망 때문이리라. 플리처 상(1956년 작품 '남과 북')의 영광도 무색한...

 

나는 20대 초반에 한 여인에게 구애 비슷한 행위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동성애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기여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전 고인이 된 그녀는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과 결국은 헤어지고 사업을 크게 일으켜 한 여인과 연인으로 살다 떠났다. 그 와중에 딸이 지적장애자가 되는 아픔을 또 겪어야 했다. 삶은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우리 모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야 한다. '상실'을 '비움'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면, 즉 인식전환만 하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통은 어리석거나 그것을 붙잡고 있는 자의 몫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차피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을 수반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쾌락의 욕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알려진 시를 한 편 옮겨본다.

 

  한 가지 기술

         

                   엘리자베스 비숍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것들이 본래부터 상실될 의도로 채워진 듯하니
그것들을 잃는다고 재앙은 아니다.

 

날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려라

 

문 열쇠를 잃은 후의 당혹감,

 

무의미하게 허비한 시간들을 받아들이라.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더 많이 잃고, 더 빨리 잃는 연습을 하라.

장소들, 이름들, 여행하려고 했던 곳들을
그것들을 잃는다고 재앙이 오지는 않는다.

 

나는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렸다.

리고 보라!

내가 좋아했던 세 집 중 마지막 집, 아니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집도 잃었다.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두 도시도 잃었다, 멋진 도시들을

 

그리고 내가 소유했던 더 광대한 영토, 두 강과 하나의 대륙을 잃었다.

그것들이 그립긴 하지만, 그렇다고 재앙은 아니었다.

당신을 잃는 것조차 (그 농담 섞인 목소리와 내가 좋아하는 몸짓을),

나는 솔직히 말해야 하리라,

분명 상실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그것이 당장은 재앙처럼(`그렇게 쓰라'!) 보일지라도.

 

 

 

 

 

 

 

 

 

 

 

 

 

 

 

 *엘리자베스 비숍 (1911~1979)의 실제 사진

 

 

Parque do Flamengo(플라멘구 공원)

리우데자네이루 도심과 보타포고 지구 사이에 있는 플라멘구 해안의 공원이다.

(출처: http://jimistudio.tistory.com/1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