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is beautiful
E. F. Schumacher
*시사영어사 특선 영어문고 7 (1993년) 참고
THE PROBLEM OF PRODUCTION (생산의 문제)
One of the most fateful errors of our age is the belief that ‘the problem of production’ has been solved.
Not only is this belief firmly held by people remote from production and therefore professionally
unacquainted with the facts– it is held by virtually all the experts, the captains of industry, the economic managers in the governments of the world, the academic and not- so- academic economists, not to
mention the economic journalists.
* is ~firmly held by 굳게 믿어지다 unacquainted 모르는, 경험 없는
the captains of industry 산업계의 주역들 not to mention ~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착오의 하나는 ‘생산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은 생산과는 관계가 먼, 전문적인 면에서 그런 일에 문외한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산업계의 주역들, 세계 각국의 경제 관료, 경제학 교수, 경제학자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그렇게 믿어왔으며, 경제 담당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They may disagree on many things but they all agree that the problem of production has been solved; that mankind has at last come of age.
For the rich countries, they say, the most important task now is ‘education for leisure’ and for the
poor countries, the ‘transfer of technology’.
다른 많은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 충돌을 보이면서도 생산문제만은 이미 해결되어 인류가 마침내 성인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여가 교육’이며 빈곤국들에서는 ‘기술 이전’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That things are not going as well as they ought to be going must be due to human wickedness.
We must therefore construct a political system so perfect that human wickedness disappears and
everybody behaves well, no matter how much wickedness there may be in him or her.
이러한 일들은 분명 인간의 악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건 여자건, 아무리 악의 씨를 품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악한 마음이 사라져 누구나 선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좀더 이상적인 정치제도가 고안되어야 한다.
In fact, it is widely held that everybody is born good; if one turns into a criminal or an exploiter,
this is the fault of ‘the system’.
No doubt ‘the system’is in many ways bad and must be changed.
One of the main reasons why it is bad and why it can still survive in spite of its badness,
is this erroneous view that the ‘problem of production’ has been solved, As this error pervades all
present-day systems there is at present not much to choose between them.
* exploiter 착취자 erroneous 잘못된 pervade 널리 퍼지다
사실상 인간은 모두 날 때부터 선하며 어쩌다 범죄자 또는 착취자가 되는 것은 제도의 잘못 때문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확실히 ‘제도’에는 많은 결함이 있으므로 당연히 개혁되어야 한다.
제도가 나쁜 주된 이유, 그리고 나쁜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계속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는 잘못된
견해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오늘날 모든 제도에 깊숙이 퍼져 있어 이제는 그 구분조차 어렵다.
The arising of this error, so egregious and so firmly rooted,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philosophical, not to say religious, changes during the last three or four centuries in man’s attitude
to nature.
I should perhaps say: western man’s attitude to nature, but since the whole world is now in a
process of westernisation, the more generalised statement appears to be justified.
* egregious 터무니없는 philosophical 철학의 statement 성명, 성명서
이런 오류가 너무 터무니없이 깊이 뿌리 내린 것은 지난 3~4백 년 동안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던- 종교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철학적인 태도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서구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오늘날에는 전 세계가 서구화되어가고 있으므로 일반화시켜 말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Modern man does not experience himself as a part of nature but as an outside force destined to
dominate and conquer it.
He even talks of a battle with nature, forgetting that, if he won the battle, he would find himself on
the losing side.
* dominate 지배하다 conquer 정복하다 destine 운명 지어지다 battle 투쟁
현대인들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운명을 타고난 외부 세력으로 여긴다.
심지어 자연과의 투쟁 운운하기도 하는데, 그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실은 패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Until quite recently, the battle seemed to go well enough to give him the illusion of unlimited powers,
but not so well as to bring the possibility of total victory into view,
This has now come into view, and many people albeit only a minority, are beginning to realise what
this means for the continued existence of humanity.
* illusion 환상, 망상 albeit though와 같음. ~이긴 하지만 minority 소수의 무리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완전한 승리가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닐지라도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망상을 갖게 할 만큼 자연과의 투쟁은 순조로워 보였다.
완전한 승리를 눈앞에 둔 이제야, 비록 소수 그룹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승리가 인류의 앞날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Every economist and businessman is familiar with the distinction, and applies it conscientiously and with considerable subtlety to all economic affairs-except where it really matters: namely, the irreplaceable capital which man has not made, but simply found, and without which he can do nothing.
* conscientiously 신중하게 considerable 상당히 subtlety 세밀함, 미묘 irreplaceable 대체불가
경제학자나 사업가들은 그 차이점을 익히 알고, 모든 경제문제에 꽤나 정밀하고 꼼꼼하게 이를 적용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제쳐 놓는다 : 이를테면 사람이 만들지는 못하지만 쉽게 발견되며 또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체불가의 자본 같은 경우이다.
A businessman would not consider a firm to have solved its problems of production and to have achieved viability if he saw that it was rapidly consuming its capital. How, then, could we overlook this vital fact when it comes to that very big firm, the economy of Spaceship Earth and, in particular, the economies of its rich passengers?
* consume 소모하다 viability 생존력 rapidly 신속히
사업가라면 회사가 자기 자본을 급속히 탕진해가는 것을 보고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자생력을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큰 회사, 지구라는 우주선의 경제, 특히나 이 우주선에 동승한 부유한 승객들의 경제문제일 경우, 이런 중대한 사실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는가?
One reason for overlooking this vital fact is that we are estranged from reality and inclined to treat as valueless everything that we have not made ourselves. Even the great Dr. Marx fell into this devastating error when he formulated the so-called ‘labour theory of value’.
* estrange 사이를 멀리하다 incline 기울이다 formulate 처방하다 devastating 통렬한 theory 학설
이런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는 이유의 하나는 우리가 현실을 외면하고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저명한 마르크스 박사조차도 소위 ‘노동 가치설’이라는 이론을 내세울 때 이러한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Now, we have indeed laboured to make some of the capital which today helps us to produce-a large fund of scientific, technological, and other knowledge; an elaborate physical infrastructure; innumerable types of sophisticated capital equipment, etc.- but all this is but a small part of the total capital we are using.
* elaborate 정성들여 만들다 infrastructure 하부구조 innumerable 헤어릴 수 없는 equipment 설비
오늘날 우리는 생산에 도움이 되는 일부자본, 즉 막대한 과학적· 기술적 지식 및 여타의 지식, 정교한 물적 하부구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본설비 따위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전체 자본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Far larger is the capital provided by nature and not by man- and we do not even recognise it as such.
This larger part is now being used up at an alarming rate, and that is why it is an absurd and suicidal
error to believe, and act on the belief, that the problem of production has been solved.
* recognize (영recognise) 인지하다 suicidal 자살의
훨씬 더 큰 자본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 제공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이를 인식조차 못한다.
이 자연 자본이 이제 놀랄 속도로 고갈되어 가고 있어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거나 또 그런 믿음 속에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자기파괴적인 오류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Let us take a closer look at this ‘natual capital’.
First of all, and most obviously, there are the fossil fuels,
No one, I am sure, will deny that we are treating them as income items although they are undeniably
capital items.
* fossil fuel 화석 연료 deny 부인하다 undeniable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자연 자본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자.
우선, 가장 뚜렷한 것 중에 화석연료가 있다.
확신하건데, 화석연료는 분명히 자본 항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득 항목으로 다루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If we treated them as capital items, we should be concerned with conservation; we should do everything in our power to try and minimise their current rate of use; we might be saying, for instance, that the
money obtained from the realisation of these asset- these assets- these irreplaceable assets- must be
placed into a special fund to be devoted exclusively to the evolution of production methods and patterns of living which do not depend on fossil fuels at all or depend on them only to a very slight extent.
These and many other things we should be doing if we treated fossil fuels as capital and not as income.
* minimise 극소화하다 current 현재의 asset 자산 irreplaceable 대체할 수 없는 exclusive 배타적인
evolution 전개 extent 넓이, 범위
그것들을 자본 항목으로 취급한다면 그 보존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즉 우리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소비율을 극소화시켜야만 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자산, 즉 대체불가의 자산에서 얻어지는 자금은 화석연료에 전혀 의존하지 않거나 의존하더라도 그 의존도가 극히 낮은 생산방법이나 생황패턴의 개혁을 위해 투입되는 특별기금으로 적립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정도는 거론됐어야 할 것이다. 화석연료를 소득이 아닌 자본으로 여겼다면 앞서의 조처 및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조처들을 취했어야 한다.
And we do not any of them, but the exact contrary of every one of them: we are not in the least concerned with conservation; we are maximising, instead of minimising, the current rates of use; and, far from being interested in studying the possibilities of alternative methods of production and patterns of living- so as to get off the collision course on which we are moving with ever-increasing speed- we happily talk of unlimited progress along the beaten track, of ‘education for leisure’ in the rich countries, and of ‘the transfer of technology’ to the poor countries.
* contrary 반대의 collision 격돌 beaten (beat의 과거분사. 다져진) alternative 대체 가능한, 양자택일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의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즉, 보존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으며, 현재 소비율의 극소호가 아닌 극대화를 꾀하고 있고, 과속으로 치닫고 있는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산방법이나 생활패턴의 대체 가능성 연구 따위는 등한시 하고 있으며 탄탄대로의 끝없는 전진에 즐거워하면서, 부유한 나라에서는 ‘여가 교육’을, 가난한 나라에서는 ‘기술이전’이란 말을 아무런 걱정 없이 말하고 있다.
The liquidation of these capital assets is proceeding so rapidly that even in the allegedly richest country in the world, the Unites States of America, there are many worried men, right up to the White House, calling for the massive conversion of coal into oil and gas, demanding ever more gigantic efforts to search for and exploit the remaining treasures of the esrth.
* liquidation 청산, 탕진 asset 자산 alleged 주장되는 massive 큰 conversion 전환 gigantic 거대한
exploit 개발하다
이러한 자산의 탕진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서 소위 가장 부유한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백악관까지도 우려를 표명하면서 석탄을 석유나 가스로 대폭 전환시켜야 한다느니, 지구의 부족 자원을 탐사·개발하는데 보다 큰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느니 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
Look at the figures that are being put forward under the heading ‘World Fuel Requirements in the Year
2000’. If we are now using something like 7,000 million tons of coal equivalent, the need in twenty-eight years’ time will be three times as large- around 20,000 million tons!
* figure 숫자, 계산 equivalent 동등한 under the heading ~라는 제목 하에
‘2000년의 세계 연료 수요’라는 제하의 보고서에 제시된 수치를 살펴보자. 현재 석탄 70억 톤에 해당하는 연료를 쓰고 있다면 28년 후(1972년 기준)에는 그 수요가 3배인 200억 톤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What are twenty-eight years? Looking backwards, they take us roughly to the end of World WarⅡ, and, of course, since then fuel consumption has trebled; but the trebling involved an increase of less than 5,000 million tons of coal equivalent. Now we are calmly talking about an increase three times as large.
* consumption 소비 treble 세 배 equivalent 같은 calmly 담담히
28년이라? 그 만큼 과거로 돌아가 보자, 대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쯤일 것이다.
물론 그때 이후로도 연료소비는 3배가 되었지만 그 증가량은 50억 톤에도 못 미치는 양이었다. 우리는 이제 3배씩 늘어나는 증가에 대해 당연한 일인 양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People ask: Can it be done? And the answer comes back: It must be done and therefore it shall be done, one might say (with apologies to john Kenneth Galbraith) that it is a case of the bland leading the blind.
But why cast aspersions? The itself is wrong-headed, because it carries the implicit assumption that we are dealing with income and not with capital.
* apology 사과 bland 온화한, 지루한 cast aspersion 비방하다 implicit 은연중에 assumption 가정, 억측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될까?’ 대답은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혹자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에게 양해를 구함) 이건 얼빠진 자가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렇게 비방하는가? 그 질문은 화석연료를 자본으로서가 아니라 소득으로 여기는 것을 묵시적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What is so special about the year 2000?
What about the year 2028, when little children running about today will be planning for their retirement? Another trebling by then? All these questions and answer are seen to be absurd the moment we realise that we are dealing with capital and not with income: fossil fuels are not made by men; they cannot be recycled. once they are gone they are gone for ever.
* absurd 어리석은 recycle 재생하다
왜 하필 2000년인가? 자금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가 은퇴를 하게 될 즈음인 2028년은 어떠한가? 그때도 또 다시 3배인가? 이런 질문이나 대답도 화석연료가 사람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재생될 수도 없는, 소득이 아닌 자본임을 깨닫게 되는 날에는 부질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것은 일단 없어지면 그것으로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But what- it will be asked- about the income fuels? Yes, indeed, what about them?
Currently, they contribute (reckoned in calories) less than four per cent to the world total.
In the foreseeable future they will have to contribute seventy, eighty, ninety per cent.
* reckon 세다, 합산하다 contribute 기부하다 foresee 예견하다
그러면 소득으로서의 연료는 어떠하냐고 물을 것이다. 실로 소득연료는 어떠한가?
현재 소득연료는 칼로리로 환산해 볼 때 세계 연료 수요에 4%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그 기여도는 70, 80, 90%가 되어야 할 것이다.
To do something on a small scale is one thing: to do it on a gigantic scale is quite another, and to make an impact on the world fuel problem, contributions have to be truly gigantic. Who will say that the problem of production has been solved when it comes to income fuels required on a truly gigantic scale?
* gigantic 거대한 make an impact on ~에 영향을 주다
소규모냐 대규모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그리고 세계 연료문제에 영향을 주려면 그 규모가 아주 커져야 한다.
소득 연료가 이처럼 대규모로 요구되고 있는데도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Fossil fuels are merely a part of the ‘natural capital’ which we steadfastly insist on treating as
expendable, as if it were income, and by no means the most important part.
If we squander our fossil fuels, we threaten civilisation; but if we squander the capital represented by
living nature around us. we threaten life itself.
* no means 결코 아니다 threaten 협박하다 steadfastly insist on ~ing ~를 끝까지 확고부동하게 주장하다
squander 탕진하다
화석연료는 마치 소득이며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양 마구 써버려도 좋은 것으로 취급하는 ‘자연 자본’ 중 단지 그 일부일 뿐이다. 화석연료를 마구 써버리면 문명의 존속이 위협을 받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살아있는 자연자본을 마구 훼손시키게 되면 우리는 생명 그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People are waking up to this threat, and they demand that pollution must stop, they think of pollution as a rather nasty habit indulged in by careless or greedy people who, as it were, throw their rubbish over the fence into the neighbour’s garden.
* pollution 오염, 공해 nasty 불쾌한 indulge 충족하다, 제멋대로 하다 rubbish 쓰레기
이 위협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이 공해를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공해라는 걸 이웃집 정원의 담 너머로 쓰레기를 던져버리는 종류의 부주의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저질러 온 못된 습관 정도로 생각한다.
A more civilised behaviour, they realise, would incur some extra cost, and therefore we need a faster rate of economic growth to be able to pay for it. From now on, they say, we should use at lest some of the fruits of our ever-increasing productivity to improve ‘the quality of life’ and not merely to increase the quantity of consumption.
* behaviour 태도 incur 초래하다 productivity 생산성 quantity 분량
그들이 좀 더 교양 있는 행동을 하려면 비용이 더 들 것이므로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가속시킬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길, 이제부터는 늘어나는 생산성의 성과를 소비증대뿐만 아니라 생활수준(삶의 질)을 높이는데 다만 얼마라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All this is enough, but it touches only the outer fringe of the problem.
To get to the crux of the matter, we do well to ask why it is that all these terms- pollution, environment, ecology, etc,- have so suddenly come into prominence.
* fringe 가장자리 crux 핵심 environment 환경 ecology 생태계 prominence 두드러짐
모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문제의 변죽만 올린 격이다.
문제의 핵심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오염이니 환경이니 생태계니 하는 등의 말들이 왜 이토록 갑작스레 대두되기 시작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After all, we have had an industrial system for quite some time, yet only five or ten years ago these
words were virtually unknown. Is this a sudden fad, a silly fashion, or perhaps a sudden failure of nerve?
* virtually 사실상 fad 유행 silly 어리석은 nerve 신경
산업사회가 된지도 꽤 오래되었으나 불과 4~5년 전만 해도 그런 단어들은 무척 생소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시적인 흥분이나 부질없는 유행, 아니면 갑작스런 신경쇠약증 때문인가?
The explanation is not difficult to find. As wish fossil fuels, we have indeed been living on the capital of living nature for some time, but at the a fairly modest rate. It is only since the end of World warⅡ
that we have succeeded in increasing this rate to alarming proportions.
* explanation 설명 fairly 공평히 proportion 비율
그 해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화석연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살아있는 자연 자본을 소모시키며 살아왔지만 한동안은 그 속도가 아주 느렸다. 그 속도가 위험지수에 이를 정도로 가속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In comparison with what is going on now and what has been going on, progressively, during the last
quarter of century, all the industrial activities of mankind up to, and including, World warⅡare as
nothing, The next four or five years are likely to see more industrial production, taking the world as a
whole, than all of mankind accomplished up to 1945.
* comparison with ~와 비교하면 progressive 전진하는 industrial 공업의
지금의 산업 활동 상황과 4반세기 전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인류의 산업 활동은 별 것이 아니다. 인류가 유사 이래 1945년까지 이룩한 모든 공업생산을 이제 단 4~5년이면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In other words quite recently that most of us have hardly yet become conscious of it- there has been a unique quantiative jump in industrial production, Partly as a cause and also as an effect, there has also been a unique qualitative jump. Our scientists and technologists have learned to compound substances unknown to nature. Against many of them, nature is virtually defenceless.
* unique quantiative jump 굉장한 양적 비약 qualitative 질적인 compound 합성하다 substance 물질
virtually 사실상 defenceless (영defenseless) 무방비의
극히 최근에-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근간에- 공업 생산은 굉장한 양적 비약을 가져왔다. 그로 인한 원인과 결과로, 질적인 비약도 뒤따랐다. 과학자, 기술자들은 자연히 모르고 있는 물질을 합성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에 대해 자연은 무저항 상태에 있다.
There are no natural agents to attack and break them down.
It is as if aborigines were suddenly attacked with machine-gun fire: their bows and arrows are of no
avail. These substances, unknown to nature, owe their almost magical effectiveness precisely to
nature’s defencelessness- and that accounts also for their dangerous ecological impact.
* aborigine 원주민 bows and arrows 활과 화살 precisely 정확히, 바로
자연 속에는 그 물질에 대항하여 공격하고 파괴시킬 매체가 없다.
이건 마치 원주민들이 기관총 기습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활과 화살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자연이 모르고 있는 이 물질들의 마술적 효능은 바로 자연의 무저항 덕분이다. 이는 또한 그들이 생태학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잘 설명해 준다.
It is only in the last twenty years or so that they have made their appearance in bulk. Because they have no natural enemies, they tend to accumulate, and the long-term consequences of this accumulation are in many cases known to be extremely dangerous, and in other cases totally unpredictable.
* accumulate 모으다 consequence 결과 extremely 매우 unpredictable 예측할 수 없는
이러한 물질이 대량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 밖에 안 된다. 이 물질들은 천적이 없기 때문에 계속 축적되는 추세에 있으며, 이들이 장기적으로 누적될 경우, 그 대부분은 매우 위험스러울 뿐 아니라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In other words, the changes of the last twenty-five years, both in the quantity and in the quality of
man’s industrial processes, have produced an entirely new situation- a situation resulting not from
our failures but from what we thought were our greatest successes.
다시 말하면 지난 25년간의 산업 진행상의 양적·질적 변화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 실패로서가 아니라 대단한 성공으로 여겼던 성과로 초래된 상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And this has come so suddenly that we hardly noticed the fact that we were very rapidly using up a
certain kind of irreplaceable capital asset, namely the tolerance margins which benign nature always
provides.
* tolerance margins 허용한도 benign 친절한
너무나 갑자기 드러난 상황이라 그동안 자연이 늘 부여해주던 허용 한도라는 이름의 대체불가의 자본 자산이 급속도로 잠식당해 왔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다.
Now let me return to the question of ‘income fuels’ with which I had previously dealt in a some-what
cavalier manner. No one is suggesting that the world-wide industrial system which is being envisaged to operate in the year 2000, a generation ahead, would be sustained primarily by water or wind
power.
* envisage 상상하다 sustained 지속된 primarily 주로
앞에서 대충 언급했던 ‘소득연료’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한 세대 후인 2000년에 가동될 전 세계의 산업 방식이 주로 수력이나 풍력에 의존할 것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No we are told that we are moving rapidly into the nuclear age. Of course, this has been the story for
quite some time, for over twenty years, and yet, the contribution of nuclear energy to man’s total fuel
and energy requirements is still minute.
* nuclear 핵의 requirement 필요
그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핵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들 말한다. 물론 20여 년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연료나 에너지 수량에 대한 핵에너지의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In 1970, it amounted to 2.7 per cent in Britain; 0.6 per cent in the European Community; and 0.3 per cent in the United States, to mention only the countries that have gone the furthest.
1970년에는 영국이 2.7%, 유럽공동체가 0.6%, 미국이 0.3%등, 꽤 앞서 있다는 나라들만 예를 들어도 그 정도에 불과하다.
Perhaps we can assume that nature’s tolerance margins will be able to cope with such small
impositions, although there are many people even today who are deeply worried, and Dr. Edward D.
David, President Nixon’s Science Adviser, talking about the storage of radioactive wastes, says that ‘one has a queasy feeling about something that has to stay underground and be pretty well sealed
off for 25,000 years before it is harmless.’
* assume 당연히 여기다 imposition 부담 storage 저장, 보관 radioactive 방사성의 sealed 밀봉한 harmless 무해한
자연의 허용 한도가 그 정도의 부담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의 과학고문인 에드워드 디 데이비드 박사 같은 분은 방사성 폐기물 처리에 관해 ‘지하에서 2만5천 년 동안 밀봉해 두어야 독성이 사라지는 물질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고 말하고 있다.
However that may be, the point I am making is a very simple one: the proposition to replace
thousands of millions of tons of fossil fuels, every year, by nuclear energy means to ‘solve’ the fuel problem by creating an environmental and ecological problem of such a monstrous magnitude that Dr. David will not be the only one to have ‘a queasy feeling’.
* environmental 주위의 queasy 불쾌한 monstrous 엄청난 magnitude 규모
아무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매년 수십억 톤의 화석연료를 원자력으로 대체하라는 것은 연료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데이비드 박사가 느끼는 두려움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할 만한 규모의 환경 및 생태계의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 된다.
It means solving one problem by shifting it to another sphere- there to create an infinitely bigger
problem. Having said this, I am sure that I shall be confronted with another, even more daring
proposition: namely, that future scientists and technologists will be able to devise safety rules and
precautions of such perfection that the using, transporting, processing and storing of radioactive
materials in everincreasing quantities will be made entirely safe; also that it will be the task of
politicians and social scientists to create a world society in which wars or civil disturbances can
never happen.
* infinite 무한한 precaution 예방책 disturbance 내란
즉 한 가지 문제를 다른 차원- 한업이 더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에서 해결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학자·기술자들이 앞으로 점증하게 될 방사성물질의 사용, 수송, 가공 및 처리를 위해 절대 안전한 보호기준이나 예방책을 고안해낼 수 있을 게 아니냐고 좀 더 대담하게 제안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가나 사회과학자가 전쟁이나 내란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세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Again, it is a proposition to solve one problem simply by shifting it to another sphere, the sphere of everyday human behaviour. And this takes us to the third category of ‘nature capital’ which we are
recklessly squandering because we treat it as if it were income: as if it were something we had made ourselves and could easily replace out of our much-vaunted and rapidly rising productivity.
* recklessly 무모하게 squander 낭비하다 much-vaunted 크게 자랑하며 떠드는
이 역시 문제를 단순하게 다른 차원, 즉 사람들의 일상생활 차원으로 옮김으로써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사람들이 소득인양 간주하여 마구 낭비하고 있는 ‘자연자본’, 즉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인간이 자랑하고 있는 급속한 생산성 향상에 의해 쉽게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연자본’의 제3부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Is it not evident that our current methods of production are already eating into the very substance of
industrial man? To many people this is not at all evident. Now that we have solved the problem of
production, they say, have we ever had it so good?
현재의 생산방법이란 이미 산업사회 인간들의 본질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는 게 확실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생산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면 그처럼 좋았던 적이 이제껏 있었느냐고들 말한다.
Are we not better fed, better clothed, and better housed than ever before- and better educated?
Of course we are: most, but by no means all, of us: in the rich countries. But this is not what I mean by ‘substance’. The substance of man cannot be measured by Gross National Product.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살며 더 나은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라고. 물론 부유한 나라에서는, 결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하지만 내가 의미하는 ‘본질’이란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GNP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erhaps it cannot be measured at all, except for certain symptoms of loss.
However, this is not the place to go into the statistics of these symptoms, such as crime, drug
addiction, vandalism, mental breakdown, rebellion, and so forth. Statistics never prove anything.
* symptom 징후 statistic 통계량 drug addiction 약물중독 vandalism 만행 rebellion 반란
아마도 본질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징후를 제외하면 측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징후라는 것, 즉 범죄나 마약, 파괴행위나 정신질환, 반란 등의 통계를 논할 일도 아니다. 통계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I started by saying that one of the most fateful errors of our age is the belief that the problem of
production has been solved. This illusion, I suggested, is mainly due to our inability to recognise
that the modern industrial system, with all its intellectual sophistication, comes the very basis on
which it has been erected.
* intellectual 지적의 sophistication 궤변 erect 바로 서다
서두에서 나는 이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착오가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환상은 꽤나 치밀하다는 현대의 산업 시스템이 자기가 서있는 기반을 파먹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하였다.
To use the language of the economist, it lives on irreplaceable capital which it cheerfully treats as income. I specified three categories of such capital: fossil fuels, the tolerance margins of nature, and
the human substance. Even if some readers should refuse to accept all three parts of my argument,
I suggest that any one of them suffices to make my case.
* specify 분류하다 suffice 충분하다
경제용어를 빌리자면 현대의 산업시스템은 소득으로 여겨온 대체불가의 자본에 의존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본으로 세 가지를 꼽았는데 그것은 화석연료, 자원의 허용한도, 그리고 인간 본질이다. 여러분이 이 세 가지를 모두 받아들이길 거부한다고 해도 그 중 한 가지만 수용한다면 나의 주장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And what is my case? Simply that our most important task is to get off our present collision course. And who is there to tackle such a task? I think every one of us, whether old or young, powerful or
powerless, rich or poor, influential or uninfluential.
* influential 영향을 미치는
나의 주장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파국으로 가는 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러한 일을 맡아서 애쓸 것인가? 늙었거나 젊었거나, 힘이 있든 없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영향력이 있건 없건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To talk about the future is useful only if it leads to action now. And what can you do now, while we
are still in the position of ‘never having had it so good’? To say the least- which is already very
much- we must thoroughly understand the problem and begin to see the possibility of evolving a new life-style, with new methods of production and new patterns of consumption: a life-style designed for permanence.
* evolve 전개된 consumption 소비 permanence 영구히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행위와 결부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만족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누차 언급해 왔지만-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여 영구히 앞날을 내다보고 설계된, 새로운 생산방식과 새로운 소비패턴이 뒷받침된 새로운 생활방식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한다.
To give only three preliminary examples: in agriculture and horticulture, we can interest ourselves in
the perfection of production methods which are biologically sound, build up soil fertility, and produce health, beauty and permanence. Productivity will then look after itself,
* preliminary 준비의 agriculture 농업 horticulture 원예 fertility 비옥함 permanence 영속성
biologically sound 생물학적으로 건강한 Productivity 생산성
세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농업 및 원예업에서는 생물학적으로 해가 안 되고 토지의 자양분을 높여주며 그로 인해서 건강과 아름다움과 영속성을 이루는 생산방식을 정착시키는 것 같은 데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면 생산성도 자연히 향상된다.
In industry, we can interest ourselves in the evolution of small-scale technology, relatively
nonviolent technology, ‘technology with a human face’, so that people have a chance to enjoy themselves while they are working, instead of working solely for their pay packet and hoping, usually
forlornly, for enjoyment solely during their leisure time.
* relative 비교적 nonviolent 해가 되지 않는 pay packet 월급
공업에 있어서는 소규모 기술, 비교적 해가 없는 기술, 사람들이 월급이나 바라고 휴가 때나 실컷 즐기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면을 가진 기술’을 개발해낼 수도 있다.
In industry, again-and, surely, industry is the pacesetter of modern life- we can interest ourselves in new forms of partnership between management and men, even forms of common ownership.
We often hear it said that we are entering the era of ‘the Learning Society’. Let us hope this is true.
또한 현대생활의 속도를 조정하는 공업 분야에서는 노사 간의 협조체제나 공유 형태에 관심을 가져볼 수도 있다. 이제는 ‘배우는 사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부디 사실이길 바란다.
We still have to learn how to live peacefully, not only with our fellow men but also with nature and,
above all, with those Higher Powers which have made nature and have made us; for, assuredly,
we have not come about by accident and certainly have not made ourselves.
* assuredly 확실히
사람끼리 만이 아니라 자연과도, 그리고 인간이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므로,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신과도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The themes which have been merely touched upon in this chapter will have to be further elaborated
as we go along, Few people will be easily convinced that the challenge to man’s future cannot be
met by making marginal adjustments here or there, or, possibly, by changing the political system.
* elaborate 정성들여 만들다 adjustment 조정 marginal 가장자리
이 장에서 잠시 언급한 주제들을 앞으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인류의 앞날에 닥칠 위험은 몇 가지 부분적인 수정을 하거나 정치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사리 수긍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The following chapter is an attempt to look at the whole situation again, from the angle of peace and permanence, Now that man has acquired the physical means of self-obliteration, the question of
peace obviously looms larger than ever before in human history. And how could peace be built
without some assurance of permanence with regard to our economic life?
* acquire 습득하다 obliteration 말살 looms large 모습을 드러내다 assurance 보증
다음 장에서는 평화와 영속성의 시각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자기 말살의 물리적 수난을 겪고 있기에 지금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의 문제가 시급한 때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에 관한 영속성의 확증이 없이 어찌 평화가 구축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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