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폐휴지 수거하는데서 주웠다. 예전에 시공사에서 출판한 책 '반 고흐 태양의 화가'로 읽었지만 , 책이 깨끗한데다 오래 되어서 다시 보고 싶었다. 2001년 초판 이후 2007년 20쇄를 찍은 대한 교과서 주식회사에서 출판한 책이다.
활자 크기가 읽기 편하고 고흐의 많은 그림들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시리즈로 외국편 8권, 한국편 5권이 출판되어 있어 두고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지은이는 시인이자 미술사학을 전공한 임명순님이 지은 외국편 1이다.
빈센트 빌렘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그루트 준데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3대째 내려오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실 제본업자의 딸인 어머니는 그보다 일년 전에 죽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이어서 여동생과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 남동생이 빈센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후원자 테오두르스, 일명 테오였다. 그 뒤로 3형제가 더 태어났다. 그는 말수가 적고 주로 혼자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여 들판을 쏘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12살에 기숙학교에 들어갔지만 15살에 가정형편상 학업을 그만두고 화상을 하는 숙부의 소개로 화랑에서 그림 파는 일을 하였다. 20살에는 영국 런던으로 발령을 받고 하숙을 하던 중 주인집 딸을 사랑하여 애태우다 고백하였으나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이렇게 그의 첫사랑이 무산되고 그는 프랑스 파리의 화랑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책읽기에 몰두하고 종교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주인에게 밉보여 해고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국 런던 근처 작은 학교에 임시교사로 취직이 되어 다시 영국으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떠 그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아버지처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한 그는 신학대학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도사 양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25살에 보리나주로 가서 광부들과 함께 하며 헌신적으로 생활하지만 그의 지나친 열성을 의아해하는 사람들과 복음 전도협회는 그를 배척하고 자격을 박탈한다. 그는 종교에서 멀어지며 그림을 그려 화가가 되기로 마음 먹지만 밥벌이를 못하는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동생 테오뿐이었다.
한창 젊은 나이였던 그는 다시 목사관에 잠시 머물러 온 사촌 누이에게 불같은 사랑을 느껴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지 얼마 안 된 한 아이의 엄마였다. 더군다나 그녀의 아버지인 숙부는 화를 내며 그를 나무라자 램프불에 손을 넣는 자해행위를 하기까지 한다. 그의 격렬한 성격이 얼마나 드러나는 일이다. 사랑의 쓴맛만 경험하던 그는 알코올 중독에 임신을 한 채 거리를 헤매는 시엔을 집으로 데려와 모델을 삼고 돌보아준다. 그때 그린 데상 '위대한 여인', '나무뿌리'와 판화 '슬픔'은 서툴지만 감동이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내 생각에는 빈센트의 그림이기 때문에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자비로운 빈센트는 시엔의 아이들을 사랑하며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시엔과 아이를 부양할 능력이 안 되는데다 창녀와 함께 산다는 소문은 가족 친지들의 도움까지 단절되고 결국 시엔과 헤어진 그는 마음의 상처를 잊기 위해 그림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퍽 사실적인 '옷감짜는 사람', '바느질하는 여인', 질박한 농부들의 모습은 이 책에서 처음 보았다.
농부들을 사랑했던 그가 어둡게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는 편지에 이렇게 표현했다. '껍질을 벗기기 전의 감자 빛깔처럼 흙빛으로' 그러나 감자의 속살은 얼마나 희고 맛있는 양식인가! 그는 그들의 힘든 노동을 이렇게 귀한 식량과 연관시켰다.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숭고한 심성과 격렬한 열정으로 살다 간 그였기에 작품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아버지가 목사로 일하던 교회를 1984년에 그렸다. '누에덴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다.
장남에게 실망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개월후 그린 '성경이 있는 정물' 은 아버지와 그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커다랗게 그린 성경책과 불 꺼진 촛대, 그 곁에 작게 그려진 낡은 소설책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5점이나 그렸다는 둥지 그림 중 '네개의 둥지' 를 보면 그가 따스한 가정을 얼마나 소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성인이 된후 죽을 때까지 가정을 이루지 못한 외로움을 달래며 그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동생 테오, 그에게 보낸 편지가 668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외 지인들과 나눈 편지까지 800통이 넘는 편지를 쓴 그는 화가이자 서간문학의 대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빈센트의 죽음 후 6개월 후 정신질환으로 숨진 동생 테오, 그들의 정신적 결속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빈센트가 파리에서 동생과 함께 살았던 집은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살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었다.
책에는 '몽마르트르에서 바라본 파리 풍경'과 '빈센트의 방에서 바라본 파리 풍경' 그림이 소개된다.
나는 서유럽 여행할 때 이곳을 구경하다 한 화가의 작은 풍경화 한 점을 사고 함께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난다.
빈센트는 학교에 가 공부하겠다는 막내누이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네 건강을 돌보며 힘을 기르고 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공부다. 공부는 독창성을 죽일 뿐이다.' 그렇게 강한 의지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10여년 동안 자그만치 41장이나 그렸는데 파리에 머무는 동안 30점을 그렸다고 한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인간인지 알고 싶다'고 쓴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을 관찰하며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힘쓴 것이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그래야 궁핍한 삶을 버티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빈센트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리는 일을 대단하다고 여기며 초상화를 그렸다. 가난한 화가들에게 너그러웠던 화구상 '탕기영감의 초상', 카페의 여주인 '이탈리아 여인' 등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신경을 써서 그렸다.
테오는 형과 함께 사는 것을 힘들어 하며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치 두 인간이 빈센트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놀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한 인간과 거만하고 이기적인데다 거친 또 다른 인간이.'라고 썼다.
개성이 강한 빈센트를 잘 드러낸 표현이다. 그는 향락적인 파리에 실증을 느끼고 남쪽의 작은 마을 아를르로 떠난다.
밝은 색채의 '꽃 핀 복숭아나무'를 그려 잠시 그림지도를 받았던 적이 있는 사촌 모베의 미망인에게 선물로 보낸다. 또 근처의 '랑글루아 다리', '붓꽃이 핀 아를르 풍경' 은 그에게 기쁨을 느끼게 해준 풍경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초상화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 빈센트는 친구가 된 우체부 '룰랭의 초상'을 그렸다. 그는 빈센트가 운명할 때까지 병원으로 찾아와 위로해주었던 좋은 친구였다. 그의 부인도 그렸는데 모성애를 상징하려는 듯 '자장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빈센트의 그림들은 그가 쓴 편지들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묵었던 카페를 '밤의 카페'라는 제목으로 그렸다. '카페란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고, 미치게 하고 범죄를 저질를 수 있는 장소로 표현하려고 했다.' 또 '초록색과 붉은색을 사용하여 인간의 무시무시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후 이사간 '노란집'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그렸는데 '밤의 까페 테라스'도 이 집의 일부로 그가 이곳에서 묵은 6개월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이때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은 나를 빛나게 한다'고 말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빈센트는 동생 테오를 부추겨 폴 고갱을 불러 함께 작업하기를 희망했다. 서로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했는데, 그는 마치 승려처럼 구도자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처럼 나타내고 싶었다는 폴 고갱이 보낸 자화상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두 개의 의자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빈센트의 방'을 그린 그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가정을 원했던 마음이 드러난다.
노란색을 '사랑의 색'으로 여겼던 빈센트는 해바라기를 자주 그렸다. 해바라기를 통해 그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열정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할 지경에도 테오에게서 간절히 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림 그리는 기차처럼 달린다' '나의 작품은 내 몸이며 내 영혼'이라며 그는 그린 그림을 동생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단 두 점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금 그의 그림이 그토록 고가인 것을 죽은지 100여년이 지난 그가 알겠는가? 동생에게 의지해서 살아야했던 그가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는데 온 힘을 다 바친 사실을 뒤늦게라도 감동하는 걸까? 그의 독특한 개성처럼 그만의 특징이 살아있는 그림들은 무정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당당하게 느껴진다.
고갱은 썩 내키지 않았으나 빈센트의 동생 테오가 빚을 갚아주고 여비도 주어 빈센트가 사는 아를르로 갔다. 하지만 그들은 성격적으로 너무 달랐으며 함께 생활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5살 위인 고갱을 스승처럼 여기고 그의 충고대로 기억에 의존한 그림을 그린 것이 '이텐정원의 추억'이다. 폴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를 보고는 '바로 내 모습인긴 한데 미쳐 가는 꼬락서니군.' 하고 내밷었다고 한다. 고갱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빈센트는 그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화가들을 고갱이 무시하는 비난을 들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고갱에게 불만이 쌓여갔다. 고갱은 고갱대로 실생활에서 요리나 청소 따위를 잘하지 못하는 빈센트가 불만스러웠다. '한 사람은 폭발하는 화산이고 다른 한 사람은 펄펄 끓는 화산이다. 우리 둘 사이엔 이미 일종의 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다.'고 고갱은 말했다.
그리고 떠나겠다고 마음 먹은 고갱에게 화가 난 빈센트는 자신의 귓볼을 자르는 소동이 벌어진다. 투우사가 소의 귀를 자르듯 그는 슬픔과 절망을 자해로 표현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빈센트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 일로 병원에 입원했다 나온 그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2점 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초췌하고 슬픈 자신을 응시하는 이 그림은 묘하게 아름답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허물어졌던 마음을 스스로 위안한 것 같다.
그는 발작증세가 있자 다시 병원에 입원하여 낮에는 노란집에서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만, 마을 사람들의 강한 반대로 셀레미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외롭고 단절된 곳에서의 생활은 그의 발작횟수를 늘렸다. 그는 좋아하는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며 견디어낸다. '나는 인간의 역사가 밀의 역사와 같다고 절실하게 느낀다. 우리가 땅에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빵을 만들 수 있겠는가?' 또한 성경의 한 구절인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곡식을 거두듯이, 영혼에 씨를 뿌리는 자가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처럼 그는'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필자는 '빈센트가 그토록 갈망했던 사랑의 씨앗이,가난한 농부들이 저 들판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혁명의 씨앗이 눈부신 대지위로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고 표현한다. 나는 빈센트의 그림 중 이 밝은 색채의 '씨뿌리는 사람'이 좋다. 표지 그림의 제목도 '씨뿌리는 사람'인데 많이 다른 느낌이다.
요양원 가까운 들에서 찾은 그림의 소재는 실편백나무와 올리브 나무이다. 발작이 가까워오면 그의 그림은 더욱 소용돌이치고 물결이 출렁거리는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무덤 주위에 심는 실편백나무, 북서풍이 심하게 부는 사운데 이젤을 땅에 박아놓고 작업하는 그의 붓질은 숨가쁘고 강렬하게 움직이며 리듬감이 넘친다.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은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초함과 생명을 붙들려는 몸부림이 느껴진다고 필자는 말한다. 즉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그의 말처럼...
발작이 심해 밖으로 나가지 못할 때 그는 자화상을 그렸다. 창백한 기운이 감도는 푸른색의 '자화상'이다.
'동물원에 갇힌 짐승처럼 끊임없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끔찍하게 울부짖는 소리만 들린다'고 쓴 요양원이 마치 감옥처럼 느껴진 그는 '죄수들의 운동'을 그렸다. 자세히 보면 작은 나비 두 마리가 죄수들 위를 날고 있다. 그는 이 나비처럼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또 고갱과 헤어졌지만 그에게 쓴 편지에 '실편백나무가 서있는 길'을 설명한다. 마치 그와 나란히 산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1890년 2월 동생 테오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들 부부는 '빈센트'라고 이름 지어 형에 대한 존중을 표현했다. 빈센트는 '꽃 핀 아몬드 나뭇가지' 를 그려 선물한다. 다른 나무에 비해 일찍 꽃을 피운다는 아몬드 나뭇가지에 소담스럽게 꽃을 피우며 새생명인 조카에게 애정을 표현한 이 그림을 보며 순간 울컥하는 감동이 느껴졌다. 다른 그림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 잔잔하고 어여쁜 꽃그림을 그리며 그는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1890년 5월 건강이 좀 회복되자 빈센트는 파리로 가 요한나와 조카를 만나본다. 그리고 화가 피사로의 소개로 정신과 의사이자 미술 애호가인 가세가 사는 마을로 간다. 여러 인상파 화가들이 모여 사는 경치 좋은 시골 마을 오배르 쉬르 우아즈이다. 그와는 마음이 잘 맞아 그의 초상화를 2점 그린다. '가세 의사의 초상'에서 의사가 쥐고 있는 디기탈리스 약초로 보아 그는 민간요법도 잘 아는 의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빈센트는 이곳에서 숨을 거두기 전까지 70일 동안 유화 70여 점과 뎃상 30여점을 남겼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남긴 유화만도 2000점이 넘었다. 고향생각을 많이 한 듯 가족에게 편지를 자주 쓰며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성당'을 그렸다.
그리고 6월 테오에게서 재정난에 시달린다는 편지를 받고 세 달이나 생활비를 받지 못했다. 휴가를 함께 보내자고 했지만 테오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 네델란드로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가세의사와도 감정이 상하였다. 그는 1890년 7월 27일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자기 가슴에 총을 쏘았다. 허나 잘못 쏘아 이틀이나 앓다 29일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10년 남짓 그림을 그리는 일에 온 열정을 바쳤던 그는 37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빈센트의 마지막 독백이다. '그의 영혼에는 커다란 난로가 하나 있다 아무도 이 난로에 불을 지피러 오지 않는다. 행인들은 굴뚝 위로 퍼지는 연기만 조금 바라볼 따름이다. 그리고 저마다 제 갈길을 간다, 자, 어찌할 것인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밀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에서 그는 슬픔과 극도에 달한 외로움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편지에 썼다. 장례식에서 가세의사는 눈물로 조사를 읽었다. '그는 정직한 인간이자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미술을 사랑했다. 미술은 그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의 말처럼 빈센트의 그림은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남았다. 빈센트가 죽은지 6개월후 동생 테오도 정신질환으로 숨을 거두어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그 두 사람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친밀한 존재였으므로 형의 가엾은 죽음은 곧 이어 동생을 뒤따르게 한 것 같다.
빈센트, 동생 테오의 사진. 테오의 아내는 그들의 죽음후 빈센트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그가 보낸 수백통의 편지글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 덕에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했던 빈센트의 그림들은 세상에 길이 남아 빛나는 예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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