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

전진하는 진실

나무^^ 2022. 3. 28. 18:18

엮고 옮긴이 박명숙

오래 전에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나나>를 감동 깊게 읽고, 사놓았던 책을 이제 읽었다.

진실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 프랑스라는 국가의 불명예를 씻고자 했던 작가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1901년에 펴낸 책을 우리 나라에서는 2014년에 출판하였다. 역사는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되기 때문에 오늘날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권력자의 야욕과 함께 진실과 먼 대중의 광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들어가는 말의 일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98년 1월 13일. 쥘 게드가 '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인 행위'로 규정지은 에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주년을 맞이하여 1월과 2월, 파리의 팡테옹과 육군사관학교, 국회(부르봉궁), 프랑스 국립도서관 곳곳에서는 뜻깊은 기념식이 열렸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드레퓌스에게 국가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던 부당하고 거짓된 공권력과 다수의 비열함과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진실과 정의의 회복을 외침으로써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상이 된 작가 에밀 졸라와, 12년간 불명예와 고통스러운 유배생활로 몸과 마음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를 향해 "드레퓌스 만세"라고 외치는 군중에게 "아니, 프랑스 만세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에게 저질러졌던 증오와 불관용의 모든 죄악을 용서할 줄 알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후손들에게 프랑스 국민과 인류의 이름으로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이는 모두 드레퓌스 대위의 비극이 있은지 이미 한 세기가 지났지만 그 사건이 남긴 의미와 교훈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강력한 울림으로 남아 있으며,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 졸라의 글과 행동이 모두에게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드레퓌스 사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드레퓌스를 한 상징적인 주역으로 여겨 무고한 이들이 억울하게 탄압 받는 일이 없도록 구해내는 일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며 온갖 불이익에 맞섰던 에밀 졸라, 물질적 부와 노년의 안락함을 희생한 그에게서 나는 니체의 초인상(超人像)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개인적인 인간적 약점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일에 있어서만은 그러했다.이 책을 대변하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는 그의 신념은그 자신을 지켜주었다.

 

제 1부 <루공-마카르>의 작가 에밀 졸라, 진실과 정의의 수호자가 되다.

 

'드레퓌스 사건'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에두아르 드뤼몽의 정치적 반유대주의, 드레퓌스 의 유죄판결과 악마도 유배, 그의 무죄를 주장한 주역들, 당시의 언론 역할과 구성, 주요신문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졸라는 '유대인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온나라를 휩쓰는 반유대주의 광풍이 프랑스를 위협하는 것을 심각하게 여겨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 에두아르 드뤼몽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모든 사람은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법적으로 서로를 평등한 형제로 여겨야 하고 유대인들은 국가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악한 권력과 영합하는 쓰레기 같은 언론 캠페인을 비난했다. 이어지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그에게 주어진 결과는 그가 쓴 책의 판매부수를 떨어뜨리고 그가 기고하던 잡지사에 압력이 들어오면서 독자들의 불매가 벌어졌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1895년, 독일장교에게 군사 비밀편지를 보냈다는 누명을 쓰고 비밀재판을 받은 포병대 대위 '드레퓌스'는 나병환자들이 수용되었던 바위섬 악마도로 유배되어 바다조차 볼 수 없도록 높은 담장이 쳐진 곳에서 2년간 이중 쇠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다.  

그의 일기에는 '육체가 고통스러운 것은 견딜 수 있소, 더 끔찍한 것은 마음의 고통이라오.' 라며 자신이 유대인임을 언급하지도 신을 찾지도 않았다. 다만 쇼펜하우어의 '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면 나는 신이 되고 싶지 않소'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또한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잃어버린 내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완전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오. 이 캄캄한 암흑에 환한 불을 밝혀줄 수 있는 진실을.'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짐작이 간다.

그는 4년간 아내에게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청했지만, 군부와 정치권이 작정하고 은폐하려는 진실을 밝히는 일은 요원한 가운데 누군가 그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간수에게서 듣는다.

 

'르 피가르'지를 비롯한 몇 잡지에 드레퓌스의 유죄에 대한 의문이 실리고,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 드레퓌스가 발 벗고 나서서  이 사건의 부당함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양심적인 피카르 중령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진실을 밝히려고 하자 오히려 아프리카 튀지니 변방으로  쫓아내고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는' 댓가로 체포되어 강제 퇴역을 당하고 11개월 옥고를 치루기에 이른다. 그는 이 사건이 확연하게 밝혀진 후에는 여단장으로 복귀했다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좌우 언론의 주요 신문사들과 주요인물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사건의 이해를 도와준다.

 

에밀 졸라의 <전진하는 진실> 서문에는 이 사건을 소재로 어떤 권리도 주장한 적이 없으며 경제적 이익을 취한 바도 없음을 밝히고, 훗날 <법정감상기>와 반대파들의 공격을 피해 가족과 떨어져 영국에서 홀로 지내야 했던  시간을 <망명시대의 기록들>이라는 제목으로 들려주고 싶다고만 하였다. 어떤 형식의 드라마로도 소설화하여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본래 화학자이자 실업가였다가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상원의원 부의장이였던 쉐레르 케스트네르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확신하고 그의 재심을 위해 힘쓰다 부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졸라가 언론 캠페인에 뛰어들게 한 사람으로 아쉽게도 드레퓌스가 사면을 받던 날 사망하였다. 사망후 13년이 지나 그의 <회고록>이 출판되어 이 사건을 더욱 명확하게 밝히었다.

르 피가르지에 올린 졸라의 글에 의하면 '수정처럼 티없이 맑고 올곧은 삶. 어떠한 결점도 과오도 없는 삶. 전투적인 야심과는 거리가 먼, 늘 변한없이 똑같은 소신으로 일관된 삶. 오직 동료들의 존경심과 공감을 바탕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정치인.'이라고 그를 표현하였다. 그렇기에 졸라는 그와 함께 이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졸라는 사건의 마무리를 사면법으로 처리하는 졸속한 행위에 또 한 번 저항하지만 더이상은 정부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무죄가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그는 58살에 집에서 가스중독으로 질식사하였다.

 

50년이 지나 한 기자가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졸라 부부가 메당에서 돌아오기 전날 그들 방의 굴뚝을 막아놓았다가 그 다음날 아침 다시 뚫어놓았다고 고백한 난로공 이야기였다. 그 당시 졸라는 숨지고 그의 아내와 개들은 살아났다. 그동안 수많은 모욕과 협박에 시달리며, 이국땅에서 혼자 보낸 시간까지 겉으로는 의연했던 그였지만 아마도 투쟁의 삶에 많이 지쳤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악랄한 인간들에게 느껴야 했을 분노와 절망감이 충분히 이해된다. 

예전에 대학 졸업 후 발령 받아 간지 얼마 안된 동창이 방학동안 비워두었다가 돌아온 자취집에서 연탄을 피웠다가 다음날 아침 가스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됐던 일이 생각난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반드레퓌스파였던 난로공은 심장병 환자였으므로 연로해지자 죽기 전에 이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 계급의 열렬한 옹호자인 에밀 졸라를 살해하고 자신의 이름앞에 '에밀'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방부의 공식 공급업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밝히고 한 달 후에 숨졌다. 누군가의 사주로 일어난 일이 분명했다.

광신적으로 졸라와 가족들을 위협하고 괴롭혔던  반드레퓌스파 무리들,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야 말았다. 또한 졸라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할 때는 드레퓌스를 총으로 쏴 오른팔에 부상을 입힌 자는 무죄처리가 되었다!

 

졸라는 이 캠페인의 막중한 소명을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쓰고 있는 중이라오. 내겐 이보다 더 큰 행복과 영광은 없을 것이오.'라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그들 가족이 광분한 반드레퓌스파들에게 온갖 협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가 <나는 고발한다...!>를 통하여 재판을 받음으로 모든 사실을 공표하려던 의도는 유죄판결을 받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게되었다. 가재도구를 경매에 붙이는 곤욕을 치루었으나 그를 후원하는 작가이며 저널리스트였던 친구는 두 번이나 그를 곤경에서 구해낸다. 대중에게 낱낱이 공개된 졸라의 재판과정은 숨겨졌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다.

 

세번째 기고문 중에 '나는 어리석음과 악의에 대한 증오와 진실과 정의에의 갈망 속에서 몹시 격앙된 상태로 지내 오면서, 극심한 마음의 요동침이 평온한 삶을 살던 한 시민을 순교자로 만들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전대미문의 것으로, 그 난폭함과 뻔뻔스러움 그리고 역겨운 고백에 있어서 그동안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보여 주었던 본능적이고 비열한 짓거리의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은 군사법원이 해야할 일인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실이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을 경우에만 또다시 개입하게 될 것이다...'라고 그 당시를 표현하였다.  

 

도박과 유흥으로 방탕한 생활을 한 에스테라지 소령은 빚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군사정보를 빼돌리고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웠다. 피가르 중령에 의해 정체가 밝혀지고 드레퓌스의 형에 의해 '명세서'의 장본인으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그의 필체를 감정한 세 사람의 위증으로 군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일을 덮어주었던 앙리 중령이 진실을 밝히며 자살하여 강제 퇴역을 당하고 영국으로 망명한 후 다양한 방법으로 기고문을 보냈다. 반성하지 않는 그는 단 한 번도 단죄되지 않은 채 영국에서 사망하여 영원한 악인이 되었다. 이런 인간을 보면 과연 양심이라는 게 모든 인간에게 있기나 할까 의문이 든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심을 강제하는 파렴치한 음모를 꾸몄던 자들이, 정의로운 자유국가들이 모범이 될 관대한 나라 프랑스를 꿈꾸었던 이들을,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원흉으로 단죄하고자 하는 것 또한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라며 온갖 범죄행위에 대해서 구구절절 호소하고 군부의 부당한 세력을 행한 무리들을 고발함으로 프랑스 사회가 와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배심원들을 향한 최후 진술>에서 역시 그는 사건의 진상을 소상히 밝히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반드레퓌스파에 의해 졸라는 두 번이나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국으로 망명을 가기까지 한다. 마치 악을 향해 달리는 기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멈추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사면법을 반대하며 상원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은폐되었다가 드러난 악을 치유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한다. 악을 묻어버림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더이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어서는 안 되며, 철저히 정화되기를 바랬다. 썩은 것을 불태우고 파괴의 요인이 될 싹을 잘라 사회전체가 건강과 힘을 되찾기를 말이다. 두 진영간의 치열한 싸움이 적당히 해결되는 것에 반대하며 훗날 그들의 책임이 수치로 기억될 것을 염려했다. 그는 국방부의 참모본부를 고발하고 군사법원을 고발했다.

 

에밀 졸라의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그가 이 사건에 뛰어들기 전 정치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만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이 길고 험난한 싸움에 동참하였다. '저열한 언론이 내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어도 나를 침묵하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며 그의 강인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이 사건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 메당에서 자전거를 타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손수 인화하며 휴식하던 졸라와의 한 인터뷰에는 소설 <풍요>에 이어 <노동>, <진실>을 구상하며 자료를 모으고 있음을 알렸다. '과학만이 더딘 진보와 사회의 퇴보에도 불구하고 미래 사회의 도덕과 미학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동이 형벌이자 고통이기를 바라는 카톨릭 교리에 맞서서 노동이야말로 선이며 신성한 임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만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확고한 신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 될 <정의>에서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그릴 생각입니다. 아름다움과 선을 향해 전진하는 인류에 대한 서정적인 예찬론이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류의 꿈을 담은 한 편의 위대한 시를 써 나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좀 쉬어도 될 자격이 있지 않겠냐던 그는 <정의>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과 의지'라고 강조했던 위대한 작가를 어리석은 인간들이 살해한 것이다.

 

부록에는 드레퓌스 사건의 연보가 1894년 '명세서'라 불린 편지 한 통으로 부터 시작되어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고 종신유형을 선고받으면서 1935년 드레퓌스가 75세로 사망하기까지 연도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건의 주요 등장 인물이 낱낱이 모두 소개되어 있다. 그 당시 중요 사진자료도 나와 있다. 사색하는 에밀졸라의 사진이 지성미 가득하다.

 

제 2부 죽음으로 지켜 낸 진실과 정의 

 

에밀 졸라의 죽음이 사고인지 타살인지 그의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타살임에 분명했지만, 그 당시 아침에는 굴뚝이 뚫려 있음으로 사고 현장을 조사한 경찰과 검시관은 일산화탄소 중독사로 조사를 마무리하고 끝냈다. 

브뤼셀 가에서 몽마르트르 묘지까지 파리를 가로 지르는 장례행렬에는 유명 인사는 물론 부르주아 계층으로 이루어진 긴 행렬 가운데 수많은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입은 채 뒤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국화꽃과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붉은 리본에는 '제르미날, 대지, 노동'이라고 씌여 있었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추도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졸라의 묘혈에는 세 시간이 넘도록 프랑스 북부의 드냉에서 먼 길을 달려온 '검은 얼굴들'의 행진이 이어졌다. 그들은 붉은색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끊임없이 '제르미날'을 연호했다. <제르미날>을 대표하는 검은 색과 붉은 색에서 붉은 색은 불과 피. 혁명을 상징한다.

 

에밀 졸라의 죽음에 바치는 아나톨 프랑스의 조사 전문 중 한 부분이다.

'졸라는 선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영혼들이 그러하듯 위대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하게 도덕적이었으며 엄격하고 거리낌 없이 인간의 악행을 그려 냈습니다. 그의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과 표면적인 비관론조차 인류의 지성과 정의의 진보를 믿는 그의 굳건한 신념과 낙관주의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악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맞서 싸웠습니다. 그것이 그가 보여 준 증오심의 실체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들 속에서 그가 지닌 뜨거운 인류애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더 나은 사회를 예견하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이라고 칭송받은 에밀 졸라의 영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인간이 지닌 선하고 아름다운 인류애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에밀 졸라의 연보가 실려서 그의 가족도 알게 되었다. 

안 읽은 그의 책 <제르미날>, <작품>, <풍요> 등을 사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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