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

루쉰 소설 전집

나무^^ 2022. 4. 17. 18:20

학창시절 <아큐정전>을 읽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작가와 그의 동생의 평전 <루쉰과 저우쭈우런>을 읽었다. 루쉰의 혁명적 정신과 삶의 진지함, 문학적 미장미에 끌려 다시 그의 소설들을 읽고 싶었다. 총 33편의 글이 실린 책이다.

 

제1 소설집 《납함》

 

‘납함’이란 여러 사람이 함께 큰소리를 지른다는 뜻이다. ‘납’자의 한자변환이 안 되어서 대신 뜻을 쓴다.

<자서>는 납함을 쓰게 된 동기와 그가 문학의 뜻을 두게 된 이유가 나와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의학을 전공하려고 일본에 갔었지만 한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중국인의 정신을 살리기 위한 문예로 뜻을 바꾼다. 그러나 창간하려던 잡지를 발행하지 못한 좌절로 적막함에 빠져 비문을 베끼고 읽을 때 이미 잡지를 출판하고 있던 친구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된다. 그 첫 작품이 <광인일기>이다. 어릴 적 친구였던 이의 동생이 피해망상증을 앓으면서 썼던 일기장을 보고 의학자들의 연구 자료로 제공하고자 쓴 글이라고 하니 실제의 자료를 구성한 것이다. 해설에는 환자를 통해 예교(禮敎) 타파를 주장한 반봉건 사상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하였다.

<쿵이지>는 중국의 현실을 반영한 듯 가난한 선비의 처참한 몰락을 가슴 짠하게 그리고 있다. 

<약>은 미신을 믿는 이들이 폐병 걸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피 묻은 만두를 먹이는 이야기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요법을, 효력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의지하고 보는 경우가 많은 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내일> 애지중지하는 외동아들을 잃은 여인이 그 막막한 슬픔을 꿈에서라도 잊어보고자 한다.

중편 <아큐정전>을 나이든 지금 읽어보니 좀 더 깊이 있는 감상이 느껴진다. 작가는 이 글을 씀에 있어 첫째, 제목 문장의 명칭, 둘째, 아큐의 성을 정확히 모르는 점, 셋째, 아큐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 서양문자를 쓴 점, 넷째 아큐의 본적을 모르지만 ‘아(阿)’자 하나는 정확하다는 점을 밝힌다. 아큐는 미장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에서 살며 남의 집 날품을 팔면서 살지만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미장 주민은 하나같이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가 자주 가서 일하는 자오나으리와 첸 나으리의 자식인 글방도련님에 대해서도 우습게 생각했다.

‘아큐가 옛날에는 잘 살았고, 견식도 높고, 게다가 정말 일 잘하는 일꾼’이니 원래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약간의 신체상의 결점이 있었다. 가장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부스럼 자국이 몇 군데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그가 겪는 세상풍파는 어이없기 그지없다. 그래도 세상 낙천적인 그는 매사를 자신에게 좋게 해석하며 무지한 행보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에게 쏟아지는 매질과 수모, 그래서 홧김에 비구니를 희롱하고는 씨도 못 받을 놈이라는 욕을 듣자 자극을 받는다.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청상과부에게 함께 자자는 말을 했다가 그만 곤욕을 치루고 사당에서 쫓겨나며 생계마저 잃는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다. 성안으로 들어가 거인 나으리 집에서 일을 하다 미장으로 다시 돌아와 대우를 받지만 혁명이 일어나고 그 물결에 휩쓸리어 종내 처참하게 끝이 난다. 구경하는 무심한 민중의 반응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아큐가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 외 <작은 사건>, <머리털 이야기>, <풍파>, <고향>, <단오절>, <흰 빛>, <토끼와 고양이>, <오리의 희극>, <마을 연극> 글이 있다. 작가가 살은 당시의 암울한 중국의 단면들을 드러다 볼 수있는 글들이다.

 

제2 소설집 《방황》

 

<복을 비는 제사>는 불운한 여인 샹린댁의 이야기이다. 강제로 돈에 팔려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장질부사로 죽고 아들은 이리에 물려 가 죽음으로 혼자 남겨진다. 그녀는 죽으면 영혼이 있는지 물으며 사후의 복을 빌기에 이른다.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을 속여 돈을 뜯어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하다.

<술집에서> 주인공 나는 고향 근처 도시에 들렸다가 옛 동료를 만나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중 그가 아는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듣는다. ’우리가 예상했던 일 중에 마음먹었던 대로 된 게 하나라도 있나? 난 지금 아무 것도 모르겠네... ‘혼란과 무력감을 표현하는 문장이다.

<행복한 가정> '... 쓰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하는 것이다. 작품은 마치 태양의 빛과 같이 무한한 광원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것이다. 부싯돌의 불씨처럼 쇠와 돌이 맞부딪쳐야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예술이다. 또 그런 작가라야 비로소 진정한 예술가이다. 그런데 나는 ... 이게 뭐란 말인가...'라는 서두로 시작되는, 무명작가의 현실을 그린 글이다. 작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죽음을 슬퍼하며> 가난하고 추운 겨울을 보내며 비참해진 주인공은 '얼음의 바늘은 내 영혼을 찌르고, 나를 영원히 마비의 고통으로 괴롭혔다. 생활의 길은 아직 많다. 나는 아직 날개 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갑자기 그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나 곧 자책하고 참회했다.' 한 때는 사랑했던 여자가 순간 죽기를 바라는 비겁함까지 느껴야 했다. 그녀에게 사랑하지 않음을 고백하자 함께 살던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한참 뒤에 들은 그녀의 죽음. '사랑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 고 생각하며 망각으로 그녀를 장송하지 않으려고 그 회한과 비애를 글로 쓴다.  

<비누>는 풍자적인 글로 개명파를 자처하지만 머리 속에는 봉건사상을 버리지 못한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

<장명등>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에 밤낮으로 켜놓는 등불을 한 젊은이가 끄려고 한다. 미신을 타파하려고 하지만 구질서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장명등(長明燈)을 통해 보여준다.

그 외에  <조리 돌리기>, <까오 선생>, <고독한 사람>, , <형제> 글이 있다.

 

제3 소설집 《고사신편》

 

서언(序言)에 이르기를 이 소설집이 책으로 엮어지기까지 13년이 걸렸다고 한다. 작품의 소재가 모두 신화와 전설, 고대사에서 취재하여 ‘새로 꾸민 고사(故史新編)’여서 황당하지만 그 속에는 ‘특정 대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비수같이 날카로운 풍자가 들어있음을 보게 된다’고 해설자는 말한다.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는 천지창조 신화에서 여왜(女媧)의 인류창조설을 우화적으로 그렸다. 전쟁으로 파괴된 하늘을 보수하는 여왜의 노력은 작가의 현실에 대한 이상이라고 한다.

<달로 달아난 상아> 태양을 활로 쏘았다는 예(羿)의 신화와 서왕모로 부터 받은 불사약이라는 선약을 홈쳐먹고 달로 도망갔다는 상아의 신화를 내용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우직한 예를 묘사하였다.

<치수> 우왕의 치수(治水) 전설을 내용으로 한다. 실천적 정치가 우(禹)와 탁상공론을 일삼는 학자, 관료, 노예근성에 젖어있는 백성들이 공존하는 사회는 바로 현실사회를 이른다. 즉 작가의 현실비판 의도가 강한 작품이다.

<고사리를 캐는 사람>은 백이와 숙제 형제의 이야기이다. 알려진 이야기라 좀 더 흥미롭게 읽었다. 무지하고 천한 하녀가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는 그들 형제에게 고사리는 어느 땅에서 나는 것이냐고 힐책하는 대목은 그들 형제에게 비수를 던지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녀의 비정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죽음이 자신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도공의 복수> 는 보검전설에서 취재하여 쓴 내용이다. 루쉰은 강직한 성격으로 한(恨)이 많았기에 작품에 나오는 '연지오자' (루쉰의 필명이기도 하다)를 통해 무서운 복수를 한다고 해설자는 말한다. 전설에 대해서 모르고 읽어 잔인하고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는데 해설을 읽으니 이해가 되었다. 

<출경> 루쉰이 이 글을 쓸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나라가 혼란에 처해 있었다. 좌익작가연맹에 몸 담고 있던 루쉰은 '국방문학론'에 반대하다 문단에서 소외당한다. 그래서 작가 자신을 노자의 심경으로 은둔하고픈 의도를 표현한 글이라고 한다. 노자와 공자의 대면, 노자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계산 속을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나이들어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큰 감동과 함께 초연한 마음을 지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 반대> 전국시대 사상가 '묵자'에 대한 작가의 존경심과 풍자가 담긴 글이다.

공수반과의 대화에서 '나는 사랑으로써 당기고, 공손함으로써 막아냅니다. 사랑으로써 당기지 않으면 서로 친해질 수 없으며, 공손함으로써 막아내지 않으면 교활해집니다. 서로 친하지 않고 교활해지면 곧 흩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공경하게 되면 서로에게 똑같이 이익이 됩니다. 지금 당신이 쇠고리(鉤)로써 다른 사람을 낚어챈다면 다른 사람도 쇠고리로써 당신을 낚아챌 것이며, 당신이 거(拒)로써 다른 사람을 막는다면, 다른 사람도 거로써 당신을 막을 것입니다. 서로가 낚아채고 서로가 막는다면, 서로에게 똑같이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義)라는 구거는 당신의 그 배싸움의 구거보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국의 일념으로 유세하던 묵자가 결국 구국의연금 모집대에게 보따리를 빼앗기고 비까지 만나 낭패를 본다. 

러시아의 유크라이나 침공이 계속되는 오늘날, 인간의 도의는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짐승들만도 못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참상을 보면서 탐욕의 권력자들을 어찌해야 할까 가슴이 저미는 고통을 느낀다. 

<죽은자 살리기> 루쉰이 병석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장자>의 '지락'편에서 취재하여 쓴 화극(話劇) 형식이다. 장자가 길거리에서 뒹구는 해골에게 인간으로 환원시켜주는데, 해골은 자기 보따리와 옷을 내놓으라며 장자를 도둑으로 몬다. 장자의 달관내지 초월주의를 희화적으로 풍자하였다.

루신의 작품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처럼 어둡고 슬프다. 그럼에도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어리석은 인간의 실체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보여주며 그가 평생 지니고 싶었던 희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사진 속 그의 선한 눈처럼 진실하고 바람직한 삶을 꿈꾸었던 그는 한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학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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