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신문에 소개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축'의 작품을 사놓고 시간이 좀 지나서 읽었다.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라는 문장으로 첫 페이지 글이 시작된다.
20세기 작가가 창조해낸 상상의 마을 '태고'에서 살아가는 니에비에스키 가족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태고의 시간'에 이어 각 등장인물들의 시간으로 나열하며 이야기를 연결시켜 나가는 형식이다.
작가는 심리학, 불교철학 등 폭넓은 학문으로 내면을 확장하여 여러 문학상과 함께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잡았다.
'내게 소설쓰기는 나 자신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일이 어른스러운 방법으로 변형된 것이다. 마치 어린이들이 잠들기 전에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 처럼.' 이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옮긴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공간의 신화화를 추구하면서 여기에 실제 폴란드 역사에 등장했던 요소들을 적절히 접목함으로써 현실과 초자연적 현상이 공존하는 새롭고도 독특한 소우주를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순환성, 원형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화적 시간을 펼쳐 보인다. 토카르축의 작품 속에서 신화적 시간은 역사적 시간도, 개인의 자전적 시간도 아닌, 신화의 영원한 현재를 역설한다'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폴란드라는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 나라 여성의 삶으로서의 여정을 잘 드러내준다.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배경이 되고, 태고의 주민들은 이러한 사건들의 목격자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는 역사의 뒷편에서 스러져간 익명의 존재, 소수자로서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예술은 신화적 언어의 수호자이다. 내게 신화는 기억이다. 신화는 우리가 종으로서의 연속성을 보존하고, 세상을 정돈하는 역할을 한다. 융의 견해처럼 나도 신화가 종의 기억을 구성하는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신화는 학습할 필요가 없으며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그의 사상을 믿는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믿는 '신화'의 막연함을 구체화시킨다.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에서 물까마귀라고 불리던 소작농의 영혼에 대한 글이다.
'술 취한 육신에 갇혀 우왕좌왕하던 그의 영혼, 무죄선고를 받지 못해 신에게로 가는 길이 적힌 지도를 얻지 못한 그의 영혼은 마치 개처럼 버려져서 골풀 속에 차갑게 식었다.
이런 영혼은 속수무책이며 무력하기 마련이다.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끈질기게 육신으로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영혼은 자신이 탄생하여 늘 머물던 세계, 자신을 물질계로 떠밀려 보낸 그곳을 그리워했다. 그 세계를 돌아갈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절망의 파도가 영혼을 휩쓸었다. 그럴 때면 썩은 육신을 버려둔 채 길을 찾아 떠나곤 했다...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가 없었다. 물질계에서 그는 이방인이었고, 영혼계에서도 그를 원치 않았다. 영혼계로 입성하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했다.'
작가의 내세에 대한 생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꿈과 현실, 육신과 정신에 대해서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믿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 경험들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앙하는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어 유대를 이어간다. 심지어 거대한 조직화로 인류를 지배한다.
'파푸카 부인의 시간' 에서 작가는 말한다.
'상상이란 따지고 보면 창작의 일부이며, 물질과 영혼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와 같다. 특히 빈번하게, 집중적으로 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는 와중에 뭔가가 뒤틀리면서 변화가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 그것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물론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스타시아의 인생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지만 행복은 결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크위스카의 시간'에서 플로렌티카는 달을 용서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끄럽다는 고함 소리에 맞대응하는 대사가 웃긴다.
'미시아의 시간'에서 공들여 지은 집은 러시아인들에 의해 무참히 쓸려나가고 크위스카의 딸은 성폭행을 당해 걷지 못한다.
지금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저지르는 전쟁을 보는 듯 참혹함을 느끼게 한다.
'보리수의 시간'에 나오는 '모든 식물이 그렇듯 보리수는 영원한 꿈 속에서 살아간다, 그 꿈의 기원은 나무의 종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꿈은 보리수와 함께 자라거나 확장되지 않고 늘 그대로이다. 나무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 속에 갇혀있다.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나무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영원히 이어지는 꿈이다... 나무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감흥도 없는 그의 꿈은 다른 나무에게 전달된다. 그렇기에 나무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무지가 나무를 시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라는 글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지도르의 시간'에 나오는 우표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다. 사실과 왜곡된 인식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개인에게 미치는 결과는 엄청나다는 것을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보여준다.
'랄카의 시간'에서 암캐 랄카는 미시아의 정신에서 싹튼 이미지에 반응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또한 신의 아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다.
'게임의 시간'은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신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신은 완벽해지고 싶었기에 모든 걸 멈췄다. 그러자 움직이던 것들이 그 자리에 정지했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있던 것들은 허물어졌다. 신은 생각한다. 세상을 창조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다. 아무리 세상을 창조해봐도 얻어지는 건 전혀 없다. 뭔가를 발전시키거나 확장할 수도 없으며,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헛된 일일 뿐... 그럴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시간'에서 이지도르는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성서를 통해 무한대로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나아가 사중구조가 이중구조로 바뀌는 것을 인지하며 충격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는 복합적 의미를 내포한다.
양로원에 간 이지도르는 잊어버리는 법을 터득하고 안도감을 느낀다. 서서히 죽어가면서 그가 형성했던 모든 것들이 체계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겪는다.
'제일 먼저 삭제된 건, 이지도르가 그동안 살면서 힘들게 정립한 이상과 신념, 생각, 추상적 개념들이었다. 그러다 어는 순간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사라졌다... 그가 아는 모든 이들이 망각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출산 후 아이를 바꾸었던 친엄마 크위스카는 아들의 죽음 앞에 나타나 속삭였다.
'세상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얼른 떠나렴. 다시 돌아오라는 꼬임에도 절대 넘어가서는 안 돼.'
작가는 신의 이야기에서, 이지도르의 죽음 등에서 그가 지닌 철학관을 드러내 보여준다.
인간의 삶은 누구나 풀어놓으면 몇 권의 책이 될 이야기들이 있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역사속에서 맞물리며 드라마가 된다.
작가는 그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대개의 사람들은 망각의 강에 그냥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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