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자랑같은 이야기나, 또 아들딸의 자랑스러운 이야기 같은 것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을 뿐더러, 남 앞에 자신의 칭찬을 듣는 일을 조금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였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칭찬이라면 몰라도 제자랑을 넉적넉적 늘어놓는 것 같은 일은, 저 못난 꼴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남앞에 드러내놓는 것이라고 아주 못마땅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어머님 교훈 중에 중요한 것이 되고 있는 듯싶습니다...'
겸손이 미덕이었던 때에 우리들 부모님은 지극한 사랑 가운데서도 자식의 잘못은 엄격하게 교육함으로 자식들은 부모님을 어려워하였다. 요즘은 지나치게 드러내는 사랑뿐, 훈육이 제대로 되지 않음으로 일어나는 문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대이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아이들이 귀해지니 자연스럽게 자식은 상전이 되고 말았다. 자식교육에 있어 사랑과 칭찬, 잘못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조화롭고 일관되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부모연습을 하고 부모가 되는 일도 아니고 내가 부모님께 배운대로 자식을 가르치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므로 좀 더 효도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게 된다.
'내 말, 민족문화의 생명선' 글에서는 문화민족으로서의 품격과 교양을 말씀하신다. 국어교육의 부실함 때문일까? 요즘 차안에서 곁에 섰는 청소년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기가찰 만큼 비속어와 욕을 섞어서 큰소리로 지껄여댄다. 범람하는 방송들 때문일까? 부끄러운 줄도 상스러운 줄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의 언어습관이 많이 염려스럽다.
국문학자 조윤제님의 '무능즉유능' 글에서 '유능한 사람은 학식이 있어 사물에 통철(通徹)하고 정치적인 수완과 실무적인 역량이 있어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능히 추어나갈 수 있으며, 또한 적극성이 있어 스스로 창조의 정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에 대하여 무능한 사람이란 것은 소인과 하우(下愚)에 속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첫째 적극성이 없어 스스로 일을 만들어 나가지 못하고, 욕심은 있으되 일은 하지 않으며, 종일 분망하되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유능한 사람은 사회에 이로울 것이고 무능한 사람은 이로운 존재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 출세를 하는 면에서의 모순을 유능한 이는 큰 바윗돌, 무능한 이를 작은 조약돌에 비유하며 숫자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무엇이든지 다수가 승리를 하므로 유능한 사람보다 많은 무능한 사람이 이긴다 하였다. 즉 무능한 사람들이 나서서 권력을 쥐게 되고 유능한 사람은 그 존재를 감추고 있게 되는 사회적 병리를 지적한 것이다.
자격이 뒷바침 안되는 이들이 나라의 지도권을 쥐고 사리사욕을 채우다 감옥에 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소설가 박화성님의 글 중 '나의 어머니'에서는 집필로 바쁜 나머지 노모를 보살피지 못하고 비운사이에 임종하셔서 그 회한을 토로하였다. 91세까지 장수하셨어도 좀 더 살지 못한 것이 집을 비운 자신의 탓 같아 죄송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을 밝히면서 남은 자식을 위하여 남편의 부채와 첩, 세 자식의 이어지는 죽음 등 온갖 풍상을 굳굳하게 이겨내신 장한 어머니를 회고하였다. 이 글을 읽으며 나 역시 오래전에 떠나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본의아니게 어머니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 채 세상을 떠나시게 한 일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 때 어머니의 심정이 되어 불효를 뉘우치게 된다.
소설가 계용묵님의 글 중 '호조'(새벽새라는 뜻)에는 추사의 선생 조광진이 새벽에 일어나 새들의 지저귐을 보고 필흥이 돋아 '호조'라고 썼는데 여느때와 달리 조자의 넉 점이 만족스럽지 않아 밀어놓았다. 하루는 손님 하나가 글씨를 청하는데 필흥이 일지 않아 이 글씨를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10년 후 중국의 어느 귀족의 사랑채에 걸린 족자에서 이 글씨를 보았다. 주인이 나간 사이 처진 점획이 맘에 들지 않아 가획을 하여 바싹 홀려 붙여 놓았다. 들어와 이를 본 주인이 남의 귀한 글씨에 손질을 했다고 대노하여 그가 자초지종을 말하니 글씨를 쓸 줄만 알지 볼 줄을 모른다며 새벽에 갓 깨어 나온 새가 무슨 흥이 있어 꼬리를 올리겠느냐 꼬리를 쳐뜨리고 우는 법이라 이 글씨를 비싸게 주고 사서 사랑하는 것도 모르고, 글씨를 버렸다며 족자를 떼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자신의 작품 중에도 하찮게 생각하여 빼버리려한 글이 높게 평가를 받는 경우를 설명하였다.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낙관(落款)'에서는 한 벗이 추사의 병풍을 싸게 샀다며 자랑하다 전문가의 감정을 받고 이내 추사보다도 더 잘 그렸다는 그 병풍을 내어버린 이야기를 한다. 추사의 낙관이라고 믿었지만 가짜였던 것이다. 즉 그 글씨 자체에 혹해서 산 것이 아니라 추사의 명성에 혹해 구입한 것이었다. '새로이 잘한다는 것이 이미 얻어 가지고 있는 그 명성을 누르기 힘든다. 확실히 그 가치의 판단에 명석한 두뇌도 그 명성 앞에서는 눈을 감는 것이 예의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자라난 그 명성의 그늘 밑에선 흔히 새싹이 마음대로 활개를 펴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예를 보아도...' 명성을 쫓는 사람들이 예술품의 가치를 턱없이 올려놓는다. 유명한 화가 고흐는 살아 생전에 그림을 단 한 점, 고흐를 잘 아는 화가의 누나가 구입해 주었을 뿐 그림 그리는 내내 동생에게 의탁에 살아야 했다. 지금 그의 그림은 부호들의 자산으로 거래된다. 그의 가난했던 삶을 반역하듯이 느껴진다.
언론인이자 문필가인 최은희님의 글 외화내허(外華內虛)의 생활에 나오는 글이다.
'아들은 설이나 추석이나 내 생일은 물론, 내게 관계 또는 큰 일에는 머리잡아 힘을 쓴다. 그래도 그런 일은 잠시 잠깐이요, 내 마음은 항상 허전하고 고독하다. 날이 궂으면 더 우울하다. 대화가 그립다. 담배도 술도 모르니 더욱 그러하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아들 딸이 그리워라>하고 베개를 적시는 날도 있다. 그리워하는 것은 사랑의 진수요 심도다. 이것이 모정이다.'
지성인도 이러하거늘 학식이 짧은 내 어머니는 노년에 얼마나 자식들이 보고싶었을까. 며느리와의 갈등이 싫어 시골로 내려가신 어머니는 늘 자식들과 손주를 그리워하셨다는 것을 이제 그 나이가 되어보니 뼈저리게 느낀다. 성장한 자식과 자신을 분리해야 하는 인식을 무색하게 하는 모성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부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세상살이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학자 이상백님의 '오징어의 환영 - 을릉도기행' 글에는 이곳 섬사람들의 특징을 잘 설명하였다. 풍어의 부유함이 도동 사람들을 경주나 대구 사람들보다 개화되어 세련화려하고 사교적이라 하였다. 또한 오징어 풍어때의 일시적 번영이 낭비와 투기에 물든 생활태도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소득의 반을 소주인 술을 사들이는데 쓴다고...
'을릉도는 동해의 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버림을 받고 있다. 이곳을 자기 선조의 墳墓之地(봉묘지지)요, 자기 후손들의 기탁할 운명의 장소라고 생명을 걸고 분투하려는 주인이 없다. 교통은 서해의 絶域(절역)인 흑산도나 여청도보다도 훨씬 불편하고, 오징어를 기다리는 漁火(어화)만이 파도 사이에 명멸하고 있다. 물은 너무도 맑고 하늘은 너무도 높고 산은 푸르고 암초는 奇絶(기절)하다. 白晝(백주)에는 너무 고요한 것이 무섭고, 절경에는 인적 없는 것이 더욱 쓸쓸하다. 을릉도를 생각할 때 독도를 운운할 용기를 잃었다. 국토의 수호, 해안선의 확보란 필요불가결한 시책과 대비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을릉도는 오징어의 혜택을 입었을지 모르나 지금 그 환영에 고민하고 있다.' 50여년전 이야기이다.
지금 을릉도는 관광지로 발전했다. 내가 30여년 전에 가서 민박 했을 때 사흘 내내 매끼를 오징어로 가득한 밥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리분지 천궁밭의 진한 약초내음도 기억난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이양하님의 글 '조그만 기쁨' 에는 일상의 사소한 작은 것들이 우리들을 그날 그날의 애상과 우수에서 건져내며 참다운 기쁨이 되고 있음을 알린다. 삶은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소소한 기쁨들이 활력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무궁화' 에서 꽃의 겸허한 미덕에 대하여 말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국화(國花)로 천대 만대 길이 보존되길 바란다. 나는 무궁화를 유심히 바라볼 때가 더러 있는데 솔직히 그 가치를 작가만큼 느끼지는 못하겠다.
'나무'글에서는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힌 저녁의 고독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좋아서 예명을 나무로 지은 나로서는 맘에 드는 글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글들도 마음에 든다.
아동문학가 마해송님 글 '사람 나름'에서는 한 성실하고 정직한 목수이야기가 나온다. 나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학교를 가 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아 목수를 하셨는데, 단 한 번도 일거리를 찾아 나선 적이 없었다. 늘 사람들이 청해서 일을 받아 하셨다. 평생을 남에게 아쉰 소리라고는 하지않고 살다 가셨다. 자식들은 재산 대신 아버지의 성실함을 물려받아 힘든 세상을 다 잘 살고 있다.
'어린날의 회상'에서는 열두살에 장가든 이야기가 나온다. 어려서 혼인을 시키는 바람에 청년이 되어 성숙하면 그 결혼을 유지시키는 것이 어려운 때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미술사학자이신 고유섭님 글 '금강산의 야계(野鷄)'에서는 관광지의 추파를 이기고 유점사 오삼불(五衫佛)을 촬영한 일을 썼다. '청자란 무엇인가' , "청자의 전세(傳世)와 출생', '조선고대의 미술공예', '현대 세계미술계의 귀추(歸趨)' 글은 한자말이 많고 학구적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작가는 끝으로 '예술은 모방이 아니요, 창조가 아니요, 실로 실로 Montage' 라고 조선화가에게 제시한다. 즉 주제와 연관된 필름들을 모아 하나의 연속물로 결합시키는 편집기술이라는 거다.
영문학자, 문학박사이며 평론가인 정인섭님의 글 '산', '흰눈'은 자작시와 다른 시인의 글을 소개하며 자연을 예찬하였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글에서도 자작시로 그 장엄함과 신비로움,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노래하였다.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때인 만큼 머나먼 이국 땅에서 본 고대 유적의 놀라운 감동을 전하였다.
언론인이자 수필가인 김을한님의 글 '민족은 숙명인가'에서는 저자가 가장 좋아했다는 마해송의 인품과 생활상, 민족적 자긍심이 높은 그와 친구가 된 이야기를 한다. 또 한 사람은 일본으로 귀화한 소설가 장모씨의 예를 들어 두 문인의 인생여정을 대조하며 '조국과 민족이란 하나의 숙명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고 말한다. 학창시절 배웠던 작가 마해송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평론가이자 문학박사인 이 헌구님 글 '도서관 풍경'에서는 도서관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저자 뿐만 아니라 새벽부터 줄서는 학생들, 법학도, 의학도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은 구마다 학교마다 도서관이 있지만 인터넷과 경제적 부유함 때문인지 예전보다 도서관 가는 사람은 오히려 많이 줄은 것 같다.
'하일잡초(夏日雜草)'에서는 우애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몽테뉴는 네 가지 화합 중 극치의 화합으로 우애(友愛)를 들었다. 연애와 비교하여 우애의 장점을 우선하였으나 현대사회는 모든 관계에 물질적 계산이 작용하여 진정한 우애가 존재하지 못함을 슬퍼했다. 궁핍 속에도 존재했던 진정함이 부유함 속에서는 옅어지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일까?
'행복'이란 글에서 알랭이라는 사상가는 '행복은 인간이 추구할 것이 아니요 소유할 것이다.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언어에 불과하다.' 말한다. 그러나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보여지는 행복이란 실로 한 찰나요, 어느 한 순간 뿐이다. '실로 우리 인생이란 자타의 불행을 지긋지긋하게 보아가며 살 운명이다.' 따라서 일상 속에서 진실한 감명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진 글 '이소연, 신일선 그리고 나'에서 처음 방송극을 올리고 받은 돈으로 밑창없는 구두를 버리고 새 구두를 샀다. 하지만 아침에 친구들과 기숙하던 방 문을 여니 구두는 없어지고 거짓 발부상을 당한 듯 붕대를 감고 슬리퍼를 신은 채 약속장소로 가는데 전용 인력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를 맞닦뜨렸다. 노구종에게 '그런 놈 난 모른다.'는 냉정한 아버지. 예전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면 자식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엄격했었다.
'고고청청, 비굴을 모르는 성품'에서는 월탄 박종화님과의 격의 없는 우애를 적으며 그와의 일화를 소개한다. 나는 학창시절 그 분의 소설 '금삼의 피'를 비롯하여 여러 권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만석꾼의 둘째아들로 작가를 일심양면 돌보아주었다니 보통 우정은 아닌 듯 하다. '월계관 쓴 마라톤왕 손기정 역에 갈채' ,'연극 윤봉길 의사와 백범' 이야기도 모두 재미있다.
철학자 이상단 님의 글 '밤과 인생'에는 '낮을 눈의 세계요, 귀의 세계라 하면, 밤은 영의 세계요 혼의 세계이다'라며 밤에 의미에 대해서 예찬하였다. '상견유감(喪犬有感)'에서는 우연히 들어온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경위에서부터 죽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잘 돌보지 못하여 일어난 사고를 개탄하였다. 나역시 강아지를 두 번 키운 적이 있는데 모두 사고로 죽어서 몹시 마음이 아팠던 경험이 있다. 못된 사람보다 나은 가족이었던 개를 부주의로 잃고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 '죄많은 인간이여!'
'유정시(有情詩)와 무정시(無情詩)'에서는 당 현종때 시인 왕유가 멀리 떠나는 친구와 작별하면서 쓴 '양관삼첩'(陽關三疊)시와, 산중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 매화꽃 피었는지 묻는 '문매'(問梅)시를 비교하여 전자의 절절한 석별의 정과 달리 후자의 무정함의 연유를 설명한다. 이유인즉 젊어서 부귀공명을 누렸으나 후에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고 그의 인생관이 바뀌었다. 세상살이의 부질없음을 깨달아 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도교, 불교사상을 벗하며 '공(空), 적(寂),정(靜),한(閑)을 읊었다 한다. '희노(喜怒)의 정이 극한에 달했을 때 그 한계선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무정시이다. 왕유의 문매시가 회자인구하는 것도 이 까닭이다. 그러나 시인에게서 무정시가 나오게쯤 되면 그 사회는 이미 볼장 다 본 사회이다.'라고 말한다.
의사이자 수필가, 정치가인 김성진님의 글 ‘이생원과 권참봉’에는 구한말 어린 시절 근엄하고 단정했던 이생원에게 글씨를 배웠는데, ‘먹은 개미 힘으로 갈고 글씨는 황소힘으로 써야 하느니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악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타고나는 소질인 것 같다. 술을 몹시도 즐겼던 권참봉은 저자에게 술 심부름시키며 귀찮게 하더니 결국은 남의 환갑 잔치날 과음하여 중풍으로 쓰러져 객사함으로 파흥을 불러오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술에는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친구들의 술을 즐기던 남편들이 육십 초반에 명을 다하는 것을 여럿 보았다.
‘나의 취미’ 글에는 의사를 하면서 독서와 글쓰기, 오케스트라 멤버로 활약한 일, 승마, 수영, 사진 등 다방면에 걸친 취미생활은 일가를 이룰 만한 결실을 못 보고 ‘보잘것없는 잡놈’을 만든 데 불과하다고 통탄했다. 욕심이 과하다 생각되지만 그러한 취미생활을 하면서 그 즐거움에 힘든 의사라는 직업을 잘 해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만한 체력을 지녔다는 것이 부럽다.
‘백수의 변’에서는 중학 시절에 벌써 반백이 된 머리털 때문에 오히려 반발심에 스스로 백수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욋과 의사치고 치질근치 수술에 신기원을 이룩한 백수식 수술법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므로 영국 Whitehead 박사를 존경하며 그만큼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염원하였다 한다.
‘덤으로 산다’ 글도 재미있다.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노후가 되면 어느 정도 각성한 이는 모두 덤으로 사는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시인 이경순님의 ‘허무조직 흑풍회’ 글에는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운동 하던 클럽으로 흑우(黑友)라 호칭하였는데 그 이상은 ‘사색하는 허무는 창조요, 환상은 실존의 가능이라’ 나름 통절한 고민과 비장한 투지로 늘 존재의 허무와 무상을 반추하였다고 회상한다. 5개월 옥살이까지 하고...
‘아나문예 강연’ 글에는 아나키즘 문학인들 강연에 등단한 한 연사가 말하길 ‘양두(羊頭)를 걸어놓고 구육(狗肉)을 팔아먹는 관헌의 악성...’하자 왜경이 칼을 철컥하며 중지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참으로 숨 막히는 식민지 시절이었다.
‘인간증상’ 글에는 ‘생존증’과 ‘돌연변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회현상의 병리에 대해 느끼는 소외감과 구토증, 언어의 천박한 변질을 질타하였다. ‘인성(人性)이 수성(獸性)으로 전락화 되는 복고적 실상이라고...’ 요즘은 아예 이런 의식조차 없이 지도자나 어린 학생이나 구분 없이 모두 욕설을 내밷는 세상이 되었다.
‘인공유방’의 폐단, ‘낭패한 얼굴’의 희비애락으로 새겨지는 주름, ‘나 니힐의 회상기’에서는 선택한 자유와 다다디스트와 대견(對見)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극작가이며 연출가, 연극평론가인 유치진님 글 ‘연극계의 회원(回願)’은 우수한 희곡의 생산과 함께 국민극의 육성을 바라는 내용이다. 연극계에 종사하는 이들의 빈곤함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영화의 발전에 비하면 더욱 그러하여 연극배우들은 TV나 영화를 통해 밥벌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엽서 제작 시대’에는 섣부른 연애를 하는 것 보다는 자신에게 보내는 엽서로, 봉투를 떼는 맛도 새롭고 그것을 읽는 맛도 새롭고 다정하다며 가장 완전한 연애법이라고 말한다. 편지나 엽서가 사라진 시대, 모두 짧은 메시지나 카톡으로 의사전달을 한다. ‘미지의 소녀에게’ 같은 편지글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황금의 힘’에서 저자는 매사냥을 갔다가 바윗덩이만 한 금덩이를 얻어 정당 대표가 되고 대통령에 이르자 일대의 인걸이라며 동상이 세워졌다. 세상이 허무맹랑한 노름판이로군! 탄식하다 꿈에서 깨어났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던데...
언론인 오종식님 글 ‘차중봉변’에는 기차 이등칸 변소의 배출구가 만곡식(彎曲式)이 아니고 수직식이라 겪은 황당한 불쾌감을 토로하였다. 그런 구차한 시대가 있었다.
‘악어의 덴뿌라’는 말레이연방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시 뒷골목에서 성행하고 있는 잔인한 식도락에 대하여 쓴 글이다. 악어와 거북의 수프를 내먹는다니 악어의 덴뿌라, 코끼리 고기의 수프를 만들어 먹는다는 일본인의 만담이 웃을 일이 아니었다.
탁하고 맑은 얼굴색은 주로 먹는 음식에 따라 다르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시인이며 독문학자인 이효상님 글 ‘종교는 무슨 필요가 있느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남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희생하라는 것, 즉 공동선을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이며 생활 전체가 종교생활이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종교적 정신으로 하는 생활이다. 비종교인과 다른 것은 마음의 자세, 즉 정신의 자세인 것이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길이라 믿고 전진해야 하는 것이 종교인의 인생관이라고 말한다. 생활 전반이 기도인 것은 일체의 생활을 신에게 바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대통령은 서울시를 하느님께 바친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의 삶은 말과 행동이 달랐고 결국은 재판받고 감옥에 가는 불명예를 겪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위선의 탈을 쓰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하느님께 나를 맡긴다’는 것은 신이 나의 영혼을 창조해주었다고 믿는 신앙에서 비롯되지만 그 절대적 신앙심은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시인이며 영문학자인 이하윤님 글 ‘글 빚, 책 빚’에서 저자는 문우들의 많은 시집을 받으면서 부끄러워한다. ‘시집을 읽는 독자보다 시를 짓는 시인이 더 많아진 것은 아마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때도 그러했거늘 오늘날은 더하다. 이제는 누구나 맘만 먹으면 시인이 아니어도 자비(自費)로 손쉽게 시집을 낼 수 있다. 시인을 들국화에 비유한 시도 썼는데, 자신을 시들어가는 애처러운 한 송이 들꽃이라 표현했다. 빚진 종이 되지 않기 위해 시집을 내고자 하는 작가의 심정을 드러냈다. 그러니 시인이란 명함 없이 시를 쓰고 즐기는 일도 좋은 것 같다.
‘여자의 이름’ 글에서는 한글로 이름을 짓다 보니 남녀 구분이 애매한 점도 있지만 한자와 항렬에 치중하는 구습을 타파하는 점에서는 바람직하다 하였다.
법학자이며 소설가인 유진오님의 ‘해바라기’에서 햇볕이 부족해 잘 자라지 못하는 해바라기를 보면서 느끼는 애착, ‘풋나기 교원’에서는 한 학생이 자신이 준 학점 때문에 낙제할까 노심초사했으나 학교도 한 사회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참으로 마음이 여리고 인간적인 성품을 느낄 수 있다.
소설가, 아동문학가인 이주홍님의 ‘한무한(恨無限)’에서 바른 소리 하다 죽음에 이르는 벌을 받지만 뇌물은 이승보다 저승이 더 효과 있음을 이야기한다.
‘석양에 비켜서서’ 글에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 그려진다. 노인이 될수록 젊은이를 가르치려 들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자신들은 늙으리라 생각하지 못하는 듯...
‘지나간 사람들’ 글은 친했던 지인 세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제난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향토애가 남달랐던 이는 죽음을 예견했고 그의 말처럼 떠났다.
시인이며 수필가이신 김소운님 글 ‘거지 열전’에는 여러 아마추어 거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이 낙오자들이 자신보다 훨씬 급수 높은, 혹은 몇 갑절 더 순수한 인간들로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 동물이건 인간이건 순종일수록 약한 것이 생물학의 약속이라며 그들에게 적선을 한다.
‘호랑이 그림’에는 옛날 몰락한 양반의 규수가 월경대를 보자기에 싸서 전당포로 가져가면 펴보지도 않고 두 냥을 빌려주는 불문율이 있었단다. 그 전당물은 반드시 찾아간다고. 과거 우리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여정(餘情)과 여백이 사라짐을 아쉬워하였다.
‘또 하나 일본의 얼굴’에는 조선의 도자기 유물의 진가를 알아보고 감동하는 학자 이야기가 나온다. ‘이조의 명기가 아니었던들 센노리큐우(千利休)가 생겨났을 리 없고, 리큐우 없이 일본의 다도가 존재할 수도 없다’고 말하며 미의 본질을 거론한다.
기생파티, 매춘관광을 유행시킨 일본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기다리는 마음’, ‘영리한 베르베르’ 글도 재미있다. ‘자화상’에는 어려서 부모와 이별하고 종형을 따라 일본으로 밀항하여 헐벗고 굶주리던 때 ‘조국은 내 방부제였다. 이 이상 더 큰 보상이 또 어디 있을까 보냐!’ 라고 고백하며 필화사건으로 일본에 발이 묶여 있을 때 ‘나는 조국을 버렸다’는 거액의 원고 청탁을 거절한 일, 일본판 <한국 문학선집>이 지연되면서 겪는 고충을 묵묵히 사명감을 지니고 해내는 과정에서 저자의 성품과 올곧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필가 윤오영님 글 ‘봄’에서는 젊은이의 봄은 기쁨으로 차 있는 홉겹의 봄이지만 늙은이의 봄은 기쁨과 슬픔을 아울러 지닌 겹겹의 봄이라 한다. 또한 과거라는 귀중한 자산이 호수의 가득한 물결 같아 물이 많을수록 호수가 아름답고 과거가 길수록 오늘이 큰 것이다. 봄이 가는 것을 슬퍼함은 일 년을 사는 곤충의 슬픔이요, 교목(喬木)은 봄이 열 번 가면 열 개의 봄을, 가을이 열 번 가면 열 개의 가을을 지닌다. 그러므로 과거를 되새기는 것도 삶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라 하였다.
‘찰밥’에서 어머니를 회상하며 눈물 흘리는 마음...
‘오동나무 연상(硯床)’에는 한 친구의 80세 노모에게서 단아한 여성의 흔적을 느끼며 백 년이나 됐다는 오동나무 연상을 떠올린다. 또 고물상에서 산 배나무 실패를 소중히 머리맡에 두고 그 손결을 느끼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식모 아이가 집수리 온 이에게 부탁해 매끈하게 대패질하고 니스칠해놓아 쓴웃음을 짓는다.
‘젊은 여성은 잠시도 몸가짐을 해태(懈怠)하지 아니함으로 젊음의 미를 길이 지닌다. 참을 사는 사람은 잠시도 허튼 생활에서 자기를 소모하지 않는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文情)과 문사(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 속기(俗氣)를 떨치고 문아(文雅)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그러기에 한 편의 명문은 10년의 교양에서 온다고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행화’ 글에서는 ‘낙화야 펄펄 날아라. 호사스럽게 지는구나. 웃으며 피었다 웃으며 날아라’ 노래 부르던 행화가 이유 모르게 자살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어린 여성의 내면이 얼마나 괴로웠기에 세상을 등졌을까!
‘꿈과 현실’은 눈앞에 비치는 현실들이 꿈만 같음을 통탄하는 글이다. 모두 좋은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