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색의 향기가 보내주신 백승훈 시(詩)

나무^^ 2022. 6. 26. 13:44

 

궁궁이 꽃

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구세군 자선 남비 속에
백동전 하나 넣고 가는
고사리손을 보았습니다
눈송이보다 더 하얀 백동전을
남비 속에 수줍게 밀어 넣고는
총총히 멀어지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자잘한 꽃들이 한데 모여
고봉밥 같은 꽃다발을 이루는
여름 냇가에 피는 궁궁이꽃처럼
비록 보잘것없는 백동전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누군가의 따뜻한 밥이 된다고
속삭이듯 내리는 눈송이 하나가
소녀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짚어주었습니다.

 

 

 

명자나무 꽃

바람에 쓸리고
찬비에 젖어
거리를 떠도는 낙엽들이
겨울 앞을 서성이는데
볕 바른 화단에
명자꽃
봄보다 더 붉게 피었다
철모르는 꽃이라고
혀를 끌끌 차다가
이내 나를 돌아본다

걷다 보면
누구나 삐끗할 때가 있다
나도 허방을 짚어
삶이 송두리채 휘청인 적 있었다.

 

 

 

족두리꽃

족두리 꽃 피면
시집 간 누이 생각이 난다

분홍 나비떼 내려앉은 듯
곱게 빗은 누이의 머리 위에서
찰랑거리던 칠보 족두리

바람 한 점 없는데
가늘게 떨리던 누이의 속눈썹 끝에
아롱지던 눈물 방울
복사꽃 꽃물 든 누이의 볼을 타고
흐르고 흐르던 기억

눈물이 말라 돌아오는 길
잊었는가
해마다 족두리 꽃은 곱게 피는데

 

 

 

산수국

여름 숲속에 피는
희고 푸른 산수국은
보잘 것 없는 진짜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 둘레에 참꽃보다 크고 화려한 헛꽃을 내어 단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참꽃이 꽃가루받이에 성공하면
그동안 꽃 시늉하던 헛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는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헛꽃이라도 되어
누군가를 빛나게 한 적 있었던가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성공하면
주저 없이 본래의 나로 돌아온 적 있었던가
산수국과 마주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된다

 

 

참나리꽃

여름이 뜨거워서
피어난 게 아니랍니다
꽁꽁
사리고 쟁여도
가눌 길 없는 내 안의 불꽃이
마침내 터져 오른 것입니다
찾아오는 이 없어
홀로 피었다 진다 해도
나는 서럽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였으므로

 

 

물레나물 꽃

궂은
장맛비에도
삼복의
뙤약볕 아래서도
물레나물 꽃은 핀다​

제 안의
바람 가눌 길 없어
스스로
바람개비가 된 꽃​

들길에서
물레나물 꽃 만나거든
오매불망
네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자주꿩의다리

산기슭
바위 틈에 핀
자주꿩의다리 꽃을 보니
꽃들도 가뭄을 타는구나

한 생애
가장 눈부신 순간을
찬란하게 맞이하지 못하고
헤쓱한 낯빛 감추려고
애써 웃고 있다

어쩌랴!
이렇게라도 꽃 피웠으니
부끄러울 것 없다
이만하면 충분히 수고했다고
생수 한 병 부어주고
돌아서 왔다

 

 

 

해오라기난초

여기
새가 되어 날고 싶은
꽃이 있다

한 번
뿌리 내리면
평생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운명을 거역한 꽃이 있다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새가 되고 싶어
스스로 새의 형상으로 몸을 바꾼
해오라기난초

산다는 것은
곧 꿈을 꾸는 일이라고
내게 가만가만 속삭이고있다.

 

 

 

쥐오줌풀꽃

묵정밭
한 모퉁이에 쥐오줌풀 꽃 피고
작은멋쟁이나비 한 마리
꽃 위를 날고 있다

자잘한 꽃들이 모여
신부의 부케처럼 꽃다발을 이룬
쥐오줌풀 꽃

약으로 쓰는 뿌리에서
쥐오줌냄새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그 고운 자태에 어울리지 않게
쥐오줌풀이라니!

그 붉은
꽃 앞에 서면
자꾸만 미안해진다

 

 

도사물나무 꽃

​한차례
벚꽃잔지 끝난 뒤
신록이 꽃처럼 눈부신 봄날
옛집 뒤란에서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있는
도사물나무 꽃을 본다.

누가 본다고 피고
누가 보아주지 않는다고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누가
이름 부르지 않아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홀로 저물어가는 꽃을 보며
생각한다
부디 나의 생도
저 꽃처럼 의연하기를

 

 

 

낙화

​밤새
비바람 사납더니
담장 위 능소화
꽃숭어리채 떨어져 바닥에 뒹근다
지는 것이 두려워 피지 않는 꽃은 없다 해도
이렇게 속절없이 꺾이어 지고 나면
어찌 황망하지 않으랴
공연히 짠한 마음에 꽃 한 송이 주워드니
배시시
꽃이 웃는다
한 생의 마지막이
이리 고울 수도 있다니!

 

 

 

흰 장구채

진초록의
여름 숲속에
흰장구채 꽃이 피면
아버지가 그립다

한평생
등짐보다 무거운
여섯 남매 거두느라
사철 풀물 든 손
마를 날 없던
아버지

가슴 깊이
신명나는
장구채 하나
품고 사시던
아버지를
닮은 꽃

 

 

 

무스카리​                                              


집안에 봄을 들일까 싶어
화원을 찾았을 때
문밖에서 꽃샘바람 맞으면서도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던
무스카리 꽃​

너른 온실 가득
화려한 꽃들 다 제쳐두고
무스카리 화분을 사 들고 돌아온 것은
첫 눈맞춤한 그 꽃이
자꾸만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내 삶 속에도
무스카리처럼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다

 

 

물매화​

                                                         
어린 임금의 비애가 서린
영월 장릉 옆 물무리골 생태습지로
물매화를 만나러 갔었네
가을 끝자락 밟아간 터라
이미 지고 없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 했는데
간절한 내 마음 아는 듯
함초롬히 피어 있는
물매화 꽃 한 송이
먼 길 찾아온 나그네를
수줍게 반긴다

 

 

 

칼랑코에

들판의 꽃들
다 사라지고 나면
왠지 마음 헛헛할 것 같아
칼랑코에 화분 하나 들여 놓았더니
온 집안이
환한 꽃빛으로 가득해지고
구석구석 봄빛이 일렁여서
덩달아 내 맘도 마구 설렌다
칼랑코에!
그 작은
꽃들의 황홀한 매직이다

 

 

 

병꽃나무 꽃

입동 지나
들에서 마주치는 꽃치고
안쓰럽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무서리 지나간 들판에서
겨우겨우 꽃을 피운 병꽃을 보니
솜털 보송하던 어릴 때 헤어진 뒤
반백년 만에 백발 성성한 모습으로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초등학교 동창생 같다
그간의 안부를 물을 것도 없이
그저 안쓰러워
주름 가득한 손 마주잡고
서로 어찌할 줄 모르던

 

 

 

애기똥풀꽃
                                                      

더디 오는
봄이 그리워
강변으로 봄마중을 나갔다

강물은 무심히 흐르고
강가엔 서로 몸 부비며 수런대는 갈대 뿐
어디에도 봄은 보이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이 겨웁도록
지천으로 피어 강둑을 수놓던
노란 애기똥풀꽃 다 어디로 갔나

발길 돌려 집으로 돌아오며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꽃양배추

찬바람 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가
화단에 심어놓은 꽃양배추를 본다
세상의 꽃들도 사라진 이 추운 날에
얼마나 꽃이 되고픈 마음 간절했으면
온몸으로 꽃을 피웠을까
겨울화단에 피어난 한 떨기 장미 같은
꽃양배추

 

 

 

풍도바람꽃

​서해의
외로운 섬에
숨어 피어도

제일 먼저
봄소식 전하는
풍도바람꽂

​나도
그대라는 외딴 섬에
바람꽃 되어
눈부신 봄을 전하고 싶다

 

 


별목련

초등학교 담장 너머
별목련이 피었다

수줍음 많은
백목련처럼 옷깃을 여미지도 않고

사방팔방으로
흰 꽃잎 한껏 펼쳐 별처럼 피었다

별 볼 일 없는 도시의
아이들에게 별을 보여주려는 듯

 

 

 

겨울 개나리

 

찬 서리 내린다는 상강 지나니
세상의 모든 꽃들 문을 닫아 걸고
떄 이른 한파주의보에
오소소 몸부터 떨려오는 입동 무렵
물무리골 생태탐방로 산책길에서
노란 개나리 꽃을 만났을 때
추위를 견딘 후에야 꽃을 피우는 녀석이
꽃빛에 허기진 나를 위해 찬바람 속에 피었나 싶어
철없는 아이처럼 좋아라 하다가
남 모르게 홀로 추위를 견딘 것은 아닌가 싶어
겨울 개나리
그 여린 꽃송이 하나 하나가
밤 깊어도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이었다

 

 

 

섬기린초​

겨울 들머리에서 만난
섬기린초
찬바람에 떨고 있다​

고향 섬마을 울릉도 떠나
타향살이에 지쳐
꽃 피는 때를 놓친 것일까​

살이에 부대끼느라
고향 안부 오래 잊고 산
내 모습만 같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데​

여름이 아니라도
꽃 피는 바로 그때가 꽃시절이라고
별처럼 반짝이며 나를 부른다

 

 

 

꽃기린

창가에 놓아둔
꽃기린 화분 하나
새벽마다 유리창에 성에가 끼는 겨울이 와도
꽃을 피운다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란 꽃말을 떠올리며
날카로운 가시 가득한 줄기 끝에
한 방울 핏방울처럼 피어나는 꽃이
예사롭지 않다

세상이 온통 가시밭길이라고
함부로 투정하며 살아온 내게
가만히 속삭인다
고난의 깊이를 간직한 자만이
저리 순정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팔손이 나무

 

꽃들이 문을 닫는
겨울 들머리
팔손이나무 홀로 꽃을 피웠다

사철 푸른 잎 펼쳐 하늘 우러르다가
뒤늦게 피어난 팔손이나무 꽃
찬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저 당당함이라니

어찌 눈 멀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랴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어 올린 팔손이나무 꽃
겨울 하늘에
순백의 느낌표를 찍고 있다

 

 

갯까치수염

한겨울
난대식물원에서
여름에 피는 갯까치수염을 본다

꽃 필 때도 모르는
철부지꽃이라고 혀를 끌끌 차다가
갯까치수염이
철 모르는 게 아니라
온실 안의 따뜻한 공기가
여름이라 착각하게 한 것은 아닌지
생각을 궁글리다가
삶의 겨울 들머리에 선 나를 돌아보며
생각한다​

나로 하여금 철을 잊고
맘껏 꽃 피우게 할 햇살 같은
그런 사람 어디 없는가

 

 

 

감꽃

신록이 좋아
초록이 좋아
해종일 숲을 헤매다 돌아온 저녁
뜨락에 떨어진
노란 감꽃을 본다

​늙은 먹감나무
너른 잎 펼쳐 녹음이 짙어지도록
초록 그만 늘 사랑했을 뿐
감꽃이 피는 줄은 왜 몰랐을까

​어디
놓치고 사는 게
비단 감꽃 뿐이랴

 

 

 

노랑무늬붓꽃

너를 만나면
내 안에
오색무지개 뜨고
힘겹게
올라온 길 지워버리고
나도 꽃이 되어
네 곁을 지키고 싶었네
살다 보면
한 번 쯤은
고단한 생 접어두고
꽃이 되고플 때가 있다.

 

 

야광나무

멀리서 바라만 봐도
초록물이 함뿍 들것만 같은 봄 산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꽃나무를 보았다
나비의 날갯짓에도 살랑대는 봄바람에
화르르 화르르
눈처럼 흩날리던 꽃잎, 꽃잎들...
잠시 그 꽃나무 아래
서성이다 떠나온 것 뿐인데
시선 끝에 두고 온 미련을 따라왔을까
밤 깊을수록
야광나무 한 그루
쓸쓸한 나의 뜨락을 환히 밝히고 있네

 

 

 

민들레

​눈길 닿는 곳마다
터져 오르는
꽃폭죽에 정신 차릴 수 없을 때
행여 허방 짚을세라
발 밑에서 경고등처럼
노란 불을 켜는 민들레
역마의 바람이 나를 흔들 때마다
조용히 나를 잡아주던
당신처럼


흰이질풀

​천변 둑을
거닐다 만난
흰이질풀 꽃

초록 덩굴 사이로
파란 하늘
곱게 받쳐 든
어린 누이의 손톱만한
흰 꽃송이들

기다리는
나비는 오지 않고
짖꿎은 바람이
이따금
꽃대를 흔들고 가도

이 생의 소명인 양
매번 흐트러진
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나비를 기다린다.

 

 

 

함박꽃나무

 

순결한
첫사랑 같은
함박꽃나무
흰꽃 그늘 밑을 지나온 저녁
꽃향기에 그을렸는가
밤 깊도록
내 몸이 향기롭다  

 

수선화

가끔은
세상 쪽으로 난 문을 닫고
내 안을 찬찬히 살펴야 할 때가 있다

가끔은
누군가를 위로 하는 대신
내가 나를 위로해야 할 때가 있다

가끔은
물낯에 비친 제 모습에 취해
자기애에 흠뻑 빠진 수선화처럼
스스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할 때가 있다

 

 

금꿩의다리

고향의 벗들과 떠난
삼척 여행길에서 만난
금꿩의다리 꽃

껑충한 키에
금빛 꽃술 가득 내어 단
금꿩의다리는

스무 가지가 넘는
꿩의다리 중에서도
키가 가장 크고 꽃도 제일 곱다

12일 내내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친구 중의 친구
죽마고우를 똑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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