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래된 친구를 생각하며

나무^^ 2022. 4. 23. 15:15

 

중학교 때 같은반 했던 친구이니 알고 지낸 세월이 수십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세월이 무색하게도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남친으로 비롯되었다. 그 사람은 유부남이었고, 그들의 관계를 안 부인과 자식이 그녀를 찾아올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친구로서 그녀의 입장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정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의든 아니든 그녀에게 사랑을 빙자한 거짓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있었다.

 

친구는 여리고 착한 성격을 지닌 천생 여자였다. 목소리가 아직도 소녀처럼 곱고 문학을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영어선생님을 하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청년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고 , 신앙생활도 착실히 하며 살았다. 나는 그녀가 대학시절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여서 조금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눈물 없이는 '그 분'에 대해서 말하지 못할 만큼 그녀의 사랑은 지순 지대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는 후일 '그 분'의 마음을 얻었지만, 정작 결혼은 다른 사람과 하였다. 그 복잡한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사랑이 곧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는 그녀 역시 피할 수 없었다.

학구적이고 성실했던 남편은 어릴 적 상처가 치유되지 못해서인지 조기퇴직을 한 후 술을 마시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술이 취해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케케묵은 과거를 들먹이며 어머니를 원망했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 재혼을 하셨다. 

인간은 어떤 사고를 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건강이 좋아지기도 하고 악화되기도 한다. 당뇨병에 알코올 중독, 그는 의처증까지 발동하였다. 길거리에서 그녀가 단골 약국 의사에게 인사만 해도 그것을 트집잡아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나 맑은 정신일 때는 그도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왜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대학원을 몇 개나 수료하며 공부했던 남편이지 않은가! 그러나 술에 의존했던 그는 나날이 몰락해가고 있었다. 아내와 자식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추한 모습에 얼마나 절망했겠는가!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 더는 그를 감당할 수가 없어. 술만 마시면 행패가 심해." 

"그는 환자잖아. 이제는 헤어질 수도 없는 일이잖아. 조금만 더 참아.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이미 그는 맞서서 저항할 대상인 아닌 환자인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참을 수 없었다면 진작에 그를 떠나야 했었지만 자식을 셋이나 낳을 때까지는 그도 좋은 남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나아지기만을 기대하며 자식 키우는 일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생활비가 모자른 그녀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던 직장을 강사로 다녔다. 그 뿐 아니라 퇴근 후에는 자기 아들들을 끼워 과외수업을 돌아가며 할 만큼 최선을 다한 열성 엄마였다.

나는 전에 그녀가 남편의 독선에 대해서 불평할 때 맞서서 저항하며 네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소용없다는 듯이 아이들이 있는데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다고 하였다. 아마도 싸울 시간조차 없을 만큼 바빴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투쟁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 있던가!  

두 달 후 오십 중반의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세 아들들 앞으로 자산관리를 해 놓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마도 가엾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더욱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 이 남자는 조석으로 사랑공세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펄쩍 뛰었던 그녀였지만 남편이 사라지고 허전했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마치 소녀처럼 그의 사랑고백에 빠져들었다. 내가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의 메세지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낙없는 '소년·소녀 만나다'라는 영화 제목이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은 아니다. 가정있는 사람이잖아? 가볍게 만날 수 있는 정도가 넘었어" 나는 그녀를 말렸다.

"그럼, 내가 혼자 살아야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 그리고 왜 혼자야. 네가 믿는 하느님도 계시고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친구들도 있고... 죽은 남편한테 질리지도 않았어? 정 못 헤어지겠으면 이혼하고 온 뒤에 다시 만나면 되잖아."

백 번 옳은 말을 한들 이미 마음이 기운 그녀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내가 보기에는 무엇하나 마음 갈 구석이 없는 늙은 남자였다.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난 것은 그녀가 그에게 돈을 준 일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려서, 또는 병들어서 베푼 돈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하겠지만, 그의 아내가 현금 일억(십여년 전이니 억! 소리 나는 금액이다)을 주면 이혼하겠다고 해서 8,000만원을 해 주었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는 부동산외에 그만큼 현찰을 가진 게 없어서 마음이 급한 친구가 마련해준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이런 명분 없는 일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네가 일억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미쳤구나. 돈으로 늙은 남자를 산 거네. 그 인간 정말 나쁜 놈이다."

나의 거르지 않은 직설에 친구는 내심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금방 돌려준다고 했어. 그리고 그 분 곧 이혼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구! 이 거 내 친구 맞나? 

그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딸을 시집 보낸 후에도 이혼하지 않았다. 아니 인간이라면 어려운 시절 만나서 자식 낳아 기르고 내 부모님 모시고 산 조강지처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이혼하길 바라는 친구가 정상이 아닌 일임에 분명했다.

아무튼 그 후로 그의 아내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맘편히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돈을 돌려받았는지? 어이없는 이 일에 대해서는 아예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받든지 말든지 그녀의 돈이기 때문에 상관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남편이 남기고 간 부동산 일을 하느라 발이 닳게 돌아다니는 와중에 그는 새자동차를 사서 그녀를 태우고 나들이를 다니는 모양이다. 그녀는 늘 똑같은 웃음을 띄고 다른 곳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 게시판에 자주 바꾸며 자기애를 표현했다. 

 

학창시절 항상 내 손을 꼬옥 쥐고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면서 학교를 오갔던 친구. 내가 지방에서 근무해 자주 만날 수 없을 때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수많은 만남이 있었던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서로 다른 성격으로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라도 만나면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인거다. 그러나 이년여 걸친 코로나 감염을 조심하며 만나지 않았다. 꼭 방역 때문이었을까? 그 이전부터 아들 결혼식 때나 보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에 그녀를 포용하는데 인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녀로서는 부동산 일을 하면서 쉬는 날이면 그를 만나느라 친구에게까지 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나이들어 힘들었는지 부동산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산이 넉넉하다. 나는 그녀와 여행을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말만 그러자 했을 뿐, 길을 나서지는 않았다.

마음을 내어 얼마 전 만나기로 했는데 허리가 많이 아프다며 담에 보자 한다.

함께 만나던 동창 친구들과의 왕래도 끊고 친했던 친구와의 만남도 하지 않는 그녀를 이해하기 어렵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내가 그녀의 속을 어찌 다 알겠는가!

본의 아니게 그녀의 마음을 때론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본인 앞에서 바른 말하는 게 뒤에서 욕하는 것 보다는 낫다. 진심으로 그녀를 염려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허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덮어주며 정을 나누는 사이가 친구일 것이다.

무상한 세월이다. 친구가 부디 건강하고 남은 여생을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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