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문학, 종교, 철학, 심리학

채식주의자

나무^^ 2024. 11. 24. 14:48

 

지은이 한 강     펴낸 곳 창비

 

* 이 작가의 책을 읽고 싶었는데 다른 책들을 읽느라 미루었던 차라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자 바로 사서 읽어보았다.

왠지 작가의 내면적 고통이 절절히 느껴지는 듯한 심정으로 책을 덮었다. 주인공의 이미지가 작가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듯 했다. 그 절실한,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내면적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라야 공감할 수 있는 글이다. 심심하고 담백하지만 충격적인 문장력이었다.

 

'채식주의자' 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가 움켜쥐고 있었던 작은 동박새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영혜 남편의 시선으로 본 아내의 괴기스럽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 이 비현실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위의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인간이 거부하기 위해 발버둥쳐도 숙명적으로 지닌 벗어날 수 없는 폭력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몽고반점'에서는 영혜 형부의 시선으로 글이 이어져간다. 비디오 작업을 통해 창의적 예술 작품을 시도하는 그는 몽고반점이라는 매체를 통해 영혜에게 관심이 가고, 위축되었던 예술혼을 불태우며 그녀와 후배의 나신에 화려한 꽃송이들을 페이팅 한다.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시트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사십년 가까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찬란한 희열이, 몸 속 알 수 없는 곳에서 조용히 흘러나와 자신의 붓끝에 고이는 것을 그는 침묵 속에서 느꼈다. 가능한 한 오래 그 희열을 지속시키고 싶었다. 목까지만 조명을 받아 캄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허벅지 안쪽을 붓끝이 스쳐갈 때 떨림이 전해져 오는 것으로 미루어 예민하게 깨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리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 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 빛을 보았다... 영원히, 이 모든 것이 영원히......라고 그가 견딜 수 없는 만족감으로 몸을 떨었을 때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삼십분 가까이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 이따금 입술을 떨며, 줄곧 눈을 감은 채로 예민한 희열을 몸으로만 전해주던 그녀였다. 이제 끝내야 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를 안은 채 캠코더로 다가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전원을 껐다.'

언제나 날고 싶었던 그는 현실에서 나가고, 그들을 맞닥뜨린 그의 아내는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가 화자이다. 그녀는 동생을 면회하려가서 사백년쯤 되어보이는 고목을 바라본다. '맑은 날에 수많은 가지들을 펼치고 햇빛을 반사하던 저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는데, 비에 잠긴 오늘은 할말을 안으로 감춘 과묵한 사람 같다. 늙은 밑둥의 껍질은 흠뻑 젖어 저녁처럼 어둡고, 잔 가지의 잎사귀들은 말없이 떨며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형상 위로 귀신처럼 겹쳐지는 영혜의 모습을 그녀는 조용히 쏘아본다.' 그녀는 동생의 음식을 거부하는 광기어린 행동들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 동시에 배어드는 이상한 평화를 느낀다.

동생에게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삶과 죽음, 영혜는 먹는 것을 거부하며 나무로 거듭나고자 하고, 언니는 이 모든 게 꿈처럼 깨어나길 바란다. 현실과 이상의 충돌은 작게, 또는 엄청나게 부딪히며 각자의 삶을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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