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문학, 종교, 철학, 심리학

점원

나무^^ 2024. 11. 19. 17:48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 이동신 옮김

 

* 작년에 사놓았던 책을 이번 여행하면서 가져가 읽기 시작했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이끈 거장' 이라는 표지가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유대인 작가의 글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인간다움이 사라져가는 각박한 세상, 작가는 선량한 유대인 식료품점 가게 주인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점원이 함께 느껴가는 윤리 의식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글을 취미로 쓰는 나는 작가의 탁월한 묘사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길고 어두운 터날처럼' 손님을 기다리는 식료품점에서 주인 모리스는 21년간 성실하게 버티었다. 매상이 적어 손님을 기다리는 일은 아주 지루하고 힘든 일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다. 정신 없이 바쁠 때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향한 길을 지치지도 않고 걸어간다. 모리스는 착실한 딸 헬렌과 잔소리 많은 아내 이다와 매일 똑같은 날을 거듭하다가 하루는 강도들이 들이닥치고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 

'옳은 일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었다.' 가게를 제때 팔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아내의 성화를 견디고, 딸이 벌어다 보태는 생활비를 받아 고지서 금액을 갚아나가는 궁색한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강도까지 당한 고통스러운 삶!  

'모리스는 권총이 내려오는 걸 보면서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엇나간 기대, 끝없는 실패,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시간, 얼마나 남았는지 차마 셀 수조차 없는 이 모든 것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미국에서 많은 걸 바랐지만 거의 얻은 게 없었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헬렌과 이다는 그보다 더 가진 것이 없었다. 그가 두 사람을 속인 거였다. 그와 이 피를 빨아먹는 가계가. 비명도 없이 그는 쓰러졌다. 그 날에 딱 맞는 결말이었다. 그게 바로 그의 운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더 좋은 운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애썼지만 남보다 불행한 자신을...

 

몸이 완쾌되지 못한 채 일하는 모리스를 지켜보던 프랭크는 얼른 그를 도와주며 차츰 그의 가게에서 기생하게 된다.  모리스는 오갈 데 없는 그의 도움이 고맙지만 점원을 둘 형편이 되지않아 그를 거절한다. 무위도식하며 떠돌던 이탈리아인 프랭크는 양심의 가책으로 그를 돕고자 한다. 자신도 그런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램까지 지니고... 경험이 필요하다면서 숙식 제공 외에는 임금을 바라지 않고 가게를 쓸고 닦으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비유대인들도 가게에 오면서 매출이 조금 늘어나지만 아내 이다는 극구 반대한다. 딸 헬렌을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불안하고 비유대인인 게 싫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모리스를 타격하지도 않고 물을 주는 등 악의가 없었지만 세 명의 강도 중 한 명이었다. 성자를 동경하는 그는 모리스를 도와 죄갚음을 하려고 마음 먹지만 일은 순리대로 풀리지 않는다. 날아가는 작은 새 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외로운 처지의 헬렌에게 접근해 보지만 희망이 보이던 관계도 틀어지고 만다. 도서관에서 만나곤 하던  그녀의 권유로 세계 명작을 읽게되고 감명을 받는다. 그녀에게 주려고 그의 전재산을 털어 섹스피어 책과 값비싼 목도리를 선물하지만, 일이 진전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그녀는 그 돈이 그에게도 대학을 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반품하라며 거절한다. 그는 절망하며 그의 감정과 함께 선물을 쓰레기 통에 버린다. 순수한 그에 비해 타산적인 그녀가 대비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그는 야간일까지 하며 그녀가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생활비를 가게 금전등록기에 매달 넣는다. 

'그는 겉모습보다 무언가를 더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걸 숨겼고, 그가 가지지 않은 것도 숨겼다. 마술사는 한 손으로는 카드를 보여주고, 다른 손으로 그 카드를 연기로 만든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바로 그 순간,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는 순간, 그 말이 진실인지 궁금해졌다.' 점차 그에게 마음이 가는 헬렌이 그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며 또한 망설임이었다.

'그는 종종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고 왜 그 말에 그처럼 마음이 움직였는지, 왜 그 말이 북을 두들기는 북채인양 머릿속을 쾅쾅 두들겨 대는지 의아했다. 자기 절제라는 생각과 함께 그 말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ㅡ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원한다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후회로 이어졌다.ㅡ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성에 점진적인 누수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걸 멈추려고 까딱하지 않았다는 후회였다.' 그의 위선과 금전등록기에서 돈을 훔치던 나날을 후회하며 진정으로 변화하고 싶어했다.    

 

눈이 내리는 추운 날, 가게 앞 눈을 치우고 폐렴에 걸려 병상에 누운 모리스는 죽은 아들을 꿈에서 만난다.  '내 인생을 바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그 진실이 천둥처럼 몰려왔다.'  나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며 삶이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였음을 깨닫는다. 진정한 유대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타자를 향한 신롸와 책임을 얼마나 지니고 살아갈까? 생각해보게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만이 타자를 향한 윤리성도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 프랭크의 결정은 이 소설을 완성시키고 감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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