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화려한 무슬림 수영복

나무^^ 2005. 8. 22. 20:58

 

 

*이데일리 홍정민기자의 '인기 끄는 독실한 이슬람 여성 수영복'에 대해서 읽으면서 재미있었다.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 내용을 대충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몸 전체를 감싸는 옷과 머리에 딱 맞는 두건으로 돼 있으며 긴 조끼까지 입으면 전체 `패션`이 완성된다.>
 터키의 인기작가 레아 무흐타르는 최근 한 신문 칼럼에서 "그렇게 이상한 장면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다"고 언급, `이슬람식` 수영복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수영할 때 서구식의 간편한 수영복을 입고, 상의를 벗어젖히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슬람식 수영복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평론가인 아흐메트 하칸도 한 신문에서 이같은 수영복이 '멍청하고 품위없고 이상하다'고 표현하면서 '정숙한 여성들은 이상한 옷을 입고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고 차라리 수영을 하지 말라.'고 주장해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현재 터키의 모든 정부 기관과 학교에서는 이슬람 스타일의 두건 착용이 종교적인 투쟁의 상징이라며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논란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슬람 스타일 패션의 성공요인이 터키 종교인들의 신분상승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터키의 이슬람 문화에 대해 저술했던 보스톤 대학 인류학자 제니 B. 화이트는 '신흥 이슬람 부유층들에게 옷은 신앙심보다는 지위나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배경이 무엇이든, 이번 논쟁이 터키 최대의 이슬람식 수영복 제조업체 `하세마`의 메흐메트 사힌 사장에게 효과적인 광고 수단이 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는 지난 93년 로스쿨 재학시절 첫번째 `정숙한(modest)` 수영복을, 그것도 여성이 아닌 남성을 위해 만든 인물이라고 한다.

당시 사힌이 제작한 수영복은 독실한 무슬림 학생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사힌은 학업을 중단하고 여성 수영복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이슬람 상류계층에서는 디자이너가 제작한 명품 두건도 흔하다.

버버리는 터키 총리 부인이 즐겨 착용하는 브랜드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의류업계만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터키 해안의 종교 분리 해변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 `금주` 호텔도 성행하고 있다.
이슬람 신학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히다예트 스프카틀리 턱셀은 이슬람 스타일의 수영복이 종교적으로 독실한 터키인들에게  `다른 어느 나라 시민들처럼` 해변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줬다고 말한다. 그는 세 벌의 `하세마` 수영복을 갖고 있는데 '매우 편하다.' 고 하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패션 사진작가인 제이넬 아비딘 아굴은 한술 더 떠서 '이런 수영복이 섹시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는 '여성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에로티시즘이 있다. 발목만 살짝 보이더라도 누구나 그걸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 사진을 보면서, 그들이 고집하는 시대착오적 유행이 본질보다는 허영심에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모두가 훌떡 벗어제치는 세상을 아주 더디게 개화해가고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사진의 여성들, 아름답지 않은가? 

충분히 신비한 에로티시즘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근데 난 유명한 터어키 해변에서 이런 여성을 한 사람도 보지는 못했다. 

 

무슬림 여성. 그들의 이면에는 굴욕과 학대 속에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기 위해 오랜 세월 지켜져 온 전통을 거부하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이슬람 문화권의 영화를 몇편만 보면 대번에 알 수있다. 기억에 남는 영화 제목이 '내가 여자가 되던 날'이였나? 그 외에도 많다.

 

결국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처럼 부자에게 시집가서 자유대신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사는 일이나, 물질적 풍요나 남편의 보호를 벗어나 심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자 하는 일이나 무엇이 더 옳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하는 능력의 문제이며, 결국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성격과 취향, 그리고 능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감당할 만큼만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덜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근데 제주도 해녀들 잠수복보다 좀 더 컬러플한 차이지 비슷하다. ㅎ

 약을 한웅큼씩 먹으며 잠수한다는 우리 해녀들, 그들을 찍은 사진에서는 빈곤하지만 질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린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에 취해서 그 이면을 보는 일에는 소홀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