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비가 내리는 아침,
아파트 담장 밑 계단마다 떨어진 물기 어린 진분홍 찔레꽃잎이 곱디곱다.
지난 밤 꿈에 온 순희는 아주 말짱한 모습으로 '이제 다 나았어'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호주로 이민 간지 십여년이 훨씬 넘었다. 마지막 그녀를 보며 눈물짓던 기억이 생생하다.
순희는 나와 한 살 터울의 외사촌 동생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이웃에서 함께 놀며 자랐다.
나보다 키가 크고 예뻤던 그녀는 눈이 크고 매우 착했는데 가끔 넘어지곤 했던 건,
그녀가 어릴 때 뇌막염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달리기에 약하였다.
그러나 별탈없이 소녀시절을 보내고 여고를 졸업한 후 취직을 했다.
친척이 별로 없고, 내가 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므로 명절 때 외에도 나는 외갓집을 가곤 했다.
여자 형제가 없는 나는 그녀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지만 이어지는 바쁜 생활에 그녀를 자주 볼 수 없었다.
어느날, 스무살이 조금 넘었는데, 그녀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사무실에 드나들던 사장의 친구, 해군 소령인 노총각(그때는 서른이 넘으면)의 눈에 콕 찍힌 것이었다.
열 한 살 나이 차이, 나는 열 살 차이나는 좋아했던 큰오빠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결혼을 하고 첫 애를 낳은 이후부터였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녀는 남편의 자가용을 타거나 아예 외출을 삼가기 시작했다.
'순희야, 그럴수록 더 많이 걷고 운동을 해서 다리를 튼튼하게 해야 돼.' 내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던 그녀는 남들에게 장애가 있는 것을 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그녀가 세상을 떠나나보다 생각되어 그녀의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후
'누나, 조금 전에 전화 걸어보았는데, 마비가 입까지 진전돼 이젠 말도 하지 못한대요. 얼마 못 갈 거 같아요.'
나는 그녀에게 전화도 걸지 못한 채 그녀를 생각만 하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몸이 불편한 가운데 둘째딸을 낳았고 그때부터 외숙모는 함께 살면서 그녀의 가족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년 전 외숙모께서 귀국하시고, 잠시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나셨다.
누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면 눈물이 앞을 가려 나는 그녀를 자주 찾아보지도 못하였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바쁘고 고된 내 생활에 묶여 그녀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이 맞는지, 그녀를 거의 잊은 채 살던 중, 작년에 한 번 그리고 이제
꿈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이 먹지 않은 처녀시절의 고운 모습 그대로 그녀는 나를 찾아왔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긴지 여실히 보여주는 순희는 남편 덕에 공기 좋고 복지시설이 좋은
호주로 가 십여년을 넘게 더 살면서, 그녀의 가족을 부양 아닌 부양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그녀를 위해 나오는 요양비가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녀의 큰 딸은 이미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둘이나 낳았다고 하니, 순희는 세상에 나온 소임을 다한 것이다.
그 부실한 몸으로 자녀를 여기보다는 살기 좋은 그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으니 어미로서도 장한 일이다.
그녀를 사랑한 남편의 고된 여정이 몹시 측은했지만 그는 끝내 아내를 버리지 않고 돌본 장한 남편이 되었다.
세상의 이치란 참으로 오묘하여 모자란 이는 채워주고 넘치는 이는 덜어내어 살게 한다.
이것이 욕심을 내려놓으며 살 수 있는 조화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찬장에 있는 그릇 중에는 지금은 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색이 바랜 법랑 밥공기 두 개가 있다.
'엄마는 내 꺼 보다 더 좋은 걸 사주네.' 내가 결혼할 때 외숙모가 선물로 사준 그릇 세트를 보면서
순희가 샘을 냈었다. 외숙모는 웃으면서 '점점 더 좋은 게 나오니까 그렇지.' 하고 말씀하셨다.
큰 불평없이 착하게 존재했던 순희의 병들고 낡은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나가겠지만,
그녀로 인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감사하는 겸허한 마음을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늘 준비했을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것이다. 그녀가 의심없이 믿은 하나님에게로...
'순희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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