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09. 11. 30 (월) 영남일보
전쟁에 있어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가장 뚜렷한 방법은 깃발을 내어 창에 걸어 두는 일이며,
이런 깃발은 반드시 군사의 가장 선두에 두어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전쟁의 명분을 밝히거나
혹은 집단의 특색을 나타내는 일을 한다. 이 때 사용하는 깃대는 대부분 대나무 막대기로, 길이는 12자인데
대나무의 속 흰 부분을 제거한 나머지 푸른 껍질만을 취하여 만든 단단한 대나무 몽둥이였다.
이런 까닭에 군사의 맨 선두에 세워 둔 깃발을 꽂는 막대기가 곧 전쟁의 시작이라는 뜻에서
군사를 풀어 상대를 공격하는 일을 투입(投入)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공격한다는 뜻은
일단 헤아려 친다는 의미로 '工'(헤아릴 공)에 '攵'(칠 복)을 붙인 '攻'(물리칠 공)에 다시 '軍'(군사 군)과 '投'(던질 투)를
붙인 '擊'(물리칠 격)을 합쳐 '攻擊하다'라 하였다.
상대를 치고 안치는 일은 우선 아군의 병력과 적군의 병력을 제대로 헤아려야 함은 물론이요,
상대를 치는 일은 깃발을 앞세우고 힘찬 소리를 내어 상대를 일단 기압하고 힘을 모아 일시에 온 힘을 다해
쳐부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깃발'이란 군사들의 '사기'(士氣)를 높이는 중요한 상징물이 되기 때문에
'기를 높이기 위해 앞서 세운 것'이라는 뜻에서 '깃발'(氣發)이라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깃발'을 날리면 이기고,
'깃발'이 땅에 떨어져 버리면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깃발에 쓰는 것은 힘센 동물을 그린 그림이거나 또는 그런 동물을 글자로 쓴 경우가 많으니,
예를들면 '龍'(용 용)자를 쓰거나 '虎'(호랑이 호)자를 쓴 깃발을 세우거나 또는 곰을 그린 깃발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이기고 지는 일은 그 집단의 생명을 건 큰 일이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는 순서나 내용에 따라
정도를 높이기도 하고, 때로는 낮추기도 할 필요가 있다. 마치 높은 계단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 정확히 오르는 길은
오르는 것만을 능통한 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직 힘을 하나로 뭉쳤다가 단숨에 오를 수 있으면 더욱 좋겠으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힘을 쓰는 척 하면서 힘을 아껴 상대의 힘을 뺀 뒤에 칠 수도 있고, 어느 경우에는 아예 지는 척 하다가
상대의 허점을 노려 칠 수도 있다. 이처럼 '깃발'을 앞세우는 일도 여러 방법이 있다.
다만 '깃발'을 세울 때 세우고, 숨길 때에 숨길 수 있는 전술 전략이 적중해야 상대를 이길 수 있다.
또한 '깃발'을 앞세워 싸우는 일만이 능통한 일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도 있다.
기를 쓰고 앞장서서 싸우기 보다는 오히려 상대가 먼저 기를 쓰도록 유도하여 자신은 슬그머니 낮추고 낮추다 보면
오히려 기를 다 써버린 상대가 기도 빠지고 맥도 빠진 상태가 되어 기진맥진(氣盡脈盡)한 나머지 내가 파놓은
겸손의 합정으로 기어들 때가 있다. 이런 뜻에서 싸움도 '段'(계단 단)이 있으니 "굳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길이
가장 잘 이기는 길이다"(不爭而善勝)라는 노자의 말씀은 가장 단수(段數)가 높은 말씀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말씀인가. 잘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