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09. 12.. 7 (월) 영남일보
세상에는 반듯한 것과 굽어진 것이 있는데 대개의 경우 굽어진 것은 반듯한 것보다 오래 갈 수는 없다.
우선 크게 동물과 식물 두 종류를 두고 살펴보자. 굽어져 기어다니는 동물들보다는 반듯하게 자라는 나무들이
훨씬 오래 살고, 같은 나무 중에서도 굽은 채 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무보다는 그래도 빳빳하게 자라는 나무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한 오래도록 산다.
그렇기 때문에 물을 몸 속에 담은 채 반듯하게 살아가는 나무들을 일러 '식물'(植物)이라 하고,
물을 몸속에 담은 채 사방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일러 '동물'(動物)이라 이른 것이며,
동식물을 포함해 물은 곧 생명을 유지시키는 원천(源泉)일 수밖에 없다.
높고 낮은 땅에 각각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그 어떤 나무도 근본적으로 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날고 기는 그 어떤 짐승도 샘을 찾아 물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같은 언덕일지라도
촉촉한 물기를 지닌 생명의 언덕을 '原'(언덕 원)이라 하였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同價紅裳)라고 비탈진 언덕배기에 위태롭게 서 있는 굽은 솔보다는
평원에서 반듯하게 자라는 곧은 솔이 훨씬 잘 자라기도 하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으니 그 까닭은
뿌리부터가 든든하고 줄기 또한 반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뜻에서 '立'(설 립)은 사람이 땅 위에 선 모양을
그대로 본뜬 글자로 '서다'는 넓은 뜻을 지닌 글자지만 '竪'(세울 수)는 굽어진 것을 손써서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다'는
뜻을 지닌 글자다.
나아가 '堅'(굳을 견)은 마른 흙을 모아다가 물에 개어 덩어리지도록 하나하나 쌓아가며 '굳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 글자며, '賢'(어질 현)은 본디 재물을 많이 모아 굳힌 상태, 즉 '다재'(多財)를 뜻한 글자였다.
그러나 계속해 재물을 굳힐 수는 없기로 일단 굳혀진 재물을 잘 쓴다는 뜻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모여진 재물을 더욱 굳히는 방법은 이기적인 심성(욕심)에서 벗어나 재물을 지니려고만 들지 않고
보람있게 쓸 수 있는 자세로 돌아가 높은 도덕적 자각을 얻는 것이고, 이를 일러 '어질다'라는 뜻으로 삼게 되었다.
따라서 의식만의 자각을 참다운 자각이라 말할 수는 없다.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부정적 요소를 과감히 버리고,
그 대신 올바른 자세로 행동하는 실천적인 용기가 뒤따라야 참으로 '어질다'고 이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 보아도 버젓한 행동을 잃지 않는 이를 어질다 이를 수 있고, 아무리 속을 들여다 볼지라도
잡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는 이를 일러 성스럽다 말할 수 있다"(景行維賢, 剋念作聖·천자문)는 말은
세속의 티끌 밖을 밝게 나타낸 말씀이다. 굳은 것은 제 스스로 녹기도 하고 한편 불을 얻어야 녹기도 하나
아무튼 녹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깊은 이해(耳)와 뜨거운 설득(口)'이면 가능하다.
딴에는 자신을 다 버린 바보가 나서야 될 수 있는 일이니 이런 바보를 일러 '聖'(성인 성)이라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