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에서 깨다 >
나무
11. 이슬비
학교에서 돌아오던 계집아인 우산이 없었다
뛰어가는 계집아이 불러 우산 씌워 준 소년은 셋방 사는 까까중
늙은 어미는 함께 집에 온 두 아이를 잠시 쳐다보았다
둘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셋째 오래비는 눈을 흘겼다
다음 날 집 앞에서 까만 교복 까까중이 환하게 웃었다
계집아인 어제 일이 고마워서 마주보고 웃었다
심술궂은 오래비가 까까중을 다짜고짜 때렸다
놀라서 말리는 계집아이를 밀쳐내고 때렸다
계집아인 제 편이었던 죽은 큰오빠 생각이 났다.
12. 졸업식 하는 날
눈발이 날리는 운동장에 줄 맞춰 앉아서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며 모두 훌쩍거렸다
펄펄 날리는 눈처럼 정든 시간이 사라져갔다
늙은 어미와 양복입고 젊어보이는 아비와
공작처럼 멋 부린 선생님과 사진 찍었다.
정든 학교를 뒤돌아보며 나와서 짜장면을 먹었다
늙은 어미는 삼류극장에서 '유관순' 영화를 보여주었다
계집아인 나라 잃은 서러운 시간 속에서 한없이 울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유관순처럼 살아야지 마음먹었다
자물쇠가 나동그라진 문 그새 도둑이 왔다갔다.
아래층 가방가게에서 쌓아놓았던 계집애가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트렁크 세 개에 온 식구 속옷까지 알뜰히 쓸어갔다
계집아이 입학하면 입을 헐렁한 중학생 교복도 가져갔다
늙은 어미의 긴 한숨 소리가 오래 남았다.
13. 기도문
매주 수요일 성경시간 과제로 내준 기도문을 검사한다.
목사 선생님이 언젠가는 갈 천국의 도장을 찍어준다.
소녀는 하나님과 마음 속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한 친구가 머리를 쥐어뜯다 소녀의 기도를 베낀다.
어린 소녀의 기도는 친구의 기도가 되고
친구의 기도는 또 다른 친구의 기도가 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다 아실 텐데...
소녀는 아비가 일거리 많기를 기도했다.
늙은 어미의 슬픔이 사라지길 기도했다.
자꾸 아픈 다리가 낫기를 기도했다.
공부도 아주 잘하길 기도했다.
14. 담임선생님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크고 기도도 잘하시던
미국 유학 갔다 온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달랐다.
그는 소녀를 '스마일!' 부르며 마주 웃어주었다.
아이들은 아닌 척 감추지만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기를 쓰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영어를 외우고 또 외웠다.
겨울방학 때 친구들과 선생님 댁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선생님이 책상 위 사진틀 속에 퉁퉁한 아줌마와 함께 있었다.
깜짝 놀란 소녀는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꿈쩍도 안 했다.
소녀는 선생님께 쓰던 편지를 책장 깊숙이 감추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해 단 한번 계근상장을 받았다.
마음 가득 채웠던 선생님은 다시는 책장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15. 노래하는 친구
꽃나무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는 고운 갈래머리 슬픈 얼굴
소녀는 한 점의 그림처럼 인상적인 그 애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한사코 마다하던 그 애가 노래를 불렀다.
천상의 소리인양 가득 퍼지던 맑고 고운 목소리
소녀는 멀찌가니 앉아 매일 그 애를 바라보았다.
공연이 끝나고 잘 생긴 남학생이 그 애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그애는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관 집 아들이라며 쓸쓸히 웃었다.
소녀는 까만 교복을 입은 단정한 소년이 그 애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순회공연을 떠나는 그 애를 배웅하는 공항에서 소년을 다시 보았다.
돌아온 그 애는 점점 더 말없이 창 밖에 떨어지는 낙엽을 내다보았다.
나는 '엄마가 싫어! 아니 그런 엄마는 싫어! ' 그 애는 울먹였다.
엄마가 다시 결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그 애가 학교를 오지 않아 소녀는 합창단 기숙사로 찾아갔다.
집에 다니러 갔다는 그 애 엄마 주소를 들고 다시 거리를 헤맸다.
극장 골목길에서 똘마니 녀석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나오는
그 애는 어린 창녀처럼 옷 입었다. 소녀는 못 본 척 지나쳤다.
그 애는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무대에서 갈채 받던 지저귀는 새처럼 고았던 목소리...
성전에서 노래하던 천사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맞았다.
그 애는 현실을 거부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처럼 사라졌다.
16. 무용시간
소녀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무용시간을 좋아했다.
허리를 곧게 피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맘에 들었다.
무용선생님은 소녀에게 무용반에 들길 권하였다.
단발머리를 길러 갈래머리로 땋고 춤추고 싶었다.
소녀는 운동복을 벗고 처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다리를 보았다.
눈물 속에 비친 두 다리는 서로 달랐다. 무용복은 그것을 감출 수 없다.
소녀는 무용반에 함께 들자는 친구에게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춤추는 대신 절지 않고 걷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17. 전학간 친구
얼굴과 몸이 모두 통통하던 그 애는 작가 희망생이었다.
소녀가 시험 공부할 때 그 애는 '데이비드 커퍼필드'를 밤새워 읽었다.
시험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오면서 그 애는 반짝이는 동그란 눈으로
시험문제 얘긴 한 마디도 않고 소설 속 이야기를 취한 듯 들려주었다.
어느날 그 애가 머뭇거리며 산부인과를 같이 가자 했다.
그 애는 불결한 언니 땜에 병이 난 듯 진저리를 쳤다.
'글쎄, 대낮에 그러고들 붙어 있는 거야. 홀딱 벗고!'
언니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애는 자신이 한 달 내내 생리를 하고 있었다.
그 애랑 대학 다니던 언니랑 모두 경상북도 집으로 내려가던 날
그 애는 웃으며 약속했다. 세계 최연소 유명 소설가가 될 꺼야
소녀는 글을 잘 쓰던 그 애의 소설책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 애는 지금도 발표하지 못한 소설을 쓰고 또 쓰는지 모른다.
18. 공중변소
소녀는 길거리 변소에 가득한 냄새를 이기기 위해
무심코 찢어진 잡지책 한 쪽을 읽어 내려갔다.
아름다운 숲을 묘사한 글이 결코 아니었다.
뛰쳐나온 소녀는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빨리 걸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기다렸던 친구가 쫓아오며 물었다.
'절대로 남자를 사귀지 않을 거야.'
'왜?' 영문을 모르는 친구가 물었다.
'...'
소녀는 어른들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길거리 공중변소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19.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
아이들은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을 책상 밑으로 돌려보았다.
언젠가는 맞게 될 첫날밤의 혈흔으로 가슴을 두근거렸다.
뚱뚱한 가정선생님의 거듭되는 목숨보다 귀한 순결은 빛을 잃었다.
조숙한 친구의 얇은 교복위로 비친 브래지어 끈에 시선이 머물렀다.
거울 속에 소녀는 봉긋이 솟는 젖가슴의 미약함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어느 봄날.
숨이 막힐 것 같은 까무잡잡한 소년의 첫 인상...
시를 외우던 소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소년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 솟구치던 오색분수가 까만 눈빛에 아롱지던 날
소녀의 오빠는 그들을 보았다. 외출금지령이 떨어졌다.
소년은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는 소녀를 보기 위해 교회에 갔다.
까만 교복을 입은 소년과 단발머리 소녀는 제과점에서
코끝을 마비시키는 콜라를 마시고 콩당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달빛이 가득한 밤이다.
교복을 벗어버린 소년과 소녀는 교회 대신 극장에 갔다.
'츄바스코'의 비극적 사랑을 눈물 젖으며 보았다.
소년 대신 무서운 엄마가 남산 도서관에 오고
소녀가 뛰어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은 길고 길었다.
작은 소녀를 날려버릴 것처럼 세찬 바람이 불고
날리는 흙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웃지 않는 소녀를 불러 편지를 건네주었다.
대학에 가면 더 좋은 남학생을 만날 수 있다며 웃었다.
소년의 변명은 상처 깊은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해 교회에서 돌아가는 길에 대학생이 된 소년을 만났다.
소녀는 그 날처럼 눈을 뜰 수 없어서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교회에 가는 그 길을 다시는 지나가지 않았다.
20. 사라지는 꿈
소녀는 여러 날 학교에 가지 못 했다.
학교에 간 날은 아침부터 엎드려 잠들었다.
출석 부르던 담임선생님은 소녀가 대답하자
웃으며 출석부를 덮었다. 소녀가 오면 다 왔을 거라고...
쉬는 시간 미리 도시락을 먹고 합창연습을 하러가던
소녀는 수시로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웠다. 위궤양이다.
공연 땜에 미루었던 시험공부 하느라 며칠 밤을 새우고
발목이 아파 걸을 수 없어 독한 마이신 주사를 연거푸 맞았다.
소녀의 얼굴은 퉁퉁 붓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교복 카라가 떨어져 나가는 만원버스에서도 절대 놓치지 않았던
큰 상자처럼 두꺼운 노래교본을 반납하고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소녀는 대학을 보내줄 수 없다는 말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울면서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대학은 꼭 갈거라고.
다음날 아버지 대신 돈 벌던 큰오빠는 교대를 보내주마 했다.
소녀는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원서를 들고 인천에 가던 날
바람은 불고 가슴은 겨울나무처럼 흔들렸다.
달리는 기차 밖 풍경은 자꾸만 어른거렸다.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시절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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