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피는 시절 >
나무
21. 노래하며 방황하며
을씨년스러운 교정엔 바닷바람이 끊이지 않고 불었다.
맨발의 건강한 여학생을 비웃는 교수님의 코메디도 끊이지 않았다.
고지식한 교수를 비웃는 학생들의 코메디도 지루해져 버린 날들이다.
깡소주를 들이키는 복학생은 한 끼 밥을 사먹을 돈이 없어 허기졌다.
가난한 그들은 산으로 바다로 몰려가 주체할 길 없는 젊음을 노래했다.
기차를 놓치는 날엔 한 시간 지나야 오는 기차 대신 자유를 즐겼다.
그녀가 종강하고 떠난 여행은 재시험을 놓쳐 재수강으로 넘어갔다.
배가 고파도 사랑하고 싶은 그들은 서로를 부등켜 안고 싶었다.
괜히 수컷 짐승들처럼 이웃학교 남학생들과 싸움질을 벌였다.
그의 애궂은 기타줄은 절망을 노래하다 깡소주를 들이켰다.
꼬리를 무는 애정 행렬을 그치고 그들은 학교를 떠나갔다.
학교 밖에서 인생을 배우던 몇몇은 교수의 코메디를 더 보았다.
졸업식 날 그녀의 오라비 둘이 와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발령을 받는 자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자로 나뉘어졌다.
지루하고 가난한 청춘은 스스로 아름답지 못했다.
22. 첫 키스
예쁜 친구가 선보인 남자친구 그녀 생일에 장미꽃 한아름을 주었다.
큰 오러비 결혼식에서 나란히 들러리 섰던 예쁜 친구가 어느 날
불쑥 그만두겠다고 빠진 동아리는 더 자주 즐겁게 열렸다.
어두운 밤 개구리 울음 울던 숲길에서
그녀의 작은 머리핀이 그의 손에 쥐여졌다.
기습당한 입술에 당황한 그녀는 예쁜 친구를 만났다.
그에게 관심 없다는 예쁜 친구의 콧방귀를 정말로 믿었다
그런데 예쁜 친구가 얼마나 상심했었는지를
그에게 이별하자 말했을 때 쓸쓸히 그는 말했다.
예쁜 친구가 그에게 애원했었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그들 모두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선물
이년간 이어진 그의 사랑 노래는 따스하고 달콤했다
존재의 결핍에서 벗어나려 방황하는 슬픔을 위안하였다
구속과 절망의 울타리를 단단히 쳤지만 떠날 때가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옷을 벗고 필요치 않은 순결을 선물했다
그의 감동도 그의 자부심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별하기 위해 그녀가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는 순결했던 그녀를 안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녀는 사라진 울타리 너머 자유를 찾아갔다
외투를 벗어던지고 겨우내 추위에 떨었다.
24. 슬픈 노래
끼 많은 그는 유명 연극배우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그의 미모와 슬픈 노래들이 여자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는 곳마다 어린 여자들의 유혹 어린 시선이 뒤엉켰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은 그는 다방에서 음악안내를 했다.
그가 틀어주는 점점 고조되는 'The Boxer' 노래를 들었다.
형이 연기하는 무대를 기웃거리며 찾아간 그를
마누라가 도망간 형은 한사코 쫓아내며 말렸다.
이래저래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는 등록금을 핑계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그의 무모한 미래를 걱정했다.
어느 잡지책에 난 잘 나가는 탈렌트 근황에서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한참 지난 어느 날
그녀가 근무하는 시골학교 운동장에 불쑥 나타나
어둠 속에 흰 이를 드러내며 빙긋이 웃던 그는
분주한 그녀의 손을 잡고 운동장 밖으로 나갔다
.
캠프 화이어 불꽃처럼 아이들 함성이 솟구치고
아기 아빠가 되었다는 그의 목소리가 묻힌다
이제는 꼼짝없이 돈벌이를 해야 하는 가장이 된
그의 아름다운 젊음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별의 입맞춤을 날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땅거미처럼 스며든 그는
한 무더기의 고등어를 싸서 그녀에게 안기면서
어두운 신작로 트럭에 기대서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슬픈 노래를 들으며 그녀는 먹먹히 서있었다
그 후 그의 꿈처럼 사라진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 푸른 웃음소리를 남기고...
25. 군에 간 청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러 가던 주간 다실 야간 술집
음향시설 쾌적한 넓은 홀에는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한적한 이른 시간 홀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래에 취하면
배고픈 그녀는 답답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눈에 띄게 잘 생긴 청년의 수줍은 미소를 보면서
알 수없는 그가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고궁에서 만나던 날 커다란 카메라에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자동차 정비소를 차릴 거라는 그의 소박한 꿈을 이야기했다
술집엔 절대 가지 않는 그는 주간 다실 야간 술집 웨이터였다
여자손님에게 처음 팁을 받은 날 세상에 나서 가장 슬펐단다
그는 학원 길목에서 돌아가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했다
농담처럼 친구들과 내기를 한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말죽거리 오빠 집에서 조카를 봐주고 있던 날
그가 달려와 아이 아빠처럼 조카를 안고 영화관에 갔다
그녀가 허릴없이 강원도 어미에게 가 있을 때
그는 동네 아이를 시켜 자신이 왔다고 알렸다
동네 밖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서있는 그는 배우 같았다.
그는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군에 입대한다며 그녀에게 편지해주기를 소망했다
그녀는 착한 그에게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꿈에 아래위 하얀 옷을 입은 그가 슬프게 보였다
놀란 그녀는 서점을 한다던 그의 친구를 찾아가 소식을 물었다
바텐더였던 친구는 양주를 따라주며 그의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사촌형 따라 올라와 잠시 머문 술집을 그만 두고 떠났듯이
그가 남루한 이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소식은 어디서도 다시 들을 수 없었다.
26. 길 위에 피는 꽃
어린 소년처럼 하얀 얼굴을 한 그는 수줍어했다
아침 여덟시 기차에서 자리를 맡아 놓고 기다렸다
맑은 샘물 같은 그녀를 만나는 그는 찬란한 햇살이다
그녀는 복사꽃 화사하게 핀 햇살 좋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를 따라 기차에서 내리는 그에게 감흥이 없다
일 년 내내 이어진 따스한 눈빛에도 출렁이지 않는다
그녀의 졸업과 함께 그녀의 자리는 사라졌다
비 오는 여름밤 그녀를 불러낸 다정한 왕자님은
그녀의 '어린 왕자' 이야기를 듣고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성을 보여주며 다섯 명의 공주들을 인사시켰다
돌아오는 철로에서 쥐가 난 그녀의 발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의 가슴에 큐비트의 화살을 쏘았노라 고백했다
결혼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어린 그녀에게
그는 달리는 기차를 올라타는 일보다 더 두려웠다
그녀는 아쉽지만 그를 그냥 달려가게 두었다
비 오는 여름밤이면 왕자님이 생각나곤 했다
아르바이트하는 그녀를 두 달 내내 집까지 따라오는
청년의 눈웃음에 못이겨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추운 그녀를 껴안았고 그녀는 뜨거운 정욕을 껴안았다
그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그녀가 떠나가던 날 거리의 낙엽처럼 짓밟혀 부서졌다
바다 한가운데 갈라지는 길을 따라 봉사활동을 가는 겨울
섬을 향한 긴 행렬을 따라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며 걸었다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친구의 짝사랑 연인을 따라 걸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며 오른 동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면
그녀와 함께 거닐던 형은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날렸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굴을 따 그녀의 입에 넣어주던 형은
친구가 미칠 듯이 사모하는 그에게는 여자가 있다며 머리를 저었다
그녀는 차마 눈물 많은 친구에게 그 얘길 해 줄 수 없었다
형이 좋아하는 여자는 또 다른 사내에게 미쳐있었다
모두들 피어나는 예쁜 꽃 추운 밤 불꽃처럼 사위어갔다
사내들이 모두 군대에 가고 그들을 위안하던 위문편지
그녀의 글은 형에게 위안 이상의 희망이 되어갔다
형은 제대도 하기 전 그녀에게 청혼했다
나는 처녀가 아니예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도 총각은 아니야 그래도 결혼하는 날 순결하게 널 안고 싶다
제대 후 형은 이년이나 기다렸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십여 년 세월이 흐르고 소설처럼 전철역에서 형을 마주쳤다.
그녀는 몹시 외로웠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형은 그녀를 안을 수 없었다
이제는 서로 다른 길위에서 멀어진 시간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27. 누나
여러 장의 음반을 무릎에 놓고 얌전히 앉은 그녀
맞은편 검은 교복 까까머리 남학생이 음반을 궁금해했다
그녀는 학예회 준비로 바쁜 병아리 선생님이었다
몇 일이 지나 그들은 다시 열차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약간 반항적인 눈빛으로 단추를 두 어 개 풀어놓은
모양새로 뜨거운 여름을 식히며 찬 쥬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주말수업을 끝내고 돌아서는 그녀의 귀를 울리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
불쑥 그가 운동장에 들어섰다 놀라는 그녀를 태우고 종로거리로 갔다
수많은 젊음이 작열하는 불빛과 함께 난무하며 뒤섞였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처음으로 수줍은 춤을 추어 보았다
고막을 울리는 음악소리는 제정신으로 앉아있을 수 없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밤 기차를 타고 시골로 가면
그녀의 작은 자취방은 꽁꽁 얼어있어 잠들 수 없었다
반사경을 단 곤로불에 손을 녹이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드는 밤 그는 그녀 옆에서 얌전히 잠들었다
새벽에 그녀는 도시락을 싸서 책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녀가 결혼하던 날 그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번도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누나처럼 시집을 갔다
군에 입대한 그가 첫 휴가를 나와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귀여운 갓난아기를 그의 팔에 안겨주었다
그가 한 여자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녀는 파경을 맞고 있었다
결혼을 회의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결혼을 해 보아야 해
이혼한 그녀가 아들과 사는 쓸쓸한 집에 갔을 때
그녀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연인처럼 그를 안았다
그녀가 새 연인을 만나고 술 취한 그를 거절하면서
그들은 달빛이 환한 문 앞에서 차갑게 헤어졌다
그는 친누나처럼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하는 듯 아랑곳 하지 않았다.
28. 그가 만든 생명
이 년 동안 자취생활은 협소하고 지루했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하는 낮이 지나가고 홀로 외로운 긴 밤
축음기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노래 수북한 책에도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벗어버린 따스한 외투처럼 조금씩 그가 그리워졌다
첫 키스를 하고 그녀의 순결을 선물 받은 그가 제대했다
상처받은 그를 찾아간 그녀를 보자마자 다시는 놓지 않았다
순진한 그녀는 죽음을 휘두르는 간절한 그의 말을 믿었다
피임을 비켜간 몸에 한 생명이 자라고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녀에게 청혼하는 남자를 모두 거절한 그녀는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29. 결혼하다
머리가 채 자라지도 않은 까까머리 제대병과
서둘러 날을 잡은 그녀는 어여쁜 신부가 되었다
흰 드레스를 입고 혼자 한없이 헤매던 지난 밤 꿈 때문인지
그녀의 몸에서 자라고 있는 두렵고 신비한 생명 때문인지
이제는 남편이 되는 그에게 속하는 부자유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슬픔이 그녀를 무섭게 휩쌌다
햐얀 눈이 뒤덮인 호수를 바라보며 눈을 뜨던 아침
그녀는 가슴에 스미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떨었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지만
가슴을 뜨겁게 흐르는 눈물은 당혹함이었다.
30. 아들을 낳다
사람들은 말했다 애가 애를 낳는다고...
조그만 그녀는 남산만한 배가 부끄러웠다
가슴을 치받는 아기의 발길질에 깜짝깜짝 놀랐다
더는 먼 길을 다닐 수 없어 일주일 미리 산가를 내었다
애는 왜 안 나올까? 예정일에서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침에 배가 조금 아프자 남편은 시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병원에 가거라 산통이 점점 심해지더니 두 시경 극렬해진다
그녀는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깜박 깜박 잠에 빠진다
이제는 내가 죽는구나! 순간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아기가 건강한가요? 그녀는 불안했다
3,2kg 건강한 아들입니다
살짝 찢긴 외음부를 꿰매는 따끔거림과 함께
안심한 그녀는 깊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잠꾸러기 그녀가 아들의 기척에 재빨리 깨어난다
산후조리차 온 늙은 어미는 다 살게 마련이라며 웃는다
신비한 생명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만지며 미소지었다
비로드천 처럼 보드라운 아기의 얼굴 손발에 입 맞추었다
늙은 어미는 뜨거운 방에 겹겹이 옷을 입혀
오뉴월에 아기는 온통 빨갛게 땀띠가 솟았다
바람 쐬면 안 된다는 어미 말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에 달려갔다
보름여 만에 교단에 선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직장 때문에 아예 젖을 물리지 말라는 시어미 말대로
아이 낳아 부푼 그녀의 예쁜 가슴은 젖을 말렸다
재래식 변소에서 고통스럽게 젖짜던 동료를 보고
악취에 놀라 그녀는 아예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다
그리고 두고두고 지금까지 그 일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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