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의 춤 >
나무
31. 자살
늙은 어미와 막막하기만 한 시간을 함께 살았다
우는 어린 아들을 돌봐주려고 그녀에게 오셨다
철없는 며느리를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오셨다
평생 지고 있던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오셨다
연수가 끝나고 집에 가기 싫은 그녀 친구와 잠들었다
길고 긴 밤을 보낸 그는 어제 지겹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멈추고 싶은 강한 충동을 더는 누를 수 없었다
순진하게 정의라 믿었던 선택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를 벗어나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불 꺼진 방처럼 어둡고 갑갑한 삶 아주 떠나고 싶었다
그는 피 흘리는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헤어진 손목은 꿰매지고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말없는 눈물은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늙은 어미는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딸을 떠났다.
32. 늙은 어미의 죽음
오십 평생 시부모 공양하며 자식들 뒷바라지하였다
며느리는 시어미가 해주는 밥 먹으면서도 웃지 않았다
남편만 똑 떠내 살고픈 며느리 종내 시어미를 밀어냈다
방학 때도 학원 간다며 손자들을 내려 보내지 않았다
시어미 보고픈 눈이 짓물러도 손주들을 보내지 않았다
피 흘리며 몸 바친 늙은 어미의 사랑이 사라지던 날
무심한 아비와 무정한 아들 어미의 눈물이 멈추었다
대성통곡하는 며느리의 마지막 배웅 요란하기도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물을 멈추고 분노를 깊이 숨겼다
늙은 어미를 사랑해야 할 시간이 모두에게 없었다
어미의 가슴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산 가족들인데
마땅히 갚아야 할 빚조차 놔두고 갑작스레 떠나셨다
그녀의 뇌리에 마지막 애끓음을 새겨놓고 떠나셨다
수많은 지인들이 올곧고 인정 많은 어미를 배웅했다.
32. 이혼하는 날
서류를 제출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후 두시에 다시 온다고 달라질 건 없다
초봄 쌀쌀한 바람이 목을 차갑게 휘감았다
새로 돋는 연녹색 잎들이 몸을 떨며 웃었다
그는 겉옷을 벗어 소름 돋은 그녀에게 입혔다
묵묵히 걷던 그가 꼭 이렇게 해야 돼?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렸다
한밤중에 낯선 여자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손을 떨며 지리멸렬한 그와 이별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거짓말 할 때마다
그녀는 점점 더 멀리 그에게서 달아났다
출근하는 아침 잠자리에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말없이 집 나가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릴 때마다
지겨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그녀는 수없이 그와 이별하며 또 이별했다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 주어질 결손이 싫어 참았다
더는 아들을 위해 견딜 수 없는 위기감이 차올랐다
부당함에 돌아버리느니 혼자 아들을 키우자 생각했다
문득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위태로운 자신을 보았다
그들은 번잡한 지하철 역 안 사람들 속에서 헤어졌다
그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차창 밖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시간을 보았다.
33. 어린 연인
반짝이는 붉은 메니큐어의 유혹으로 시작되었다
섬세한 손에서 느껴지던 슬픔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녀를 찾아 온 늦은 밤 새벽 햇살이 가득해질 때까지 이야기했다
그들 곁에서 놀다 잠든 귀여운 아들의 고른 숨소리가 평화롭다
그들은 아득한 어린 시절 즐거웠던 추억들을 끄집어 올리며 웃었다
돌아가는 문간에서 몸을 쓸어내리던 그의 손길 그녀를 전율케 했다
매일 밤 웃음소리가 전화기를 오가고 그는 성급하게 사랑한다 말했다
그녀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그의 나이를 세고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드러날 까 그의 곁에 다가가지 못한 채 그를 지나쳤다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랑은 행복한 절망이며 깊은 나락이었다
어린 아들과 물구나무 서는 그의 강건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슬프고 외로운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최선의 오늘이었다
바람 드센 밤이면 숨 막힐 듯 두려움으로 도망치는 그녀
그는 달려와 좌절한 심신을 감싸 안으며 둥지를 틀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속 깊은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은 더욱 찬란하고
헤어져야 하는 만남은 더욱 강렬한 욕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들을 돌보는 그녀는 처연히 이별을 말하고 그를 거부했다
함께 갈 수 없는 그를 사랑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고 싶었다
34. 선택
그는 어린 여자들을 모두 외면했다.
어린 여자들은 눈물 흘리며 사랑을 전했다.
뜨거운 불씨처럼 타오르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
길들지 않은 한 마리 짐승처럼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가고 싶은 그녀에게
미심쩍은 먼 훗날은 이별의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으나
어린 아들의 손을 놓아야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비가 버린 가엾은 어린 아들의 새 아버지가 필요했다
결혼을 앞세운 그의 설득이 계속될수록 그녀는 힘을 잃고 지쳐갔다
아들은 아비에게 주어야한다는 그의 아버지 완강한 반대는 지당했다
아들의 참을 수 없었던 아비에게로 어린 아들을 보내야 하는
참담한 그녀는 오래도록 신음하며 앓았다.
이제 김포로 순환근무 발령을 받아 떠나면
시댁에서 살아야 할 그녀는 아들의 손을 놓아야 했다
조부모가 계시는 어린 아들이 마땅히 가야할 집으로
부실한 아비가 사는 곳으로 아들을 데려가 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몸은 떨어져도 마음은 떨어져 살지 않는다는 어미의 약속을 믿고
어린 아들은 아빠가 있는 집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갔다
35. 나의 아내여
늙은 어미가 남겨준 새하얀 모시 한복을 지어 입은
그녀의 뒷머리에서 마가렛 하얀 안개꽃이 피어났다
잘 생긴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환하게 피었다
열두 명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질도 떠들썩했다
조용한 산사에서 올리는 그녀의 두 번째 결혼식
어느 땡중의 주례사 사이로 환하게 들어온 햇살은
오래된 조화에 낀 먼지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가 원한 지인의 애절한 사랑이 담긴 절이었다
처음 본 시고모의 찌를 듯이 쳐다보는 눈초리
굽은 허리로 딸을 쳐다보는 아비의 선량한 눈과
절이 싫다며 오지 않은 기독교인 오빠 내외의 거부
동료들의 진심 어린 축복에도 그녀를 쓸쓸하게 했다
그녀는 열두 명 사내들에 둘러싸여 슬픈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준비 없이 생각난 그 노래를 떨리는 목소리로 곱게 곱게 불렀다
야생마처럼 거친 그들에게 그녀는 한 떨기 들꽃처럼 연약해 보였다
어여쁜 나의 아내여 그는 영원한 마음으로 가엾은 그녀를 안았다.
36. 보고 싶은 아들
어린 아들이 그린 우스꽝스러운 그림들이
그가 바르는 새 벽지 속으로 쓱쓱 사라진다
그녀의 가슴도 조금씩 잘려나가는듯 아프다
그의 수많은 책이 그 벽을 가득 채운다
그녀가 믿었던 세상이 조금은 사라졌다
백점 맞은 걸 자랑하는 어린 아들 목소리
아들을 칭찬하는 조부모님 흐믓한 목소리
작은 새처럼 까만 눈 눈웃음치며 손 흔든다
돌아서 뛰어가는 아들 모습이 뿌옇게 흐려진다
그리움도 지치면 잠이 드는가
몹쓸 인연 죽으면 끝이 날까
내일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오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글픈 목숨
누구를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어린 아이들과 종일 함께 하며
눈물이 소용없는 날들이건만
오늘 저 하늘과 저 구름과 저 바람은
어린 아들이 있는 그 곳에도
그녀가 있는 이 곳에도 저토록 아름다우니
떠나보낸 작은 새여 이 애끓음 아는가
코스모스 가득 핀 검은 다리 들녘에
황홀한 노을 물드는 들판 가득히
그녀의 슬픈 노래는 오늘도 흐른다.
38. 달밭골 여름
소백산 계곡 넘고 넘어 온 세상이 하얀 꽃무더기
손 없는 빈 움막에서 뜨거운 여름과 하나가 된다
두 손 가득 들꽃이 피고 온전한 사랑이 흘러간다
얼마나 많은 사랑이 꽃무리 진 세상이던가
얼마나 많은 시름이 쓸려간 계곡물이던가
지금은 열반이 따로 없는 무아의 천국
그녀의 눈물이 무리진 흰 꽃 들판을 적신다
그의 뜨거운 사랑이 흰 꽃 들판을 내달린다
벌 나비 새 온갖 향연이 무리지어 넘실댄다.
39. 물운대 달빛
구름도 쉬어간다는 정선 몰운대 깎아지른 절벽
넓디 너른 바위 가득한 달빛 아래 누웠다
그녀의 고운 노래 별빛에 흐른다
숨 멎은 그가 구름에 떠간다
이생이 끝나고 저승에 가서도 사랑하리
저 고목과 바람과 별빛과도 사랑하리라
아름다운 생명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리
세상의 모든 것을 달빛처럼 사랑하리라.
40. 임신
빛고운 칵테일 잔에 부딪치던 축하도 잠시
마취도 없이 잡아챈 끔찍하게 큰 주사기에는
뭉개진 포도알 같은 잔혹한 핏덩이가 담긴다
몸서리치는 그녀의 비명이 손톱을 파고든다
밤새 사랑하고 사랑해도 불시착은 이어진다
남자 의사가 자궁 아닌 난소에 꽃 핀 배를 갈랐다
젊은 여자 의사가 또 다시 배를 가르고 꿰매었다
몇 쌍둥이도 낳을 수 있다는 시험관 아기 시술은
그녀의 피를 말린다 다섯번을 절망하며 돌아섰다
그녀가 기쁘게 낳은 아들은 소용없이
그의 아일 낳아야 하는 자지러지는 자궁은
씨앗을 품지 못하고 수없이 그녀를 죽인다
그녀의 눈물과 간절한 소망이 이르지 못한다
그의 철없는 방황과 좌절이 술잔에 쏟아진다
고통의 저울이 점점 그녀에게로 기울어진다
사랑이 흘러넘치던 자궁에 피눈물이 채워진다
밤마다 수억 마리 정자는 눈물의 하수구로 사라진다
쌓이는 업보는 돈과 시간 참회 무엇으로도 치룰 수 없다
살아야 한다 천국과 지옥이 함께 있는 세상
어두운 마음 속 욕망을 버려야 살 수 있다
어떤 역이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해야 한다
그녀는 단 한 번 진정한 사랑의 열매를 맺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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