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같은 글

나의 노래 5 : 사라지고 오는 것

나무^^ 2015. 1. 21. 19:54

 

                                               

    

 

     < 사라지고 오는 것 >

 

                                                                  나무

 

 41.  키 큰 사람

 

바라볼수록 커지는

키 큰 남자는 가만히 등 뒤로 와 말했다.

나를 보지 말고 나와 친할 수 있을까?

 

바라볼수록 마음이 커지는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부빌 수도 있어?

 

바라볼수록 커지는

키 큰 남자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를 보지만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바라볼수록 마음이 커지는

그녀는 의아해서 다시 말했다.

너를 보면 왜 안 되지?

친하기 위해서는 서로 바라보아야 해.

                                                   

바라볼수록 커지는

키 큰 남자는 화를 내며 크게 말했다.

구든 날 보면 키가 자꾸 커진단 말이야.

 

바라볼수록 마음이 커지는

그녀는 웃으며 작게 말했다.

커지는 네 키를 보지 않고

친하고 싶은 네 마음을 볼께.

 

바라볼수록 커지는

키 큰 남자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널 안고 있으면 넌 내 마음을 늘 볼 수 있어.

 

 

   42.  그리움

 

 깊숙이 넣어두었던

 십여 년 삶에 성냥을 긋는다   

 다시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나누었던

 푸른 날 깨알 같은 연정

 슬픔도 고통도 활활 타오른다

 

상처가 잦아질수록 그리움도 덜어진다

메마른 그녀가 막차 시간을 넘긴다

솟구치는 연민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선다

뒤돌아서면 일던 연정이 잿더미가 된다

   

무심한 그 대신 만날 수 없는 늙은 어미가 보고 싶은 밤이다

무심한 식구들 대신 맑은 눈 붉게 젖던 어린 아들이 보고 싶다

 

북적거리며 모이는 그들에게 베풀어야하는 선심

호방한 그의 술잔에 쏟아지며 거세게 몸부림친다

연약하고 상한 심신을 번번히 일으켜 세우는 사랑.

 

 

43. 사막의 낙타                                           

 

순하디 순한 눈망울로 끝없는 모래 사막을 바라본다

가느다란 다리 위로 켜켜이 포개진 짐 짓눌려 걸으며

목마른 입 메말라 회오리치는 모래 바람 서걱거린다

 

찬란한 태양빛에 싸여 떠났던 길 하얗게 부서지고

묵묵히 걷고 또 걷는 인내만이 낙타의 삶이어라

오렌지 빛 물드는 석양이 지면 몸을 뉠 수 있으리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운 밤도 잠들면 잊으리라

 

바람에 수없이 스러지는 모래 언덕 낙타처럼

묵묵히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살아있는 날까지

낙타로  났으니 낙타로 살다가 죽어야 한다.                                     

                                                                               

 

44.  수술

 

아픈 마음만큼 절절한 발목을 차라리 잘라내고 싶다

수술하는 것 보다 쉬는 게 낫다던 의사 말이 소용없다

낙타처럼 죽고 싶지는 않다 죽음의 캄캄한  터널을

수없이 건너고 깨어났는데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

 

늙은 의사는 그녀의 발목을 가르고 결핵성 관절염을 긁어냈다

병실에는 입원한 여자들 셋이 있고 그녀의 남편을 힐끔거린다

병문안 온 갱년기 여자들이 홀몬제 처방에 대해 소근거린다

남편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며 수줍은 웃음을 나눈다 

 

병원 옆 허름한 여관에서 기다리며 외상죽음을 읽는다

남루해진 고개를 드니 천장에 붙은 거울이 적나라하다

퇴근해 온 그의 입맞춤 뜨거워 불온한 거울을 바라본다

붉어진 그녀를 태우고 집으로 가는 그의 손길 다정하다

 

무거워진 그녀를 업고 그는 길고 긴 돌계단을 오른다

향기로운 푸른 숲은 회칠한 다리를 어루만져준다

늘 마음 조리던 늙은 어미가 생각나 눈물이 난다

공허한 진실을 잠자코 참아내는 것이 삶이다.

 

 

45.  불안한 소유

                                                       

공부하겠다며 산 비디오 야한 영화를 더 많이 본다

그녀도 벗은 여자의 풍만한 가슴을 살며시 다시 본다

밤낮없이 한 몸이 되어도 서로에게 이르지 못한다

욕망은 날이 갈수록 비대해지고 신뢰는 줄어든다.                                                 

                                                                    

 그녀가 잠들지 못하는 밤이 요동치며 밝는다

 맑은 새소리 들리는 문으로 무참히 그가 쓰러진다

                                                 

 구토가 일며 책장이 무너지고 책들이 쏟아진다

 민망한 술집 여자의 외로운 방만 때문이 아니다

 숨긴 허무한 노처녀의 연애 편지 때문도 아니다

 존재의 근원적 욕구를 모르는 그녀의 절망이다

 소유하지 못하는 사랑인 줄 모른 어리석음이다

 맡고 싶지 않은 역을 잘 해낸 여배우처럼 웃는다.

                                                                   

                                                   

46. 타인의 밤

 

혼자 남겨진 그녀의 외로움이 번질거리는 밤

쏟아지는 폭우 속을 달린다 고개를 젖히고 달린다

빗줄기에 반사되는 불빛처럼 눈물이 반짝인다

 

권태로운 일상에 질린 사내가 여자를 안는다

슬픔을 위로받고 싶은 여자가 사내를 안는다

잔인한 시간 낯선 곳에서 온 그들을 떼어 놓는다

전달되지 않는 무의미한 언어들 밤으로 날아간다

 

사랑을 온몸으로 전하는 사내가 잠들지 못한다

먼 밤바다에서 낚시하는 그가 잠들지 못한다

천둥번개 치는 그녀의 사랑이 잠들지 못한다                                        

욕조물이 넘쳐 흘러 카페트를 흠뻑 젖신다.  

 

 

47. 이별여행

 

숱하게 다닌 그 많은 여행은 굳이 이름이 필요 없었다

산은 산의 이름이 있었고 바다는 바다의 이름이 있었다

두려움이 지어낸 이별여행은 마지막 낭만의 이름이다

 

북적이던 인파가 썰물처럼 떠난 늦여름 먼 바다 황홀한 석양

심청이 아비의 눈을 고치려 뛰어들었다는 인당수가 넘실거린다.

제 무게에 눌려 오묘한 주름 겹겹이 드러내는 천 년의 바위들

그와 나란히 바람을 맞으며 돌아올 수 없는 모랫길을 걷는다

색색깔의 조그만 차돌들이 발바닥을 뜨겁게 달군다

수없이 부딪쳐서 반질반질 예뻐질 때까지 뒹굴었다

 

그는 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녀라도 해야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기꺼히 해야지

다툼과 분노 대신 자유로 향하는 인간다운 길

밀려드는 물살이 지우는 발자국처럼 떠나야지

 

                                                         

48. 악몽

 

새벽녘 울음소리를 지르며 깨어난다

어젯밤 투정하듯 걸려온 전화는 기어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을 드러내놓는다

그녀가 나가지 못한 거대한 조가비가 닫힌다

 

그녀가 사라지기 바라는 그를 보던 날

산 정상에서 겪던 심한 구토를 느꼈다

이별하기 위해 없는 자식이 구실이었듯이

그녀는 있는 자식이 구실이 될 수 있었다

자라지 않는 아들 늘 애끓으며 깨어난다 

 

 이별의 본질은 자유를 얻기 위함이었다

 함께 선택한 이별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에게 달아 준 날개를 상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을 잊고 살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49. 허무한 심연에 다가온 그대

 

그는

늦여름 마른 몸 스며드는 밤바람

비 젖은 산책길의 호젓한 푸르름

이끼 낀 작은 돌들 비추는 맑은 시냇물

 

음부의 충혈처럼 일어나는 그리움

책갈피에 넣으며 잠드는 침상으로

다정스레 손 내밀며 다가왔다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는 그녀

 

그는

아주 오래된 산골의 시골집

성긴 생 울타리 너머로 새를 날린다

야생화 가득 핀 마당으로 날아가는 하얀 새

 

마애삼존불의 웃음처럼

절로 미소 짓게 하는 바람 되어

부드러운 볼을 스치며 지나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죽음을 향해 추락하는 육신의 시간

소유하지 않는 그대의 손을 잡고

꿈속의 새벽길 안개 속을 걸어간다

 

 

 50. 실크로드에 핀 꽃

 

멀리 석양에 물든 모래 사막을 내려오는 사내

카메라 장비를 멘 그가 조금씩 커지며 가까워진다

멀리서 조용히 앉아 사라져 가는 사내를 바라본다

 

무너진 가슴처럼 모래언덕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구십삼 세 노인도 모래언덕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아내도 친구도 떠난지 오래된 노인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술 먹는 사내들 부럽지 않다면서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개털 된 인생을 매일 술 먹고 술 먹고 또 술 먹고 달랜다

 

흑백사진 속 그녀는 비구니처럼 쓸쓸하게 미소 짓는다

그는 에디뜨 피아프의 CD를 사고 밝은 얼굴 불러낸다

그녀는 간직했던 피아프 음반을 들고 스튜디오로 간다

오래된 아나로그 전축이 사랑의 찬가 목소리를 불러낸다

 

가방 속에 예쁜 강아지 자는 동안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신다

사내가 가만가만 불러주는 음유시인의 노래 가슴이 뜨거워진다

우리 노망들 때까지 지금처럼 사랑하고 삽시다 사랑하고 

스카프를 멋지게 맨 커다란 사내 술잔을 기울이며 말한다

 

이어지는 헤프닝에 그녀는 슬픔에 잠기고 그는 침묵에 잠긴다

사랑을 운운하기에는 멋쩍은 자신들을 보며 쓸쓸히 돌아선다

늦둥이 아들에게 산이 되고 싶은 사내는 그녀를 잡지 못한다

그녀는 영화처럼 함께 피웠던 사막의 꽃을 가슴에 묻고  

완고한 사내의 남은 여생이 풍요롭기를 기꺼이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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