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저우쭈어런
쑨위 지음
김영문.이시활 옮김
오래전에 읽었던 <아큐정전>으로 '루쉰'이란 작가를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어서 이 책을 구입해 읽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을 많이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는데, 그보다는 형제의 작품이나 성향에 대해서 평하고 설명한 저자의 생각들 위주로 쓰여진 두툼한 책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작가 루쉰에게 한때는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아우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인문학자 '저우쭈어런'이 있었다는 사실, 그들이 처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 인한 사적관계였다. 무엇보다 저어쭈어런의 유약한 성품과 맞물려 그의 일본인 아내로 인한 그들 형제의 결별이 안타까웠다.
왕더허우가 중국어판 서문에 인용한 루쉰의 말이다.
'인간은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진화를 위해서이다. 또한 삶의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 더더욱 응당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 '사회를 위해 일을 도모하며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결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무릇 희생이란 것은 모두 인간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요행히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회에는 악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따라서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 당시 그의 인생관을 압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우씨 형제가 남긴 유산의 심오한 깊이는 생존철학과 생명의 심층체험이란 측면에서 아마도 비견할 만한 상대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사람은 생명의 열기를 발산하며 고난에 찬 항쟁 속에서 생존 의의를 영원하게 하였고, 또 한 사람은 고요하고도 초연하게 생의 고뇌를 묵묵히 씹으며, 인내와 혼자의 즐거움 속에서 생존의 쾌적함을 얻고 있다. 저우씨 형제의 정신세계에는 분명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세계는 다시 분화하여 확연히 대립되는 이원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나는 진취적이며, 하나는 퇴영적이다. 하나는 잔혹하며 , 하나는 표연하다. 하나는 동적이며 하나는 정적이다. 그들은 각각 인생의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을 붙잡고 험난한 길을 몸소 헤쳐 걸으며 어쩌면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다...' 저자의 이 말은 그들 형제의 상이함을 잘 드러낸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강한 의지를 지닌 형에게 전적인 보호와 안내를 받으며 성장한 동생은 결혼을 하기전까지는 누구와도 비할 수없는 루쉰의 절대적 동료였다. 저자는 형제 합작의 산문 <제서신문>을 예로 들었다.
장남은 아버지에 버금가는 권위와 책임을 부여했던 중국의 풍습상 모든 가족을 이끌어야 한 루쉰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야만 살 수 있었던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정해준 고향의 아내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책임질 수 밖에 없었던 일도 그의 인생을 더욱 쓸쓸하게 하였다. 후에 사랑하는 여인을 맞아 자식을 낳았지만 뭇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루쉰이 마치 제자식처럼 보호하였던 동생은 일본 유학시 자유연애를 하여 일본인 아내를 맞았지만 그 여인은 남편의 가족들을 위하지 않고 낭비가 심한 여인이었다. 결국은 루쉰이 집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 이후 형제간의 우애는 끝이 난다. 형은 동생과 그 가족들을 늘 헌신적으로 보살폈지만 동생 저어쭈어런은 형을 붙잡지 못하는 유약함으로 그들의 관계는 그때부터 소원해지고 만다. 형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동생은 그의 작품들을 출판하며 그를 그리워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성공한 아우였지만 형을 떠난 그는 결국 시세에 몰려 매국노로 지탄을 받기에 이른다.
루쉰은 선진문명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후지노 선생>, <자제소상>등에는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그는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보임으로 자국의 학생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는다. 러일 전쟁의 스파이로 중국인을 총살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치욕적인 감정을 느낀 그는 민족의 정신을 바꾸는 방법으로서는 문예운동을 추진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중국인의 모든 개인적인 불행이 국가의 불행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의과대학을 그만 둔다. 그는 결단성이 뛰어난 실천가였다.
반면에 저우쭈어런은 형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유학하는 6년동안 도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였으며 광범위한 학문의 세계로 빠져들며 그의 온건한 인품과 심미안을 형성시켜갔다. 루쉰이 정신적 깊이가 있는 작품을 선호한 데 비해 그는 정감어린 예술작품들을 좋아하였다. <역외소설집>은 외국의 단편소설들을 번역한 것으로 형제가 적은 자본으로 함께 작업한 것이다. 중국인의 혼을 깨우기 위해 피압박자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루쉰은 설문해자를 배워 국문학에 기초를 단단히 했으며 저우쭈어런은 아동문학 연구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저자가 평하길 '학문적인 넓이에서는 루쉰이 동생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글솜씨는 루쉰이 저우쭈어런보다 나았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같은 제목의 두 형제의 초고를 보면 형에 대한 저우쭈어런의 믿음을 엿볼 수 있으며, 루쉰의 성실함과 열정도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고적정리를 하든 아동문학과 민간문학을 연구하든 그들 정신의 깊은 곳에는 일종의 공통적인 지향점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옛날 문화와 해외문화에 대한 반성을 통해 중국인의 정신을 개조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루쉰은 <열풍. 수감록>에서 '사랑을 가질 수없는 비애여'라고 절규하였다고 저자는 말하면서 그의 황량한 목소리에는 순진한 사랑에 대한 열렬한 기대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글을 한 문단이라도 소개했으면 좋았을텐데...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그의 개인적 상황과 부도덕한 가치에서 비롯한 사랑의 부재가 난무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뒷날 중년에 이른 그가 전통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제자 쉬광핑과 사랑을 하게 되자 <양지서>에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암울하고 어두웠던 고난의 삶을 살던 그가 사랑의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애도(傷逝)>에서는 '나는 내 자신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루쉰이 일생동안 심사숙고한 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을 역사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바로 사랑과 사랑없음 사이에서의 분투이며, 그의 <함성>은 바로 인간의 진실한 성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터져나온 절규이다. <납함>, <방황>, <야초>,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등의 문집에는 그가 거쳐온 정감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생명은 고독한 것이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서도 한사코 고독하고도 사랑없는 인생과 괴로운 싸움을 벌인 그 비장한 행동이 만약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후세 사람들을 그토록 감동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또한 루쉰의 정감세계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리고 그의 작품을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왜 그에게서 휴머니즘적 색채가 그처럼 느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상당부분을 저우쭈어런의 학문세계에 대해서 소개하고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지만 그는 형 루쉰의 보호와 도움하에서만이 온전한 그일 수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사후의 두 사람의 상이한 평가는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저우쭈어런의 학문적 가치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그 그릇의 됨됨이가 다르다고 한다. 그들은 그릇이 확연히 달랐다.
루쉰은 문학가이자 사상가였으며 격동기 중국의 한 시대를 이끌어 간 정신적 혁명가였다고 하겠다.
아우 저우쭈어런은 온화하고 고상한 삶을 원한 문학가에 그친 학자였다. 그들 형제의 삶은 중국현대 문학사의 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루쉰 작품의 예를 기대했던 아쉬움은 있었지만 저우씨형제의 일생을 더듬어보는 기회가 되었고, 루쉰의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잘 알게 되어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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