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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불교학과 (정상교 作)

나무^^ 2018. 9. 5. 00:30

 

도쿄대학 불교학과

정상교 지음       동아시아 펴냄

 

내가 불교에 관심 있는 것을 아신, 카톨릭 신자이신 가곡반 회원님께서 빌려주어 보게 된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저자의 생각이나 불교 지식을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써나갔다는 점이다.  

기본적인 불교학 개론을 배운지 오래된 나로서는 총괄해서 복습을 하고 몰랐던 사실들도 알게 되어 좋았다.

저자가 불교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까지의 과정, 불교학의 유래 등을 재미있게 들려준다.

 

<도쿄에서 보낸 행자시절>편에 보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줄곧 도서관에서 살아야 한 저자의 생활이 행자승에 다름없었다. 메이지 시대 유럽의 불교문헌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일본에 불교학의 뿌리를 내린 승려 출신 유학생들의 공이 오늘날 1,000여년전, 고려대장경을 만들었던 한국의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가게 만들었다.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당나라 사람이 아닌 신라 혜초 스님이라는 것을 밝힌 것도 그들의 공이었다. 

 

<화엄경, 대승경전 탄생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한장면> 편에서 보면, 한국불교는 화엄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다.

당나라에 유학했던 의상대사가 화엄학의 최고였음을 밝히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해골바가지 썩은 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의 원효대사 역시 화엄학의 대가로 일본 화엄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화엄경이라 함은 '붓다의 무변광대한 깨달음의 세계를 꽃으로 장엄(장식)하는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경전 속에는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중하 3본 중 한역된 것은 하본의 10만송 중 전분(前分) 3만6,000 게송만 번역되어 아직 번역되지 않은 후분에 있다고 한다.

반야경을 비롯한 많은 대승경전들이 선양하는 공사상을 깊게 체득하여 철학적으로 체계화 시킨 이는 나가르주, 즉 용수보살이다. 이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가지고 나온 하본(下本) 벅역본이 <60권 화엄경>이라고 한다. 그 중 입법게품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시사한다. 아쉬운 점은 산스크리트어 화엄경이 중국에서 보관되다 산실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선재동자, 창녀에게서 깨달음을 구하다> 편에는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선지식들을 찾아 떠나기를 권한다. 선재동자는 남인도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추정되는 이다. 이는 대승불교가 당시 해외무역에 종사하던 대상인들의 지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본이 남아있는 <십지품>은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살의 수행도를 10단계로 체계화하여 <십지경>이라는 경전으로 만들었다.

선재동자가 가르침을 구하는 선지식들이란 각계 각층의 모든 인도 사람들을 일컫는데, 그들은 나름대로 그 물음에 대답하여 준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곳은 바로 중생들의 속세, 그들의 삶속에서 얻어야함이다.

특히 중생의 욕망에 따라 몸을 나타낸다는 창녀 '바수밀다'의 설법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보살은 보디사트바(boddhisattva)의 음역인 보리살타의 줄임말로 보디(보리)는 불교도가 목표로 하는 깨달음이나 지혜를 의미하며 사트바는 존재하는 이들, 살아있는 이들, 중생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깨달음(지혜)을 가진 자, 깨달음이 확정된자 등의 의미가 있다. 초기 불교에서 보살이란 석가모니가 전생에 깨달음을 구하러 온갖 수행을 했던 보살이었기 때문에 이번 생에 붓다가 될 수 있었다고 하여 오직 석가모니만 지칭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중생 구제의 기치를 높이 든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하였기에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 나가는 모든 이를 <보살>로 칭하게 되었다.'

그래서 절에 가면 모든 여성 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마치 진흙탕 속에 연꽃처럼 중생을 계도하여 대자비와 밝은 지혜로 대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명칭인 것이다. 

선재동자는 이러한 선지식을 통해 대승보살의 이상적 덛목인 자비를 증득하여 진리의 세계인 법계에 들어간다.

 

유럽에서 시작된 문헌학으로서의 불교학은 <숫타니파타>등의 초기 불교 경전의 복원작업에 힘썼던 '리즈 데이비스'가 설립한 팔리성전협회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 유럽으로 유학하고 돌아온 불교학자들이 도쿄대학 및 정규대학에서 인도철학, 불교학을 가르치면서 발전하게 되어 지금은 서양학자들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선의 억불정책과 함께 식민지 시대 조선총독부의 관리하에 대처승들이 성행하게 되자 이를 염려한 불교인들이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을 반포하며 조선불교 조계종을 발족하기에 이른다. 이에 맞선 대처승들이 대립하여 한국불교태고종을 창립하면서 정화운동을 끝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대한불교조계종 해동화엄 종찰 부석사'라는 표찰은 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에서 아미타불의 뿌리는 산스크리트어 '아미타유스'에서 비롯된 음역으로 '측량할 수없는 생명을 가진, 무한 생명의 부처'라는 의미가 있다. '아미타(무량수) 부처님이란 영원한 생명, 헤아릴 수없는 광명의 의미를 가지므로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이 강조된 붓다를 뜻한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갖는 대표적 특징의 하나인 초월적 붓다에 대한 관념인데 특히 아미타 부처님은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시는 부처님이다.'

'무량수전의 아미타 부처님은 서방 극락정토라는 방법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려 하심이다. 그래서 부석사 무량수전은 극락행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이다...'

나는 전에 이러한 의미도 모른 채 부석사 무량수전을 보고 왔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데 무지해서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해도 내 마음에 보살도를 염원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긴 하다.

 

마지막 장으로 '공과 나가르주나와 <중론>편에서는 반야경에 대한 설명이다. 원인과 조건 지어짐에 의해 결과가 발생한다는 연기설를 전제로 사물의 본성이 공(空)이어야 그 변화가 가능하기에 나가르주는 연기가 공성임을 선언한다.

브라만 사제로 태어나 방대한 베다경전과 온갖 학문을 공부한 그가 교단에 오류를 지적하고 쫓겨나 탁발승으로 살아가던 중 점성술과 은신술을 배우게 되자 왕의 여인을 탐하게 되었고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려 쫓기다 정신을 잃고 며칠간 사경을 헤매일 때 들려오던 요가 수행자들의 독경소리...

 

'뿌리가 강한 나무는 단비에 다시 싹을 틔우듯,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애욕의 뿌리는 스치는 향기에도 다시 싹을 틔움이니

어리석은 자들은 끊어야할 것은 끊지 아니하고 신의 이름만 부르고 있으니

욕정의 유혹은 언제나 아름답고

욕정의 과보는 언제나 괴로움일 뿐

욕정에서 근심이 생기고 애정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욕정에서 벗어난 자, 그에게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진다오

쾌락에서 근심이 생기고 쾌락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쾌락에서 벗어난 자, 그에게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진다오.

아, 그러나 어찌하리오 욕망을 즐기는 것으로 욕망은 사라지지 않음이니,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 기름을 뿌리는 것과 같이.애정과 쾌락과 욕망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들 모두는 그대 마음을 안락한 거주처로 삼고 그대 마음을 부모 삼아 나고 자랐음을... 그대 마음이 키운 그대의 자식들이라...

계(戒)를 지켜 고요한 호수와 같이 마음을 갖추고 이치에 머물러 그대로의 마음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지혜의 획득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신을 위한 찬가만 부르고 있구나. 사변의 집착물인 그 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살아있는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구나. 가엾고 가엾은 말 못하는 생명의 죽음이 어찌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 어리석은 행위들이여,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무지와 불행과 두려움을 먹고 사는 죄와 벌의 신들이여...

잠 못 드는  이들에게 밤은 길고, 지쳐있는 이에게 길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듯이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생사윤회의 길은 그처럼 아득히 멀기만 하구나...'
그는 죽음에 문턱에 이르러서야 깨달음에 이르며 고타마 싯다르타를 스승으로 모시는 승단에 귀의하고 모든 과거를 벗게 된다. 붓다를 스승으로 모셨던, 스승이 들려주는 붓다의 말씀이다.

 

'곤충과 새와 물고기 등은 모두 다른 특징을 가진 종류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태어남은 그 다름을 결정짓게 한다.

그러나 나가르주여, 인간에게서 그런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겠더냐?

인간에게 다름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명칭일 뿐 4성 계급의 어디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같은 인간일 뿐이다. 브라만이다, 불가촉 천민이다 라는 것은 태어남이 아니라 각자의 행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태어남에 의해 브라만이어야만 하고

태어남에 의해 불가촉천민이어야만 하는 자는 없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강도와 도적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된다.

행위에 의해 사제가 된다.

고귀한 삶을 살고 자신을 다스리고 이런 수행을 몸에 익히는 자가 그저 계급으로서의 브라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고귀한 이상적인 수행자로서 고귀한 브라만이 되는 것이다. 브라만의 어미에게서 났다고 해서 부라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집착이 없는 자, 그를 우리는 청청한 브라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굽힘없는 수행으로 번뇌의 흐름을 끊고, 욕망을 없애 버린 자 그를 우리는 청정한 브라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다함을 알고 열반을 아는 자여!

도달하려는 저 곳도 없고, 버려야 할 이 곳도 없으며 두려움도 없고 속박도 없는 자 그를 우리는 브라만이라 부르는 것이다.

 

악함에서 벗어났기에 브라만이라 이름하고

행함이 고요하기에 수행자라 말하는 것임을.

자신의 부정함을 모두 버렸기에 우리는 그를 출가자라 부름이다.

천한 자란 누구인가?

불타는 탐욕으로 자신을 태우고 언제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며 사람을 증오하고 사악하며 겉으로만 꾸며서 사람을 속이고,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책략을 부리는 자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폭력에 호소하고, 알량한 육신의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는 자

그를 우리는 천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인 것이 아니다. 태어남에 의해 브라만인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이고 행위에 의해 브라만인 것이다.'

 

올바른 깨달음은 무지를 볼 줄 아는 지혜이고, 불교의 핵심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나가르주나는 이를 체득함으로 연기(緣起)와 공(空), 중론(中論)을 설법할 수 있었다.

그가 고타마 붓다를 향한 존경심과 환희심에 차서 지은 깨달음의 시이다.

 

'사라져버림도, 새롭게 생겨남도

단절되어버림도, 영원함도 아니다.

같은 것도,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또한 사라져 가는 것도 아님을

모든 언어들의 유희에서 벗어난, 참으로 아름다운신 진리인

모든 것은 서로 서로 만났다 흩어져가는 연기의 진리를 가르쳐주신

모든 깨달으신 이들 중 가장 거룩하신 붓다, 그 분께 나는 귀의하옵나이다.'

'공의 논리를 완성한 나가르주나의 <마드야마카 카리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다.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작가인 보르헤스(불교강의)를 비롯하여 토마스만, 니체, 헤르만 헤세 등이 불교에 심취하였던 불교도들이었다. 저자가 소개하길 쇼펜하우어는 그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만일 나의 철학의 결과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고 알려준다.

이십대에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어 불교에 관한 책들을 보고 그 진리의 말씀들을 배웠다면 좀 더 지혜롭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모태부터 길들여졌던 기독교 신앙이 무조건 타종교를 배척하게 하였으므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 기독교는 내 삶에 구원이 되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잠자리에 들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가만히 말하며 호흡명상을 한다. 그러면 어느새 편안히 잠든다. 어리석음으로 (無明)으로 인해 세상사를 힘들게 받아들었던 지난 날에서 벗어나 참회와 감사함으로 행복함을 느끼게 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부터였다.

요즘은 유튜브에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통해 보살행을 하시는 걸 볼 수 있는데 꽤 인기가 높다. 나도 들어보니 명쾌하고 재미있게 상담을 하시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신다. 정토회를 운영하며 붓다의 말씀을 통해 중생들의 괴로운 마음을 평화와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훌륭한 분이다.

이 책은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들도 부담없이 읽으며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