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종교, 철학, 심리학

몽테뉴 수상록 (몽테뉴 作)

나무^^ 2017. 12. 2. 19:55

 

몽테뉴 수상록

 폐품 분리수거를 하다 누군가 아주 오래된 책이라 버린 것을, 익히 들어본 책인데 읽지 않아 주워 와서 읽었다.

어느 '길위의 철학자'는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했다. 1965년 세로쓰기로 인쇄된 책이다 보니 번역(문학박사 손우성)에 낯선 한자어가 필요 이상으로 많고 글씨가 작아 좀 인내심을 요했다. 외출하지 않는 날이면 한문 사전을 찾기도 하며 식탁에 펼쳐놓고 조금씩 읽었다. 

 

앞부분은 몽테뉴론이라며 옮긴이의 장황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을 논문이 70쪽에 이른다. 그 내용은 몽테뉴(1533년~1592년. 프랑스)의 생애와 그의 생명사상, 문예부흥기의 지적환경, 수상록의 구성요소, 초기 스토아사상, 회의주의적 사색의 희롱, 실제적 생활관, 인간관념과 정신생활, 도덕과 정치사상, 종교사상 등 그를 잘 이해하고 그의 사상을 바르게 알리기 위한 옮긴이의 가르침이다. 마치 학기 시작 전 특강을 듣는 느낌이다.ㅎ

 

그 내용중에 몇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몽테뉴의 초기의 인생관은 죽음의 철학이었다. 그것은 인생을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요약한다. 그의 후기철학은 인생철학이다...죽음을 생각하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철학적 교훈은 순전히 언어놀음이다. 그것이 그 본질적인 악덕이다. 몽테뉴는 인생에 봉사하는 철학을 요구한다. 어떻게 해야 인생을 더 재미나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점이다...>

<몽테뉴의 사상은 자기가 정신을 아무데도 매인 곳 없는 자유 속에 보존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만큼, 인생의 목적은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보다도 이 세상에 나온 몸을 어떻게 하면 가장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방편을 찾는데 있다고 표방하며, 사실 그렇게 살아왔었다... 그의 정신에는 비굴을 무엇보다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결벽성이 엿보인다...>

<그는 학자풍의 공허한 논법의 전개를 즐기지 않고, 현실에 임해서 그가 실생활과 독서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그에 대한 사상을 말한다. 그것은 아직 논리적 고찰과 체계의 구성에 이르지 않았으며, 그의 안일을 탐하는 성미는 그러한 노고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실의 검토보다도 어떤 사실에 즉한 심리의 동태를 더듬어 보기를 더 즐긴다. 그가 낙마 사고로 중태에 빠진 사건을 말할 때의, 그 사건 자체의 경위보다도 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그의 마음 속에 사건들을 기술한다. 그것은 판단보다도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슨 사건을 다룰 때에, 사실 자체의 진부(眞不)는 제쳐두고 어째서 그 사실이 있었는가의 원인과 이유를 캐고 있다고 비웃는다. 사람들은 없는 사실을 가지고 잘도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영국의 베이컨에 앞서 경험주의의 바탕을 이루어주었으며, 회의와 불신에 의한 검토의 방법으로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길을 터주었다. 몽테뉴는 확실한 지식을 잡을 방법이 없다고 말하면서 , 그의 사고방식이 바로 확실한 지식을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학문(지식)을 분리시킴으로써 학문을 해방시켰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지식을 얻을 방법을 찾고는 학문을 다시 형이상학에 굴복시켰다...>

끝부분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이다. 작가가 안일을 탐한다고 번역한 것은 좀 부정적 이미지를 풍긴다. 작가는 합리적인 삶의 안락함을 추구한 것 같은데...

 

<그는 이성의 힘을 시인하며 이성으로 인간은 행복을 찾아 가질 수 있고 또 찾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면에서 불필요하게 인간자유를 억압하는 요소를 고발하는 반면, 자유가 방자로 추락해서 불행을 끌어오지 않도록 중용을 지키라고 경계한다. 그는 실증적 사고방식에서 물질주의로 타락하지 않고 사이비도덕을 공박하며 인간에게 더 많은 선을 찾아주려고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에피쿠로스의 계승자이며, 오히려 그보다도 더 과감하고 조심성있는 쾌락주의자이다.>

        

몽테뉴는 어린시절부터 라틴어와 고전공부에 열중했으며 법학을 전공하여 고등법원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는 광신적인 종교 시민전쟁에 있어 관용을 지지했으며 인간중심 도덕을 제창하였다. 그의 생각을 에세(essai)라는 문학형식통해 무겁고 심오한 주제들을 일상적 소재와 자전적 이야기로 쉽게 풀어 씀으로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이 방대한 에세이들은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수상록(隨想錄)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고전학자들의 글을 대단히 많이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하는 것을 알수 있다.

     

제14장 '선과 악의 취미는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견에 매여 있다.' 중에서,

<고통이 그렇게도 참을 수 없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주요한 만족을 정신에서 얻는 습관을 갖지 않고, 우리들의 조건과 행위의 최고의 상전인 우리 심령의 힘에 기대하지 않는 탓이다. 육체는 다소간의 차이를 제하고는, 한 격조와 한 자세밖에 갖지 않는다.

심령은 모든 종류의 형체로 변할 수 있으며, 육체의 느낌이나 다른 모든 사건을 무엇이든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의 상태에 맞춰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을 연구하고 탐색하며, 그 속에 있는 전능한 원동력을 잠깨워야 한다... 고통은 잘 버티는 자에게 더 순해질 것이다... 육체는 굳어질수록 짐을 지기에 더 든든하듯, 심령도 역시 그렇다...>

인간의 심약함을 타이르며 성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들은 고통에 몸을 맡길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

심한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서 깨닫는 정신적 성숙함과 아울러 맛볼 수 있는 행복감을 일컫는 말이다.

 

제 20장 '철학함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중에서,

<키케로는 말하되, 철학함은 죽음에 대비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더우기 그것은 연구와 명상이 우리 심령을 우리들 바깥으로 끌어내어, 신체 이외의 일에 분망하게 하는 것이며, 또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에 닮아가는 일이며, 세상의 모든 예지와 사유가 결국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 한 점에 귀결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성은 오로지 우리들의 만족만을 목표로 하며, 그리고 성서에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의 모든 능력은 결국 우리들에게 편안히 살게 하는 길을 찾아주는 일이라야 한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삶과 죽음이 함께 당연함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제 25장 현학(衒學)에 관하여 중에서,

<이 어리석은 수작이 얼마나 알짜로 내 경우에 들어맞는지 정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여기 글을 쓰는 것도 똑같은 수작이 아닐까?

나는 이 책 저 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그것을 담아둘 곳도 없으니까, 내게 저장해 두는 것이 아니고, 여기다 옮겨 놓는 것이다.  사실은 이 문장들은 전에 있던 자리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지식으로만 배워지는 것이고, 과거의 것은 미래의 것과 똑같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더욱 언짢은 일로 그들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이나 어린것들은 그것을 소화해서 살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는 뭐라고 말하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는 학문의 본질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많은 지식을 알고 있어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 없음을 여러 예를 들어 피력한다.

 

 제 26장 아동교육에 관해서 중,

<선생은 제자에게 학과의 글자가 아니라, 그 의미와 그 실질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할 일이며, 그가 얻은 소득을 그의 기억의 증명에 의함이 아니고 그의 생활의 실천으로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배운 바를 스승은 제자에게 시켜서 여러 모습으로 보여주고.. 그가 배운 바를 진실로 이해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나를 볼 일입니다... 우리들의 공부의 소득은, 그것으로 자기가 더 나아지고 더 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교육의 많은 문제점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교육은 물욕의 수단이 되어가고 대부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시류에 휩쓸려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자식을 스스로 교육하지 못할 만큼 바쁜 부모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식을 위탁하게 된다. 그러면서 언감생심 자신이 원하는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어리석은 나역시 그러했다.   

 

<예지의 가장 드러나는 표징은 꾸준히 즐거운 마음입니다. 그 상태는 항상 명랑한 저 달나라 너머의 일들 같습니다... 철학은 심령의 폭풍 같은 격동을 진정시키고 굶주림이나 열병 따위를 웃어 넘기는 일을 맡으며, 그것도 어느 공간적인 에피시클르(星群들의 상상의 小軌跡)에 의함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손에 잡히는 이성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철학의 목적은 도덕입니다...>   

나이들면 더더욱 철학을 공부해야 함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야 젊은 세대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제 33장 생명이 아깝거든 감각적 탐락(耽樂)을 피할 것 중에서,

<나는 진실로 옛사람들의 대부분의 의견이 이 점에 합치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좋은 일보다도 나쁜 일이 더 많을 때에는 죽을 시기가 온 것이며, 우리들의 생명에서 고통과 불편을 막아낸다는 것은 바로 자연의 법칙에 위반하는 일이라는 점...

'안온한 생활 아니면 행복스런 죽음을 얻을지니라. 생명이 짐이 될 때에는 죽는 편이 나으리라. 불행 속에 살기보다는 살지 않음이 더 나으리라.' (그리이스 격언) 그러나 죽음의 경멸은 우리가 행운에 속하는 것으로 부르는 명예, 부유, 권력 기타 다른 은총과 재보에 관한 관심을 버리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할 정도로 이 사상을 강조하며, 마치 이성에게 이 새짐을 지우지 않고는 이성의 힘만으로 우리들이 이런 것을 버리게 하지 못할 것 같이 보는 것은, 세네카의 문장을 읽어보기까지 나는 이런 일이 권장되는 것도 실천되는 것도 본 일이 없었다...>  

주교인 한 아버지가 귀한 외동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아내까지 죽음으로 이르게 하여,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믿는 신앙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헐! 요즘은 자살도 흔하고 안락사도 법으로 제정되어가는 시대이다. 

지옥을 무서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면,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으면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함께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39장 고적(孤寂)에 관하여 중에서,

<비애를 불어 없애는 것은 이성과 예지이다. 망망한 바다를 내다보는 기슭의 하는 일이 아니다. 야심, 탐욕, 공포, 음욕 등은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있다고 우리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음산한 비통은 기사의 뒤 말엉덩이에 따라 오른다. -호라티우스-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아무개가 여행을 가보아도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더라고 말하니까, '그는 자기를 짊어지고 갔다 온 것이지.'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다른 태양이 비치는 지역 찾아간들 무엇하리? 조국을 도피했다고 자기자신도 도피되는 일인가?'  -호라티우스-

먼저 자기와 자기 심령을 억누르는 짐을 내려놓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수록 심령은 더욱 억눌린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꿈꾸며 여행을 떠난다. 나역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을 많이 하고 돌아와 느낀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을 배우는 일이었다.    

 

<고적은 탈레스의 본을 따서 자기 활동기의 화려한 세월을 세상에 바친 자들에게 더 적합하고 온당한 것 같이 보인다. 남을 위해서 실컷 살아보았으니, 적으나마 인생의 이 말기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보자. 우리들의 사상과 의향을 우리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돌려오자. 확실하게 은퇴할 자리를 잡는 것은 가벼운 기도가 아니다. 은퇴해 보면 다른 일에 참견 안 해도 자기 할 일이 상당히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주해 갈(죽음) 차비를 할 여유를 주시는 이상, 그 차비를 하자. 짐짝을 꾸리자. 일찍이 사람들과 작별하자. 우리들을 다른 데 매이게 하고 우리 자신에게서 물러나게 하는 가혹한 계루(繫累)에서 벗어나자. (* 계루 : 어떤 사물에 얽매어 누가 된다는 뜻)

이러한 강력한 속박에서 풀려나와서 이제부터는 이것 저것 즐겨보며, 무엇보다도 내 자신 밖에는 위하지 말 일이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 힘은 빠져가고 있다. 힘을 뽑아다 우리 자신에게 담아두자... 

자신에게도 걷어채이며 둔중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말게 하라. 자기를 추어올리며 애무해주라. 자기 이성과 양심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들 앞에 잘못하면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다스리라...>

    

은퇴를 해도 몇 번은 했어야 할 위인들이 나라를 다스린다며 권력투쟁에 나서는 염치없는 많은 정치인들이 생각난다. 나이들수록 더 어려운 일이 매사에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다 버리고 떠나야 하는 세상인데 무슨 미련을 그리도 품을까!  

<다른 탐락들과 아울러 남들의 칭찬에서 오는 쾌락을 버리라...

그대의 학문과 능력으로 말하면, 그것은 걱정마라. 그 성과는 잃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그대 자신에 더 값어치가 생긴다...

그대와 동무 하나만 있으면, 그대들 둘이 충분히 인생의 무대이다. 또는 그대와 그대 자신만으로 족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에게는 하나이며, 그대 하나가 그대에게 인민 전체가 되게 하라. 한거와 은둔에서 영광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야심이다. 자기 굴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자기 발자국을 지우는 산짐승의 본을 따라야 한다...> 

 

제 50장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하여 중에서,

<우리들의 행불행은 우리들에게 밖에 매여있지 않다. 우리들의 공물과 기원을 우리 자신에게 바치자. 운수에게 바칠 일이 아니다. 운수는 우리들의 행위에 아무런 힘이 없다. 그 반대로 우리들의 행습이 운수를 뒤에 끌고 다니며 운수를 자기들 형태로 박아낸다... 우리는 우리들의 값어치대로 보면, 아무리 경멸당해도 과하지 않다고 본다. 연민과 동정에는 가련히 생각하는 사물에 대한 어느 정도 평가하는 심정이 섞여있다... 나는 우리들의 불행이 허영심만큼 크다고도, 악의가 어리석음만큼 크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위보다도 무위로 가득차 있다. 우리 팔자는 참담하다기보다도 비천한 것이다. 그래서 디오니게스는 술퉁을 굴리고 혼자서 어슬렁대며 알렉산드로스를 코웃음쳤고, 우리 인간들을 바람이 가득찬 오줌보로 보고 있었으니... 

브루투스가 스타릴리우스에게 케사르를 처치하는 음모에 같이 참가하라고 말했을 때에, 그가 한 대답도 같은 성질이었다.

그는 이 기도(企圖)를 정당하다고는 보았으나, 도대체 인간들이라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해 줄 값어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었다...

현자는 자기를 위한 일 밖에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헤게시아스의 교훈과, 그리고 현자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부정당하다고, 그것은 미친놈들 때문에 예지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 테오도로스의 교훈은 좋은 일이다. 우리들 고유의 특수한 조건은 골계(滑稽: 익살이라는 뜻)로울 뿐 아니라 가소롭다.> 그가 생각하는 현자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제 57장 나이에 관하여 중에서,

<나로서는 우리들의 심령은 스무살이 되면, 그것이 장차 될 싹수는 다 풀려져서 할 수있는 능력을 모두 약속해준다고 본다. 이 나이에 자기 능력의 명백한 징조를 보여주지 않은 심령으로서 그 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증거를 보여준 일은 없었다. 자연의 소질과 덕성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심령이 가진 바 강력하고 아름다운 것의 표시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보여주지 않는다. 가시는 돋을 때에 찌르지 않으면 다시는 찌르는 일이 없다. 라고 도오피네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을 잘 이용하는 자에게는 학문과 경험은 나이와 함께 자랄 수 있다. 그러나 활기와 민첩성과 견고성 그리고 더 한층 우리 자신에 있는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다른 소질들은 시들며 쇠약해 간다...>

 

오늘날에는 빨리 성숙해지는 육체 만큼이나 정신적 성숙은 오히려 뒤쳐지고 있다. 스물살이 넘어도 성년으로서의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점 안락해지는 삶의 방식이 정신적 성숙을 느리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옛말처럼 철이 들기 위해서는 고생을 하고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좋은 책을 읽었다. 제2권, 제3권도 사서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