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점에 들렸다 제목에 눈이 가서 샀는데 지금은 절판된 책이라고 한다.
책을 다 읽고 스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착하고 수줍은 소년 같은 맑음이 있었다.
나는 첫인상에서 그 사람의 성격이나 됨됨이를 예민하게 느끼곤 하는데 대개는 그 직감이 맞는다.
때론 만날수록 첫인상보다 더 좋아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인상보다 별로인 사람도 있는 것은 그이의 행동이나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나 역시 첫인상보다는 만날수록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들 중년 이후의 얼굴은 부모가 아닌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을 하는 건,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마음가짐이 얼굴에 담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늙어서 보기 싫어지는 것과는 또 다른 '표정'이 담겨짐을 의미한다.
'짚신스님'에서 중국 당나라 때 진존숙이라는 스님은 대접 받는 것 자체를 빚이라고 생각하며 늘 짚신을 지어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감추어도 사향의 향기는 퍼지기 마련이고 호주머니의 송곳은 삐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스님에게 짚신을 만드는 행위란 단순한 호구지책이 아니라 수행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짚신의 효용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남은 짚신은 사회에 환원했다...'
스님의 제자되기를 원했던 젊은이는 발목이 부러져도 그 스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공덕을 쌓아야 함을 깨우치는 글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내'에서는 상대를 바꾸려고 괴로워 하지 말고 나의 관점을 바꿈으로 편안함을 얻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불교의 핵심 사상이 바로 이 '의식의 전환'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에도 나오는 '의식만 전환하면 열반에 든다'는 말씀을 이해는 하지만 살아가면서 실천하는데는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하다.
'혜월선사의 셈법'에서 네것 내것이 없는 불교의 경제논리를 일러주신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소유'에서 비롯된다. 내 한 몸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재산이 필요한 게 아니건만 우리들은 물질욕에 사로잡혀 단 한번의 인생을 괴롭게 허덕이며 살다 떠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는 살생계와 음행계를 동시에 범하고 추방당하기에 이른 두 수행자에게 유마거사가 심지계의 입장에서 두 눈을 열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죄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만 없앤다면 죄 역시 없어지기 마련이다. 죄도 없어지고 죄지었다는 마음도 없어져 모두가 공(空)해진다면 그때 바로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진다.' 이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 벌어지고 또 마음에서 사라지는 법을 설한 것이다.
'심지계에 충실했던 노힐부득은 미륵불이 되고, 근본율에 충실했던 달달박박 역시 무량수불이 되어 모두 성불했다...' 하니 어느 것이 반드시 옳고 또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몽중가피'에서는 '불굴의 노력과 신심으로 언어장벽을 뛰어넘는 번역가들'의 이야기가 기적처럼 전해진다.
나도 예몽같은 꿈을 많이 꾸고는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꿈이란 내 무의식의 발현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자 예전처럼 꿈을 많이 꾸지도 않고 또 꾼다해도 어떤 의미부여를 하지 않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그릇의 밥'에서는 '천녀공양'을 받았다는 두 스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재미있다.
혼자 외진 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끼니공양이 어려움과 함께 저자스님 또한 그 고충을 말하신다.
나 역시 하루 세 번 식사를 내 손으로 차려먹는 일을 일종의 수행처럼 착실히 한다. 언제가 눈에 장애가 있는 처자가 제 손으로 식사를 만들어 먹는 과정을 담은 다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눈이 성한 사람보다 몇배의 어려움과 시간을 들여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먹으며 감사했다. 눈물 나는 그 영상을 보며 나의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았다.
나이를 먹으며 살림을 오래 하다보니 이제 끼니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해진 것이 감사하다.
명나라때 오승은이 지었다는,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을 거느리고 여행하는 스님이 주인공인 <서유기>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기인 <대당서역기>가 모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경전 구절을 외우며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나도 마음이 편안치 않을 때는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읽으으며 곧 평정심을 찾는데 도움을 받는다.
'나의 혀는 타지 않으리'에서 유명한 역경가인 '구마라집'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학문이 뛰어나 번역한 경전이 74부 384권(개원석교록에 의함)에 이르는데, 인도 원문을 입으로 번역하면 다른 스님들이 세 번 되풀이 읽으며 확인했다 한다. 그가 유언하길 '...만일 나의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 시신을 화장한 뒤에도 혀가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고 그 말대로 다비식 때 그의 혀는 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번역이 얼마나 충실한지 보여주는 일이다.
'길은 없다. 절박하고 간절하게'와 '죽은 사람의 뼈로 표지판을 삼다'의 글은 구법승들의 목숨을 건 수행 이야기이다.
고봉원묘 선사는 사관(死關)이란 패를 내걸고 수행하였다고 한다.
'... 죽고 난 뒤에는 남이 문빗장을 열어 줄 것이다. 다행히 살아서 깨친다면 귿이 문을 열고 또 다시 세상에 나오겠다는 마음조차 없어질 것이다. 하긴 나오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는가. 안팎이 둘이 아닌 것을. 그리고 해제결제도 없는 것을, 삶 그 자체가 수행이니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지면 될 것을.'
삶 그 자체가 수행이라는 말씀에 깊이 동감한다. 끝없이 일어나는 욕망과 분별심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 속에서 괴로움 대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복하다 생각하고 살 수 있다면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잡아함경>에 이르길 '열반이란 탐욕이 영원히 다한 것이며, 성냄과 어리석음 그리고 일체의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것이다.' 이는 마음의 쉼(有餘涅槃)과 아울러 몸의 쉼(無餘涅槃)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더 나아가 '무주처 열반(無主處涅槃)'을 설한다. '삶과 죽음에서도 자유롭고 몸과 마음에서도 자유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에 걸리지 않는 대자유의 상태가 바로 열반이 것이다' 이러한 큰 지혜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 스님들은 정진하며 수행하는 것일게다. 나 같은 어리석은 중생은 이제 삶을 두려워 하지 않듯이 죽음 또한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가짐만 지녀도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다.
좋은 책을 읽고 스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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