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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잔 브라흐마 作)

나무^^ 2018. 2. 8. 21:49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진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연금술사 발행 

 

 흥미로운 제목과 함께 류시화님이 번역한 책들을 감동깊게 읽었기 때문에 사서 읽게 되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살면서 늘 공감하게 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삶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코끼리에 끌려다니지 말고 코끼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삶은 자유롭고 그 자유로부터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작가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하였으며 17세까지는 기독교인이었다가 승려가 된 분이다.

그는 태국의 고승 '아잔 차'를 찾아가 철저한 금욕수행을 하며 가르침을 얻었다. 그후 호주로 가서 절을 세우고 포교를 하면서 삶의 경험에서 깨달은 통찰을 10장에 걸쳐 108가지 일화로 들려준다. 흔히 말하는 108 번뇌이며 코끼리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번뇌의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스승 아잔 차의 절에 쓰여있다는 '세상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됨을 기뻐하라' 고 한 말은 진실이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행복이라는 건 실체가 없는,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편안함을 느끼며 번뇌가 사라지니 비로소 행복한 마음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방랑의 수행을 하던 스승 아잔타가 찾아간 위대한 스승 아잔 문은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남을 보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는 태국 동북부 파퐁이라는 밀림에 정착하여 철저한 고행승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였다. 23세때 아잔 브라흐만이 그곳에 가서 수제자가 된 것이다. 

<깨어 있으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흐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놓아 두라...

세상을 살아가며 명상 수행을 하면 다른 이들은 그대를 울리지도 소리내지도 않는 종처럼 바라볼 것이다. 쓸모없고 나약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아잔 차의 진실한 말씀이다. 

연약한 심신으로 힘들었던 삶이 고통스럽게 나를 옥조여올 때 그 모두를 내려놓고 물러서자 내 삶은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졌다. 휴식과 안정은 나의 심신을 건강하게 해주며 내가 느끼는 삶의 가치 또한 향상시켜 주었다.

 

작가가 공들여 절의 벽을 쌓아 완성된 후 보니 두 장의 벽돌이 어긋나게 놓여져 있었다. 몽땅 다시 하고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주지스님은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그는 이 벽돌 두 장이 깔끄러운 가시처럼 불편해사람들이 발견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방문객이었던 한 남자는 벽이 아름답다고 말하였다. 놀란 그가 되물었더니 대답하길,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두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그는 그때서야 그 두 장의 실수가 아닌 잘 쌓아올린 수많은 벽돌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핍에 촛점을 맞추는 한 어느 한 순간도 만족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안목으로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일이다.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 죄책감을 다룬 이야기에서 나오는 불교잠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흔히 대책없이 어둠 속에서 불행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삶은 꼭 어떤 대단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하는 것이, 안하고 불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행복에 집착할 때 그것은 고통에 집착함과 똑같다. 그것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 안에는 본질적인 고통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조심하라. 너무 기뻐하거나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고통이 오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그것에 빠져 자신을 잊지 말라. 그것들이 똑같다는 것을 이해하라. -아잔 차- >

 

4.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화를 내는 것은 영리한 반응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복하며, 행복한 사람은 화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화를 내는 것은 비이성적인 일이다...

화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화를 정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화가 정당한 것이고 그럴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화가 날 때 마음 속에서 일종의 재판을 벌이는 것과 같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 그 피고인은 재판정의 피고석에 서 있다. 당신이 검사이다. 당신은 그가 유죄라는 것을 알지만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재판관인 당신의 양심에게 먼저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당신은 그가 저지른 잘못들을 낱낱이 열거하기 시작한다. 피고의 행위 뒤에 감춰진 온갖 종류의 악의, 이중성, 잔인성을 주장한다. 그에게 인정을 베풀 가치가 없음을 자신의 양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당신은 그가 과거에 당신에게 저지른 많은 다른 잘못들을 들추어 낸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잠시 멈추고 상대방 변호사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그의 행동에 대한 타당한 변명과 이유있는 해명을 떠올렸다. 그리고 용서의 미덕에 의미를 주었다. 나는 양심이 더 이상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심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화는 정당성을 잃고 더 이상 음식을 공급해주지 않자 죽어버렸다. 화를 내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대가 무너진 데서 촉발된다...

모든 원하는 결과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며 예측이다. 지금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며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교양있는 이들은 화를 내도 될 만한 사람에 한해서 화를 낸다. 나 역시 가끔은 함께 살고 있는 아들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화를 낸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아직도 멀었구나 반성하며 아들이란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결국 아들은 내 인생의 인과응보이자 스승인 셈이다. 

 

5. 한 트럭의 소똥 장에 나오는 문구이다.

<명상수행을 오래 한 수행자들은 많다. 하지만 평탄한 삶을 살고, 퍼 나를 소똥이 많지 않은 수행자들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없다.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묵묵히 소똥을 퍼 날라 풍요로운 내면의 정원을 가꾼 이들이 위대한 스승이 된다.> 

스님은 소똥을 부정적인 마음, 즉 분노와 좌절 등에 빠지는 것의 은유로 표현했다. 불행한 환경에 처했을 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지만 좌절하지 말고 날마다 조금씩 쉬지않고 퍼나른 소똥은 언젠가 풍요로운 정원을 가꾸어 아름다운 내면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까지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소똥을 퍼 나르는 것'은 그 비극을 삶을 위한 거름으로 환영해 맞아들이는 것의 비유이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다.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 가슴의 정원으로 날마다 퍼나름으로서 고통의 더미는 점점 줄어든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발견할 수 없는 아침이,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친절의 꽃들이 만발한다. 그 향기가 우리의 길 아래쪽으로, 이웃에게로, 친구와 심지어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로 날아간다. 그런가 하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의 열매가 가득 매달린, 구석에 서있는 지혜의 나무가 우리를 향해 구부러진다. 우리는 그 맛좋은 열매들을 전혀 아무건 계획 없이도 지나가는 행인과도 무료로 나눈다.               

우리가 비극적인 고통을 겪고 그것이 가져다준 교훈을 배웠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정원을 가꾸었을 때, 그때 우리는 깊은 비극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우리의 팔로 껴안을 수 있다...'그래요. 나도 압니다.'... 자비가 시작된다.>

 

우리는 스님이 말씀하신 '지혜로움과 내적고요와 자비의 마음'을 지니는 인간이 되기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노력, 행불행에 휘둘리지 않는 의연함을 지니기 위해 고통과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덕목이 자비일 것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롭기는 쉽지 않다.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없고는 불가능한 아름다운 마음이다. 

 

6. 울고 있는 소 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스승 아잔 차를 접견하기 위해 기다리던 젊은이가 무심코 한 사소한 공덕에 지나가던 스승은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너의 온 존재를 바쳐라.> 열정과 성실함 모두를 합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의 태도, 보상이 없을리 없다. 설사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행위에 최선을 다한 자부심과 긍지를 얻을 수 있다. 이보다 더한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꾸려 하지 말라.

  명상가가 되려 하거나

   깨달으려 하지 말라.

   앉을 때는 앉으라.

   걸을 때는 걸으라.

    아무 것도 붙잡지 말고 붙잡히지 말라.

    그 무엇에도 저항하지 말라.

    좋고 나쁨은 그대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난다.  -아잔차- >

 

 최선을 다하라고 하고는 또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니! 불교의 말씀은 그 심연의 뜻을 알기 전에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치 성철 스님의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처럼... 

있으면서 없는 삶의 무상함,  생명 지닌 존재들의 실체를 바르게 인식하고 제 마음을 드러다보는 성찰이 항상 필요하다. 

삶에의 욕망이 끝없는 인간, 실수를 거듭하는 우리는 어떠한 일 자체보다 그 일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하곤 한다. 

 

<슬픔은 당신으로부터 사라진 것만을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삶의 축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수시로 일어나는 마음속 욕망으로 이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

내가 젊었던 시절, 이 진실을 좀 더 깊이 인식하고 살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행복도 평화도 고통도, 세상의 그 무엇도 사실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