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지음 곽복록 옮김 을유문화사
오래 전에 사놓았던 책을 올해 들어서야 펴놓고 조금씩 오랫동안 읽었다.
속도감 있게 읽힐 내용들이 아닌 사상 철학책이어서 관념적인 내용들이 좀 지루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감동깊게 읽었던 기억으로 이 책을 샀으므로 끝까지 읽었다.
쇼펜하우어 (1778년~1860년)는 독일 국적의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글을 썼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후에 베른린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교단에서 헤겔과 대립했지만, 이미 저명했던 헤겔의 강의와 시간대를 같이 하다 그에 밀려 교수직을 그만 두고 은둔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옮긴이의 해설에 의하면,
인간 표상들 사이의 연관에는 그 충분한 이유 즉 충족 이유가 있어야만 하고, 객관들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이 충족 이유율인데, 그것은 무엇이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 존재의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표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에는 4가지 주요한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생성의 충족 이유율이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직관 형식과 오성의 선험적 형식인 인과의 법주에 따라서 현상들의 질료를 구성하는 활동인 거다. 그는 칸트의 12범주를 단 하나의 인과의 범주로 통일시킨다.
둘째는, 인식의 충족 이유율이다. 하나의 판단은 다른 판단을 기초로 진일 수 있으며, 그 어떤 경우에도 판단, 즉 개념의 합성은 인식의 충족이유율에 지배되는 것이다.
세째는, 존재의 충족 이유율이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란 그 부분들이 특정한 방식에 의해 다른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연결을 지배하는 법칙인 것이다. 예를 들어 기히학과 수학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네째는, 행위의 충족 이유율이다. 객관들의 4번째 집합은 다만 하나의 구성요소, 즉 인식하는 주체에 대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의지의 주체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 집합에 속하는 객관은 욕망의 원천 또는 주체로서의 자아이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동기란 그의 성격 속에 충족 이유를 가지는 것이므로 행위 주체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사상을 다섯 가지로 간추리고 있다.
첫째,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사상이다. 인간에게 인식된 세계의 속성과 존재 자체는 세계를 인식하는 정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둘째, 현상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오성이며, 고난의 세계속에서 조화를 성취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다.
세째, 인간의 신체를 포함하는 현상계 전체는 객관화된 의지이다.
네째, 의지는 그 경향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상을 취하는 것이며, 갈망하고 투쟁하는 힘이다.
다섯째, 객관 가운데 자아를 몰입시킴으로써, 즉 객관을 그 자체로서 인식함으로 이데아, 즉 영구 불변한 형상으로서의 의지가 파악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은 일반인들의 마음에 금방 와닿는 문장들은 아니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란 언제나 난국에 부딪치며 이것을 뚫고 나아가려고 함으로써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 난국이란 곧 플라톤의 경이로움이며, 그는 이것을 대단한 철학적인 정서라고 하였다... 진정한 철학자에게는 이 난국이 세계 그 자체를 바라보는 데서 생긴다...> 작가는 여러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희망이 성취된 만족은 결코 영속하는 것이 아니며, 또 소유와 행복이라는 것은 모두 우연에서 시간을 정하지 않고 빌어온 것이며, 따라서 다음 시간에는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통도 이러한 망상의 소멸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고통도 망상도 불완전한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현자에게는 고통도 항상 멀리 떨어져 있고 어떠한 일도 그의 마음의 평정을 방해받지 않는다... 즉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외계가 행·불행을 규정한다면, 우리 자신이 마음 속으로 만족하는가 안 하는가는 우리의 의지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을 설명하면서 이성과 그 이성에 따르는 모순을 지적한다.
제 38장에서는, 끝없이 일어나는 욕망과 그에 따른 인식과 의지에 관하여 설명한다.
<...외적인 동기 혹은 내적인 정서에 의해, 우리들이 갑자기 의욕의 무한한 흐름에서 벗어나서, 인식이 의지의 고역을 면하고, 주의는 이미 의욕의 동기에는 기울이지 않게 되고, 사물을 그 의지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 파악하고, 또한 이해 관심도 없고 주관성도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고찰하고, 그것이 동기인 한에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표상인 한에 있어서, 완전히 그 사물에 몰두하여 고찰하게 되면, 처음에 말한 의욕의 길을 찾아가서는 언제나 사라져 버리는 평안이 한꺼번에 저절로 생겨나서, 우리들은 완전히 행복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바로 내가 전에 이념을 인식하는데에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며, 순수 관조의 상태이다...>
이러한 인식의 자유를 가장 잘 단순명료하게 말한 것은 석가모니라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석가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열반'을 다룬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의지는 노력하고, 충족되고, 새로이 노력하고 이렇게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소원에서 충족으로 옮겨지고 또한 충족에서 새로운 소원으로 빨리 옮겨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복이고 안녕이다. 왜냐하면 충족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고, 새로운 소원이 없는 갈망은 권태, 즉 지루함이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원리를 음악의 창작을 예로 들어 자세히 설명하였다.
제 54장에 나오는 글이다.
<의지는 물 자체이고, 세계의 내적 실질이며, 본질저인 것이지만, 생, 가시적 세계, 련상은 의지의 거울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치 육체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처럼 의지에는 생, 세계, 현상이 불가분으로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가 있는 곳에는 또한 생의 세계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생에의 의지에는 생은 확실한 것이며, 우리들이 이 생에의 의지로 충만되어 있는 한, 아무리 죽음을 직면하더라도 우리들은 생존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물론 우리들은 개체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개체는 현상에 불과하며, 이유율 즉 개별화의 원리에 결박된 인식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인식으로써 개체는 그 생을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무에서 생긴 다음 죽음에 의해 그 선물을 상실하고 무로 돌아간다... 출생과 사망은 같은 방식으로 생에 속해 있고, 서로 교호 제약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생 이전의 과거나 죽음 이후의 미래를 연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지가 나타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현재'를 인식해야 한다...생 그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 생을 모든 방식으로 긍정하는 사람은 확신을 갖고 생을 끝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의지의 객관화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형식이며, 이 형식은 연장이 없는 점으로서 과거와 미래에 걸쳐 무한한 시간을 절단하여 마치 서늘한 저녁이 없는 영원한 정오처럼 움직일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마치 태양이 밤에 품에 빠져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태양은 끊임없이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죽음을 절멸이라고 무서워한다면, 그것은 태양이 "아 슬프다. 나는 영원한 밤 속으로 빠져들어간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 이와 반대로 생의 무거운 짐에 짓눌린 사람, 생을 좋아하고 생을 긍정하지만 생의 고뇌를 싫어하고 특히 자기의 몸에 엄습해온 가혹한 운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기대할 수 없고 자살에 의해 구제받을 수도 없다... 생의 형식은 끝없는 현재이며, 이념의 현상인 개체들이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것은 어쨌든 잠깐 동안의 꿈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은 우리들에게는 여기에서도 이미 무익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어리석은 행위이다. 우리들의 고찰을 더욱 진행하여 가면, 우리에게 자살은 더욱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교리는 변하고 우리의 지식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은 그릇됨이 없다. 자연의 진행은 확실하며 자연은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완전히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은 또 모든 것 속에 있다. 어떤 동작 속에도 자연은 그 중심점을 갖고 있다. 동물은 자기 생존에의 길을 확실히 발견하고 또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도 발견할 것이다... 인간만이 추상적 인 개념으로 자기 죽음의 확실성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만, 그런데 이 죽음의 확실성은 아주 드물게 어떤 특정한 순간에, 어떤 기회가 그것을 상상 속에 떠올리는 때에만 인간에게 불안을 품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의 객관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설득력이 크다.
<에픽테토스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관한 사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지당하다. 또 세네카가 '우리들을 압박하는 것보다 우리들을 무섭게 만드는 것이 더 많고, 우리들이 실제로 괴로워하는 것보다 사상적인 것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더 흔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저자는 이렇게 여러 철학자들의 말을 예로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공고히 한다.
제 57장에는 인간 존재의 욕구와 권태, 또한 순수한 인식에의 기쁨에 관한 탐색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구체화된 의욕과 욕망이며,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인 것이다. 이 욕망들을 품고 자신의 결핍과 필요를 제외한 불확실한 모든 것을 단념한 채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새로이 나오는 번거로운 요구들에 괴로움을 당하면서, 이 생존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배려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이다. 다음으로 이 생존의 유지와 직접 맺어지는 제 2의 요구는 종족 번식의 요구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각 방면으로 부터 아주 여러 가지 위험에 위협받고 있으며,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쉴 새없는 경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그는 문명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안전이란 없다... 무릇 생물에게 마음을 쏟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생존에 대한 노력이다. 그런데 생존이 보증되면,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른다. 그래서 이 생물들을 움직이는 제 2의 것은, 생존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이것을 느끼지 않게 되고, '시간을 죽이는', 즉 지루함을 면하려고 하는 노력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곤궁과 근심을 면한 거의의 사람들은, 다른 무거운 짐을 끝내 없애 버리고 나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이 되어서 이때까지 보내온 시간을 득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들이 전력을 다해 가능한 한 보존하려고 한 그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이 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권태는 결코 경시해야 할 악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얼굴에 참된 절망을 그린다... 곤궁은 서민의 쉴 새 없는 채찍이지만, 권태는 상류 사회의 채찍이다. 서민 사회에서는, 곤궁이 1주일의 6일로 대표되지만, 권태는 일요일에 의해 표시된다.
모든 인생은 철저하게 의욕과 성취의 사이를 흘러가고 있다. 소망은 그 본성에 따르면 고통인 것이다. 성취는 얼마 안 가서 곧 포만을 낳는다. 목표는 피상적일 뿐이고, 소유는 흥미를 빼앗아 가고, 새로운 모습으로 소원과 욕구가 다시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황량, 공허, 권태가 생기고, 이에 대한 투쟁은 곤궁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소망과 만족이 잇따르는 시간적 간격이 너무 짧지도 않고, 너무 길지도 않으면, 이 둘에 의해 생기는 고뇌는 최소한으로 돠고, 가장 행복한 생활로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통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거나 가장 순수한 기쁜이라고 부르려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을 실제의 생활에서 빼내서, 우리들을 그것에 대한 무관심한 방관자로 변하게 하는 것뿐인데, 이것들은 즉 모든 의욕이 관여할 수 없는 순수한 인식이며 미의 향락이며, 예술의 순수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희귀한 소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지며,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슬쩍 지나가는 꿈으로서 베풀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소수의 사람들은 더 높은 지성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둔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느끼고, 그들과 대단히 다른 사람들 사이에 고립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고락(苦樂)은 고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에게는 순수하게 지성적인 향락은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순수한 인식 속에 있는 기쁨은, 그들에게는 거의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의욕만을 의지하고 있다...
그 의지는 그들의 생존이 인식보다 오히려 의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활동을 그만두고 있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동(動)과 반동(反動)은 그들의 유일한 요소이다...>
명소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 진귀한 동물을 보고 자극하거나 장난하는 일, 카드놀이 등을 예로 들었다.
모든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방황하는 것이라는 그의 견해를 플라톤의 <공화국>에 나오는 고뇌의 정도에 준하여 증명하기도 한다.
<과도한 기쁨은, 언제나 생활 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망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즉 끊임없이 새롭게 고뇌를 만드는 소망 혹은 불안의 영속적인 충족이다. 이런 종류의 망상은 각기 반드시 후에는 망상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고, 그 망상이 없어진 후에는 망상의 출현에 의해 기쁨이 생긴 것과 똑같은 정도로 쓴 고통을 가지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망상은, 뛰어내리는 것밖에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높은 곳에 비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높은 곳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소망에서 소망으로 지칠 줄 모르고 노력하고, 얻어진 만족이 아무리 많은 것을 약속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곧 굴욕스러운 과오로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또한 우리들은 우리들이 다나이데스 자매들의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언제나 새로운 소망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어도, 그 망상의 뼈저림에도 불구하고 삶은 늘 새로운 소망을 품어야 하는 일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순간의 찬란한 빛처럼, 그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기꺼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좋지 않겠는가!
제58장은 인간의 삶의 비극성과 희극성에 관하여 서술하며 인간이 신령에 의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한다.
<모든 개인의 생활은, 그것을 전제적이고 보편적으로 개관하고 가장 현저한 특징을 끄집어내서 보면, 본질적으로 언제나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의 활동과 괴로움, 순간순간 그칠 새 없는 조롱, 각 주간마다의 소망이나 공포, 각 시간마다의 사고,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나쁜 장난을 쳐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우연사에 의한 완전히 희극적인 장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기대는 무자비하게 운명에 짓밟히고 전 생애는 오류에 차고, 고뇌는 점점 더 증대하여,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언제나 비극이다...>
석가는 이것이 자연의 실상이므로 자신의 무명(無明)을 걷어냄으로 세상만물의 실체없음(空)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의거하여 여러 영, 신, 천사를 만든다.그러면 거기에는 끊임없는 희생, 기도, 사원장식, 맹세와 그것의 취소, 순례, 경례, 성상의 장식등이 바쳐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사건은 모두 영과 신들의 반응으로 간주된다.이것들과의 교섭이 생애의 절반을 채우고 끊임없이 기대를 가지게 하고, 또한 착각의 자극에 의하여 현실적인 존재들과의 교섭보다도 더 흥미있게 될 때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성의 표현과 징후인데, 한편으로는 조력과 보좌, 또 한편으로는 작업과 기분전환에 대한 필요성이다. 그리고 인간은 재난이나 위험에 부딪혔을 때, 귀중한 시간과 힘을, 이것들을 피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기도나 희생을 위해 쓸데없이 사용하여, 제1의 욕구와는 반대의 것을 하게 되어도, 그 대신 몽상한 영계와 공상적으로 교섭함으로써 제2의 욕구에는 오히려 점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미신의 도저히 경시할 수 없는 이득인 것이다...>
과학 문명의 발달과 상관없이 수많은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이유이다.
믿음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수단이 된다.
제61, 62, 63장에서는 인간의 이기심과 국가와의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모든 개체는 무한한 세계에 있어서는 아주 보잘 것없고 무(無)와도 같은 미미한 것이긴 하지만, 또한 자신을 세계의 중심점으로 하고 자기 자신의 생존과 복지를 무엇보다 먼저 고려하고,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것을 위해 언제나 다른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대해의 물 한 방울인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도 멸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심정은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고유한 '이기심'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내적인 투쟁을 무서울 정도로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기심의 존립과 본질은 앞서 말한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립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성을 갖춘 이기심 그 자체에 닥쳐오는 그 자신의 나쁜 결과들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며, 각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 만인의 행복 속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각자는 만인의 행복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했다... 불화가 개인들의 싸움으로서 국가 조직에 의해 추방되면, 이번에는 국민들의 전쟁으로서 외부에서 다시 들어와서, 피비린내 나는 희생을, 현명한 대비책을 통하여 하나하나 면제헤 주었던 누적된 부채로서, 대규모로 단번에 회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모두가 수천 년의 경험에 기초를 둔 지혜에 의해 결국 극복되고 제거 된다고 하면, 결국은 지구 전체의 인구 과잉이 초래될 것이며, 그 무서운 재해에 이르러서는 이제 대담한 상상력만을 눈앞에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 인간은- 안팎으로 끊임없이 다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전쟁을 불사하는- 지구상에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인 생물체의 순환에 불과하다.
<생에 대한 하나의 의지가 그 부분이나 형태의 모든 다양성 속에서 현상화하고, 객관화한 것이 세계이다. 생존자체와 생존의 방식은, 부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전체에 있어서도 오직 의지에서 나온다. 의지는 자유롭고 전능하다. 의지는 어떠한 것에서도, 자기 자신을 자체로 하여,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계는 이 의욕의 거울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유한성, 모든 고뇌, 모든 고통은 이 의지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의지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선과 악, 도덕에 대한 의지에 관하여 피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죽음과 해탈, 관조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미적인 희열은, 대부분 우리들이 순수한 관조의 상태에 들어가, 그 순간에 모든 의욕 즉 모든 소망과 근심을 떠나, 말하자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하여, 자기의 끈임없는 의욕을 위해 인식하는 개체, 즉 객관들의 동기가 되는 개체의 상관태가 아니라, 의지를 떠난 영원한 인식 주관 즉 이념의 상관태라고 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이 잔인한 의지의 충동에서 해탈되어, 말하자면 무거운 지상의 대기에서 떠오르는 이 순간은, 우리들이 알 수 있는 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극소수의 의지의 부정에 이른 사람들의 대하여 '파우스트'등을 예로 들어 자세히 이야기한다.
의지가 격하면 격할수록 의지의 항쟁 현상도 심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심하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無)이지만 이러한 무에 저항하는 본성이야말로 생에 대한 의지이고 우리들 자신이며 또한 세계라고 말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끝없이 이어지는 '자신과의 투쟁'이며 생존의 모든 의미부여는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의지일 것이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이 모든 과정이 그저 자연에 속한 우주만물의 이치일 뿐이다.
이 진리를 벗어나, 지나친 외부와의 투쟁에 매몰되는 일은 어리석은 소모에 지나지 않는다.
혼란한 사회에서 생존의 주안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고 살아가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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