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종교, 철학, 심리학

니체와 불교

나무^^ 2021. 10. 28. 17:37

철학자 니체와 관심있는 불교에 관한 책이어서 읽어보았다.

지은이 박찬국님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서양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주요과제로 삼는다고 한다. 

1. 서론에서는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과 차이, 국내외의 연구동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본 연구의 방향과 의의,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2. 니체와 불교의 공통된 문제 의식 : 고통과 염세주의의 극복

불교는 우리가 무상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서 고통스럽다며 집착을 버리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고 한다. 인연 따라 생성 소멸하는 세계에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번뇌세상 자체가 열반세상'인 것을 깨달음으로 염세주의의 극복을 지향한다. 그러나 내가 불교공부를 하면서 안 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 그러하나 종교로서의 불교는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법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맹목적인 구복신앙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니체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도 염세주의의 극복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은 죽었다.'며 근대인들이 그동안 믿었던 초감성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알렸다. 유럽에서 기존의 가치가 힘을 상실하며 니힐리즘이 지배하는 '중간상태'에 이른 것이다. 니체가 29세에 쓴 처녀작 '비극의 탄생'은 염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영원회귀와 운명애의 사상을 피력한다. 즉 니체도 불교도 염세주의는 종착지가 아니라 통과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초기 니체의 철학적 문제의식에 있어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대해서 살펴본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열반에서 궁극적인 구원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를 기독교보다 더 심원한 종교로 인식했다. 니체는 이런 견해를 수용하면서 불교는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내면의 황홀경으로 도피하는 종교라고 보았다.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미다스왕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나에게 그대가 듣지 않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인 것을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자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니체는 이러한 염세주의가 당시 그리스인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당시 화려하게 꽃피었던 다양한 예술은 염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였고 그것은 그리스 비극에서 정점에 달한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디오니소스적 황홀 상태를 지향하다 보면 인도의 불교에 빠진다고 보았다. 또 로마인들의 아폴론적 충동은 세계정복을 통해 혼합적인 비극을 창조하여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길로 나아간다고 했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고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후기 니체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들을 '힘에의 의지'라는 하나의 원리로 설명한다. 그는 이상적인 인간으로 괴테를 들었다. 곤경에 처해서도 냉정한 정신으로 긍정하는 아폴론적인 절도와 균형, 우아함과 기품이 우세한 합일의 상태라고 필자는 설명한다.

'힘에의 의지는 외부의 세계를 동화하고 지배하면서 성장하고 강해지려는 의지이다.' 이는 니체의 초인사상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향하는 고귀하고 이상적인 인간은 자신의 정념들의 주인이 되어 충만하고 자유로운 자아를 즐길 줄 알고 내적 평온과 긍지를 갖는 인간이다. 따라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넘치는 힘을 나누어줄 뿐 우월의식을 향유하지는 않는다. 즉 강건한 정신력에서 비롯한 덕이다. 이러한 내적인 힘은 고통스러운 삶에 의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고양하고 강화함으로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과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외적인 상황을 개선하는 것에서보다 자신의 내적인 힘을 고양시키는 것에서 찾는다는 점은 불교의 연기사상과 유사하다.

 

무상함을 가장 강하게 느낄 때는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이 허망하게 끝났을 때이다.

불교는 모든 것이 무상함을 '제행무상'이라 말하며 인연따라 생성소멸하는 세계에서 이 법을 깨달음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설법한다. 즉 일체개고의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통찰하므로 그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허구적인 자아의 집착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므로 불교를 알지 못하는 이도 쉽게 이해알 수 있다.

나 역시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했을 때 느꼈던 뼈저린 고통을 불교경전을 공부하며 깨달음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니체와 불교는 신이나 제도에 의거하지 않고 경험과 관찰에 의하여 고통 극복의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거 현실적이고 실증적이다. 또한 선악의 피안에 서서 독립적인 정신과 잠재력을 지향한다.

 

3. 니체의 불교 해석과 평가 

니체가 불교를 기독교보다 뛰어나다고 보는 두 가지는

첫째, 기독교가 인간의 고통이 원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면서 신화적으로 설명하는데 반해 불교는 인간 삶에 대한 냉정한 관찰을 통해 해명하려고 하는 점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실증주의적 종교라고 한다.

둘째, 신에 의한 정해진 영원 불변의 선과 악 대신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부에 따라 선악의 개념을 규정한다. 불교의 경우 궤율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자신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어리석음인 것이다.

니체는 불교가 나타나게 된 생리적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본질적 성격을 위생학 내지 치료학으로 규정한다. 불교가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도 상류층의 힘에의 의지가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위생법인 것이다. 

기독교는 불교와 달리 학문을 한 상류계급이 아닌 정복된 자들과 억압받는 고대 로마 제국의 최하층 계급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지배자들을 지옥에 보내는 일종의 정신적인 복수와 적개심을 지니고 있다. 또한 육체와 본능적 충동을 죄악시하며 투쟁한다. 따라서 신의 은총으로서만이 내세에 천국에 이른다고 한다. 반면 불교는 깨우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밝은 상념을 북돋우며 인간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는 종교이다. 

 

니체는 기독교가 수많은 피지배인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이용한 잔인하고 성대한 개념과 가치를 야만인을 길들이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또한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 것은 믿음이며, 열정적인 신의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인격적인 존재로서 젊은 성자 예수, 아름다운 성처녀 마리아 등 신의 이미지 구현으로 신앙심을 고조시켰다. 니체는 기독교의 3가지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이 대중들을 지배하기 위한 허구임을 드러낸다.  

이에 반해 불교는 냉정하고 객관적이여서 모든 사물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며 탐구하여 현세에서 행복하기를  추구하는 실증주의라고 표현한다.

 

말년의 니체는 '도덕적인 편견들에 대한 사상'이라고 부제를 부친 <아침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의 책에서 플라톤적인 형이상학과 기독교에 의해 규정되어진 도덕적 편견들로 인해 인간들의 건강한 삶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것들과의 대결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초월적 신이나 도덕에 대한 믿음이 일시적인 위로는 될 수 있으나 사람들을 더욱 나약하고 비겁하게 만들 뿐 아니라 병적으로 내몰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니체는 자신의 철학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위생법이라고 인정하지만 불교의 위생법이 고통을 완화하고 피할 수 있게 하는데 비해 자신은 사람들에게  발랄하고 강건한 생명력을 갖게 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고양하는 위생법이라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예수와 부처의 정신을 비교하면서 동일한 생리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내면적인 평화에로 도피해 들어가려는 정신이 같다고 한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 '유럽의 부처'에 비유하는 것은 영원불변의 실체나 절대자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실증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목표로 하는 것은 '고통으로의 해방'에서 더 나아가 '건강한 삶에의 회복'이다. 넘치는 힘 때문에 고통을 요구할 수 있는 정신은 그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여 강함과 기쁨도 커진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주창하고 불교는 삶에 대한 허무적인 부정을 주창하고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4. 니체의 불교 해석과 평가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필자는 니체가 불교를 고통에서의 도피라고 보는 주장을 비판한다. 부처는 갈애와 집착에 사로잡힌 삶을 고통으로 보고 극복하려는 것이며 니체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고통이 갖는 긍정적 의미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진정한 불교도는 삶의 근본적인 무상함과 분열에 대해서 회의와 함께 고뇌하는 정신적 깊이를 갖춘자로서 허구적 자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생로병사를 두려워하는 마음 자체가 바로 고통의 원인임을 통찰하여 여여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적 고양을 촉구한다. 이는 평정을 지키려는 마음 수양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수시로 요동치며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고 무명(無明)에 빠지는 순간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니체가 말하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정신적 강건함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은 사물과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탐진치에 빠져 함몰되지 않는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이다.  

 

5. 니체와 불교의 사회사상과 각각이 지향하는 인간상과 덕들의 차이

니체는 인간들간의 대립과 투쟁, 갈등이 불가피하고 제거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대다수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탁월한 소수가 위대한 문명을 건립하기 위한 지반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교는 자기중심성을 버리면 대립과 투쟁이 제거될 수 있다고 본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며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평등사회가 실현되기 어렵지만 지향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 철학은 민주주의의 위계질서를 내세우고 여성적인 유약함에 대해서 남성적인 강함을 피력하는 철학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긍지에 찬 인간'은 당시 그리스 귀족이 지향하던 이상적인 모습이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로마인을 자신이 지향하는 건강한 인간들의 표본으로서 '사실에 대한 감각, 고결한 본능과 취미, 방법적 탐구, 조직과 통치의 천재, 인간의 미래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강점으로 유럽인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불교가 말하는 깨달은 자의 모습은 이러하다.

'마음을 비워 고요함을 즐기며 함이 없고 욕심이 없으며...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가엾게 여기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이를 크게 위로하며 중생을 길러주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제하며...(아함경)' 불교는 그들이 말하는 긍지나 명예조차 집착으로 보며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니체와 부처의 죽음에 대한 비교에서 <보왕삼매론>에 나오는 9가지 바라지 말 것은 늘 보며 가슴에 새겨야 할 내용이다. 

오랫동안 병으로 괴로웠던 니체 또한 '나는 병에게서 나의 철학도 얻어 내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 최후의 해방자다.'라고 말한다.

니체는 고통에 대한 긍정을 말하지만 부처는 모든 고통을 인연에 따라서 생성소멸하는 것으로 여여하게 바라보라 한다.

 

필자는 불교가 내세우는 덕들은 니체가 주장하는 덕들과 달리 부드럽다고 말한다.

긍지나 파토스가 아니라 하심(下心), 멋진 야수성이나 호전적 정복 대신 자비, 열정 대신 청정한 마음, 책략 대신 진실됨, 분노 대신 이해와 포용, 본능적 쾌락 대신 열반의 평정, 모험 대신 명상, 존재자들을 지배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 대신에 존재자들의 성장을 돕는 지혜를 주창한다.

또한 니체는 약함을 경계하고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을 큰 악덕으로 간주하지만 불교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강한 것들을 악덕으로 경계하고 탐욕과 분노를 경계한다. 불교에서 깨달은 자는 타인에게 준다는 의식없이 주어도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니체의 경우 자신의 힘이 넘쳐서 베풀지만 받는 이는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지혜와 자비라는 잠재적인 능력을 개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 강화는 자기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가 말하는 진정한 힘은 그러한 자기애착을 버리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강화'도 부처의 자기애를 버리라는 한없는 '하심'도 실천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그 이상향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6. 영원회귀와 열반

니체가 사유한 영원회귀 사상은 '가장 무거운 사상'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을 모든 고통이 사라진 피안과 미래라는 환상을 통해서 위로하고 달래는 값싼 위로가 아닌 인간을 오히려 위험에 직면시켜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니힐리즘이 극복된 상태로서의 영원회귀는 모든 것이 의미 충만하며 모든 순간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즉 전통형이상학을 지배하던 덧없이 생성소멸하는 세계에 대한 복수와 원한의 정신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영원회귀의 세계를 흔쾌히 받아들여 인생을 기쁜 마음으로 긍정하고 사랑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자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뺄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니체에게 이 세계란 힘에의 의지들이 유희하는, 신적인 사유로 우주적인 신의 유희를 반복하는 것이다. 초인은 세계의 창조적 유희에 부응하면서 스스로 창조적으로 유희한다.

'지난 날의 사람들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시키는 것, 내개는 그것만이 구제다! 의지, 그것은 해방시키는 자의 이름이며 기쁨을 가져오는 자의 이름이다.' 니체는 세계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순간이라도 긍정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긍정하는 것이며, 과거에 대한 긍정으로 현재와 미래도 긍정하는 것이며 세계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은 마음 자체를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마음이나 사회적 편견, 선입견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과 유사하다. 또 창조적이며 세계와 함께 기쁘게 동참하는 유희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니힐리즘의 극복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니체가 말하는 신비체험에 의한 영원회귀의 경험과 운명애는 강인한 힘에 대해 긍지를 품는 자아이며 이는 타인과 비교 대립하며 모든 것을 포용할 때까지 확대하며 창조하기를 목표로 한다. 이에 비해 부처의 깨달은 마음은 분별력을 초월하여 어떤 경우에도 걸림이 없이 여여하게 존재할 뿐이다. 자아의 진정한 확대는 세계와 대립된 자아를 버리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필자는 황준연의 선불교 생사관을 인용하여 '도를 통한 이는 이 몸을 그림자로 보고 꿈속의 일로 본다. 따라서 그림자나 꿈 속에서 보았던 일은 꿈이 깨고 나면 헛것이듯, 삶 또한 그렇게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에겐 생사가 없다.'라고 말한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영원회귀의 긍정이 아니라 윤회의 수레바퀴로 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생성 소멸에 대한 애착이나 염증에서 벗어나 항상 평정한 마음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저자가 인용한 '공(空)의 세계는 시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하며,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며, 사물들이 고립과 단절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으며 서로 받아들이고 감싸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화엄철학에서는 이것을 사사무애의 진리라고 한다. 공은 사물의 차별성을 습관적으로 강조해 온 무지가 사라진 지혜와 평등성의 세계다.' 라는 상의상자(相依相資)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의 차이를 지닌 채 한 몸이므로 존재자들의 고유한 본질을 구현하도록 도우려고 한다.

사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삶의 현실 속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부처의 사상은 끊임없는 수양이 필요한 일이다.

 

7. 자기극복에 대한 니체와 불교의 사상에서 보이는 유사성의 차이

부처 역시 금욕과 고행으로 해탈을 얻으려 했으나 고통과 고뇌의 원인은 세계와 대립되는 자아에 있음을 깨닫고 마음의 무지에서 벗어났다.

니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언어구조의 현혹과 신학자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든 기술에서 허구적 관념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불교의 허구적 자아 개념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니체가 부정하는 것은 자유의지나 자유 자체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왜곡되고 병적인 이해이다. 인간의 자유와 통일성은 강한 힘에의 의지를 구현함으로써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다양한 충동들에 대해서 자신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인간만이 긍지를 지닐 수 있고 그것이 참된 의미의 양심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권적 개인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훈련과 극복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니체는 우리의 자아가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고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아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자아의 통일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며 목표인 것이다.

 

자기극복과 관련하여 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 근본으로 마음챙김과 바른 집중을 든다.

마음챙김이란 모든 현상세계의 생성소멸의 모습을 정관(靜觀)하면서 일체가 무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바른 집중이란 마음을 집중하여 봄으로 욕망에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오온(色·受·想·行·識)에 대한 집착을 털어내는 수행이다.

우리가 허구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을 니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힘에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인격신이 다스리는 천국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자신이 진리를 믿고 있다고 생각할 뿐 그 믿음이 병든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견해는 불교의 유식불교의 통찰과 비슷하다.

보통 자기라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것은 아뢰야식이다. 이 아뢰야식의 연속성에 구속되어있는 말나식은 과거의 업과 애착에 의해서 왜곡된다. 말나식의 4가지 성격(我痴· 我見· 我慢· 我愛)은 항상 번뇌와 함께 기능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극복이다.

니체는 정신과 몸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 인식작용과 의식으로부터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로서의 생리학으로 사유한다. 병든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지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지배되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누구나 탐진치에 시달리며 살지만 어느 순간 그러한 삶의 허망함 속에서도 참되고 풍요로운 삶을 열망하게 되는 것은 그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고 극복되어야 할 욕망들에 대한 자각과 선한 열망들을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불교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나에 대한 집착을 깨고 참된 나를 찾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깨달음 내지 열반은 욕망과 모든 갈애를 포기할 때 도달하는 것이며 수상행식이 정화되어 맑게 발현되는 상태이다.

니체에게는 도덕적인 순수자아의 해체가 문제가 되는 것에 반해 불교에서는 자기중심적 자아의 해체가 문제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강한 의지로 자신을 단련하고 훈육함으로써 일상적인 자아보다 강력하고 폭넓은 자아를 형성한 사람이다. 불교는 모든 고통과 염세주의는 세계와 대립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따라서 의지적 구성에 대해 반대하며 우리에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이 개화되면 오온이 정화된다고 했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주시하면서 마음을 챙기는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니체가 예로 드는 초인들이 강한 자아를 구성했지만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8. 니체의 종교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프롬의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책에서 신이란 관념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 내지 최상의 선을 상징한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렇게 신이라는 관념을 숭배자들의 정신적 상태나 성격구조에 입각해 파악한다는 점에서 니체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또한 유신론적 기독교와 초기불교 · 도교 · 유교 등의 비유신론적 관점은 서로 다르기는 하나 싸울 필요 없이 모두 인본주의적인 종교라고 일컫는다. 특히 가장 좋은 본보기로 초기 불교를 들어 깨달은 자가 도달하는 열반은 무력함과 굴복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힘을 발전시킨 상태라고 하였다.

니체는 기독교 도덕을 인간을 길들이는 도덕의 전형으로 보았다. 또한 민주적 유럽에서 명령하는자와 순종하는 자의 필요성을 말하며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종교야말로 신봉자들을 강건하게 만들었던 최고의 종교라고 보았다. 니체가 경험한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신성을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 

프롬은 기독교적 이상이 아닌 그리스 ·로마의 이교적 이상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증거로 과거 2세기 동안 일어났던 광적인 전쟁과 현대의 올림픽 경기에서 나타나는 광적인 민족주의를 제시한다.

니체는 자기애착에 입각한 서로간의 경쟁에 의해서 인간들의 문화가 성장할 수있다고 보면서 부처나 예수의 모든 인간들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을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필자는 니체의 이상보다는 불교의 이상을 추구해야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정신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식을 지혜로 변화시키는 노력과  자비애타(慈悲愛他) 정신으로 변화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모두가 노력한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

누구나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은 무명(無明)과 무지(無知)로 인해 겪는 고통스러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