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 집 앞 그윽하게 물든 삼성산으로 친구들이 소풍을 왔다.
지난 토요일 직장일을 마치고 바쁘게 온 두 친구와 또 한 친구, 나 넷이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둘레길을 걸었다.
새빨간 단풍나무, 샛노란 은행나무 등 곱게 물든 숲길 수북히 떨어진 낙엽을 밝으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유아숲 넓은 터 평상에 식탁보를 펼치고 준비해온 김밥과 과일, 맛있는 빵, 제주 쑥떡, 커피 등을 꺼내놓았다.
이 친구들은 문화센터에서 함께 인물화를 그리면서 알게 되어 봄 가을이면 우리집 앞산으로 소풍을 온다.
그동안 있었던 사적인 이야기, 사회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서로 공감하였다.
나처럼 자그마한 체구의 후덕한 친구는 요즘 시간제 일을 한다고 한다. 몸이 좀 약해보이지만 활동적인 생활이 건강에 더 좋은 것 같았다. 그 친구가 전에 우리들에게 선물한 호주산 빨간통 크림과 간편 옷걸이를 잘 쓰고 있다. 그냥 와도 되는데 맛있는 빵을 많이 사왔다.
이제는 대학생 딸과 둘이 사는 친구는 영어실력이 좋아서 무역회사를 다니는데, 요즘은 주말 알바까지 한다고 한다.
얼마전 딸의 동의하에 함께 살기 너무 힘든 남편과 결국 헤어지고, 열심히 일을 하지만 내 집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집이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그녀를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남편 덕에 사랑스러운 딸을 얻어 잘 키웠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자 위안하였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자주 이야기 하더니, 마음 약해서 길에 버려진 새끼고양이까지 데려다 세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도저히 못본 척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는데, 이 고양이가 젤 애교가 많다고 하니 거두어준 은혜를 아나보다.
이삼십대처럼 날씬하고 예쁜 친구는 건강미가 넘친다. 몇 년전 부터 연애를 하더니 볼 때마다 더 예뻐진다.
이 친구는 지하철공사에 다니며 부모님 모시고 두 아들과 함께 산다. 그리고 여동생이 화가여서 출판한 책을 하나 선물로 주었다. 그 책의 제목이 '흔한 날'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일상의 흔한 날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짤막한 몇 문장으로 엮은 자그마하고 도톰한 이 책은 보기보다 감동이 있다. 결혼하지 않은 작가는 부모님, 형제, 조카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다정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옮기지는 못하지만 짧은 글 몇 개를 소개해 본다.
2011. 1. 28. 그림
몇 달 전부터 큰언니가 초상화 그리기를 배운다.
나는 이미 잊어버린 그리는 즐거움과 설렘을 언니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언젠가 언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림의 다른 모습은 두려움과 고통이라는 것을.
2012. 10. 6. 닮았다
어제 엄마가 눈썹 문신을 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이라 생각했는데
큰언니가 옆에 앉자마자 궁금증이 풀렸다.
2013. 5. 26. 보내다
작업실 청소를 하다가 갓난아기 정기를 그렸던 그림을 찾았다.
나도 이렇게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정기도 자라고 나도 자랐기 때문이다.
정희와 나는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으로 얼굴의 주름을 펴는 동작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중력은 힘이 세다.
어쩌면 시간은 앞도 뒤도 아니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2014. 1. 6. 밥짓는 시간
우리 집은 항상 새벽 여섯 시 반에 아침을 먹는다.
2014. 1. 8. 불꽃 머리
방학전 정기는 매일 여섯 시 반에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방학 중 정기는 매일 여섯 시 반에 밥을 먹고 다시 잔다.
2015. 8. 20. 쓸데없는 말
친하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관계인 것 같다.
어제 정희랑 신경전이 있었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쓸데없는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2017. 5. 17. 낮잠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따뜻한 이불은 볕.
2018. 3. 14. 다짐
부자가 되면 매일 딸기를 먹겠다.
2019. 11. 7. 새우튀김
정기가 만 원에 열 개가 담긴 새우튀김을 사 와서
네 개는 정기가 먹고, 두 개는 내가 먹었다.
나머지는 두 번 째 방문자를 위해 남겨두었다.
큰언니가 와서 새우튀김을 두 개 먹고 깜박 잠들었다.
나머지는 다음 사람을 위해 남겨두었다.
편안하고 무심한 듯 담백한 그림과 함께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 이 그림일기에는 착하고 성실한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이 많이 느껴진다. 예전엔 이렇게 희생적인 어머니들이 있어서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이 잘 자랄 수 있었다. 내가 작가의 엄마라면 이런 딸이 있어서 많이 행복할 것 같다. 나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제목은 '흔한 날'이지만 작가는 그 흔한 날들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가꾸었다.
'흔하면 천해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반복되는 나날이 흔하다보니 우리는 그 가치를 잊어버리곤 한다.
오늘같이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날은 그 흔한 날들 중에 많이 기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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