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超 황안웅 선생의 말과 글
2011. 1. 10 (월) 영남일보
木 (나무 목 : 땅 밑 뿌리와 땅위 줄기가 있는 모양)
흔히 말하는 '나무'라는 말은 바탕지어진 땅을 중심으로 땅 속에 묻힌 뿌리 부분과 땅 위로 올라온 줄기 내지는
가지 부분의 모양을 본뜬 것으로 '나옴'과 '묻힘'을 합성한 '나묻'이 곧 '나무'가 됐다.
그래서 본디 땅 속에 묻힌 한 알의 씨앗이 땅 위의 태양을 향해 흙을 뚫고 돋아난 것이 곧 '나무'이기 때문에
'木(나무 목)'은 흙을 무릅쓰고 돋아난 것이라 '冒(무릅쓸 모)'라 하여 '木'의 소리값을 '冒'에서 취한 것이다.
무릅쓰고 나오기 이전의 밑은 뿌리이며, 위로 올라온 줄기나 가지는 뿌리보다는 더 무성하기 때문에
'木'의 밑 부분에 한 획을 그의 '本(뿌리 본)'이라 하였고, 위로 나온 부분에 한 획을 길게 그어 '末(끝 말)'이라 하였으니
땅 속에 묻힌 뿌리보다는 위로 나온 줄기나 가지가 훨씬 무성하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무성하느냐 하면 뿌리를 '셋'으로 치면, 지면은 '다섯'이며, 뿌리가 지면을 통해 나온 부분은
'셋'에 '다섯'을 합친 수이기 때문에 '여덟'이 곧 줄기나 가지가 차지하는 수라 여겼으므로 예부터 '목'이 지니는 수는
'三'과 '八'이라 하였다.
즉 본말의 수가 각각 '三'과 '八'이기 때문에 땅 속에 묻힌 '三'의 뿌리가 지하수와 거름을 부지런히 빨아들이면,
'八'의 줄기와 가지에 달린 잎들이 햇빛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혀낸다는 것이 곧 나무가 지닌 광합성의
구조이다.
이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나무의 구조도 근본과 줄기 내지는 가지가 있다는 사실에서 복잡한 인간사를 유추해 낸 말이
곧 '대학'에나오는 "물에는 본말이 있고, 사에는 종시가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는 말이다.
아무리 하찮은 하등식물일지라도 뿌리에 걸맞은 줄기와 가지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복잡한 인간의 일일지라도
마침과 시작이 있을 것이니 "그 먼저 할 바와 뒤에 할 바를 잘 알면 곧 도에 가까우리라(知所先後 則近道矣)"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뒤로해야 할 것인가?
제일 먼저 건실하게 뿌리를 잘 내린 나무가 큰 나무로 자랄 수 밖에 없으니 장차 큰 나무로 성장시키려거든
반드시 기초를 튼튼히 해 아무런 막힘없이 잘 유지해나가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니 근본이 세워지면 도가 생기게 된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고 하였다.
좋은 나무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고, 뿌리가 튼튼해야 잘 자랄 수 있는 법이다.
뿌리를 튼튼히 하는 '三'의 도리를 다 해야 땅이 지니는 '五'의 덕을 고스란히 잘 받아 '八'로 잘 뻗어나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이 곧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큰 가르침이다. 그러니 천년을 이어온 저 낙락장송이 그저 낙락장송인가?
애당초 낙락장송으로 자랄 수 있는 좋은 씨가 손이 타지 않을 장소에 떨어져 심한 풍우를 뚫고서 굳게 자라며
뿌리 밑을 받치는 반석까지도 녹여낼줄 아는 끈질긴 생명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낙락장송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애당초 땅을 탁 뚫고 나온 그 질긴 힘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낸 인고(忍苦)의 경력이 낙락장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