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자연, 과학 외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나무^^ 2021. 4. 14. 13:09

 

제임스 E . 매클렐란 지음

전대호 역음

 

학창시절 , 재미있어야 하는 세계사 시간이 많은 양의 압축된 내용을 암기해서 시험을 보아야 하는 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부담없이 세계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서 이 책을  사보게 되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느낌도 함께 간추려 본다.

 

1 부. 유인원에서 알렉산더까지

 

1 장 인류의 탄생 : 도구와 도구 제작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세계가 다양한 신들로 가득차 있다고 강하게 믿었다. 따라서 그 믿음은 종교적 의식으로 공동체를 결합시키고 효율성을 결합시키는 사회적 기술이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과학문명이 놀랍게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맹목적인 믿음이 일부 종교단체들의 권력 아래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무명(無明)이 여전하다. 평화를 구현해야 하는 종교를 구실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루었는가!  인간들이 두려워했던 자연세계의 경이로움 대신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일삼는 것을 보면 인간의 의식세계는 늘 향상과 퇴행을 함께 하며 발전해가고 있다.

 

2 장 농부의 지배

신석기에 이르러 기술의 발달로 과잉생산물이 축적되면서 출산율이 높아졌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계급사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높아진 인구밀도는 농촌산업을 일구어 교역량을 증가시키며 도시를 출현시켰다. 전형적인 예로 기원전 7350년에 2천 명이상의 인구가 살았다는, 부유한 도시 '예리코'는 잉여저장물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또한 선사시대의 과학의 사례로 영국 솔즈베리 평원의 '스톤헨지'(매달린 돌이라는 뜻)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거석 구조물들은 저밀도인 농업도 기념비적 건축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잉여를 생산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기념물이 가진 천문학적인 기능은 태양과 달의 숭배를 위한 종교적 시설인 동시에 달력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섬의 생태학적 한계 때문에 석상 제작, 천체 관측, 목재 연료의 문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니아 등의 비옥한 지역에서 거대한 기술적 변화를 겪게되는 문명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고교시절 고대의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등을 달달 외었던 기억이 난다.

  

3 장 파라오와 기술자

생계형 농업이 밀려나고 많은 잉여곡물을 공출, 저장, 재분배하는 경제가 자리잡으며 생산 시스템을 관리하는 파라오나 왕이 지배하는 정치 권력이 발생했다. 도시혁명은 물관리를 통해 고밀도 농업과 중앙집권적 권력, 군대형태의 강제 징집, 세금징수, 확대된 교역, 궁전과 신전, 종교 기관, 교육 등을 가능케 했다. 관료중심적인 조직 사회에서 지식인 계급이 수학, 의학,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관개농업에 기반을 둔 모든 문명은 복잡한 관료체제를 발전시켰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피리미드와 신전으로 이루어진 벽돌 건축 복합단지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가 그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황허강 유역의 물을 잘 다스렸던 우왕과 은나라가 특히 문명을 발달시켰다. 청동세발솥은 관료들에게 부여한 행정권력을 상징했다. 중국이 최초로 통일된 시기에 기념비적인 건축물로는 만리장성이 있다. 예전에 그 역사적인 장소를 거치며 느꼈던 감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진정한 의미의 신세계 최초의 도시는 멕시코 중부 몬테알반에 세워진 계획도시였다. 이 도시는 3 개의 국지적인 세력이 연합 혹은 합병하여 사포텍 문명을 형성하였다. 필기사들은 상형문자로 글을 썼고 복잡한 달력을 사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더 큰 규모의 테오티와칸 계곡에 건설된 도시에는 12만 5천명에서 20만명의 인구가 살았다. 수백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가장 큰 건물로는 거대한 태양 신전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로 높이가 61미터, 부피가 1만 세제곱킬로미터였으며 꼭대기에 신전이 설치되었다. 안에는 다른 신전과 피라미드가 600개나 더 있었고, 수천동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니 놀랍다.

 

또한 유카탄 반도의 습한 저지대에서 마야문명이 일어나  무려 1천년 동안 번성했다. 마야의 독특한 고밀도 습지 농업은 마야문명을 떠받친 수리학적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마야의 정치적 권력은 왕과 귀족에게 집중되었고, 아메리카 문명 가운데 가장 정교한 수학, 달력, 천문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또한 총면적이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페루의 관개시설은 서반구의 고고학적 인공물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그들의 뒤를 이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에는 접합제 없이 연결된 건축물들, 외딴 산중 마추픽추의 가파른 계단식 밭, 수로와 도로망등 놀라운 역사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문명의 흥망성쇠! 이제는 평화롭고 신비스러운 풍경이 여행객들의 경탄을 자아낼 뿐이었다. 

 

최초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급지식(문자, 기록보존, 문학, 과학)의 개발과 제도화였다. 최초 문명들 모두에서 산술, 기하학, 천문학 등이 발생했다. 이는 모두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들로서 각 분야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문자는 구전과 인간의 기억력을 대체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에두바', 즉 서판원이라는 글쓰기 학교가 운영되어 수많은 문서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양한 문자 체계 중 최초의 문자는 점토판에 찍힌 설형문자로 수메르 문명과 함께 발생했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최후 기록은 서기 394년의 것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1799년 발견한 로제타석에 새겨진 것이다.

최초의 수학은 실용적,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 뿌리를 두고 발전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한 토지 측량의 필요, 화폐 등장으로 인한 계산, 건축 재료의 무게비율, 운하를 비롯한 기반 설비 건설 등이다.

모든 농업문명은 천문학적 관찰에 기반을 둔 달력 체계를 개발했다. 또한 모든 초기 국가에서 공식적인 의사들이 있었고 해부학, 외과 수술, 약초에 관한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이 국가의 의학 교육 지원 속에서 성장했다.

 

4 장 천재적인 그리이스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근에 위치한, 에게 해의 해안에 둘러싸인 곳에서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고유한 그리스 문명을 창조했다. 이 문명은 중앙집권적인 왕국이 아니라 분산된 도시국가의 집단 형태로 발생했다. 기원전 600년에서 300년까지는 헬레나 시대라 불리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의 시기는 헬레니즘 시대라 불린다. 헬레나 과학의 특징 중 가장 큰 것은 '자연철학'의 발명이다. 그리스인 자연철학자들은 과학의 정의에 새로운 지적 모험의 요소를 추가하여 과학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실용적 목적을 벗어난 지식이 철학적 차원과 사회적 경제적 목적에서 분리되기를 강조함으로 새로운 유형의 과학, 의도적인 이론적 자연탐구였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 문명의 중심은 비옥했던 지중해 연안의 이오니아였으며 그리스 본토는 변방이었다.

최초의 자연철학자 대부분이 이오니아 출신이었으며 상업도시 밀레투스의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그리스인들이 가진 자연지식의 특징인 다원성과 추상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또 다른 학파는 자연철학에 수학을 도입한 피타고라스학파로 이탈리아가 중심지였으며 조직적인 종교집단을 형성했다.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에 이르면서 철학과 자연철학 연구를 공식화하여 사립학교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물질이론의 열쇠로 삼아 우주론에 기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사의 분수령'이라 칭한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살아 생전과 사후 200년 동안 제자들이 정리한 것으로 고대 후기, 이슬람, 중세 유럽 문화의 고급 지식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국가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이 세운 교육장소인 리케이온(아테네 외곽의 작은 숲)에서 활동했다. 그는 인류가 실용적으로 필요한 기술을 획득한 후에 여유로운 지식인들이 순수과학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최초로 인간을 (자연)철학 연구로 이끈 것은 경탄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철학을 택했다면 과학 추구는 유용한 응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위해서였다는 것이 명백하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물질이론은 그의 우주관 전체에 접근하기에 좋으며 생리학, 의학과도 연결된다. 그의 견해들은 2천 년 동안이나 타당성을 유지했고 그리스 전통 속에서 자연철학 연구자들이 공유했다. 또한 그의 체계적인 생물학적 분류는 거대한 생물들의 위계를 구성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유산은 그리스를 계승한 문명의 과학 사상사를 지배하며 헬레나 계몽시대의 뒤를 이어 과학적 문화의 표준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좀 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그가 33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11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후 독립적인 개인들이 주도한 헬레나 자연철학은 물러나고 헬레니즘시대, 즉 그리스 과학의 황금기를 맞는다. 헬레니즘 과학과 그리스 로마 과학의 주요 특징은 제도화에 있었다. 그  한 예로 알렉산드리아 박물관과 도서관을 들 수 있다. 지금처럼 소장품을 전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와 동방의 전통을 결합시킨 연구원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하는 시설로 이루어진 과학 단지였다. 이는 700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수학은 형식적이고 비산술적이었지만 수학연구의 원조로 인정받았다.

위대한 수학적 천재라고 할 만한 시라쿠스의 아르키메데스를 비롯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과학적 이론들이 간략하게나마 소개된다. 그들의 역학, 역학기술 등과 관련해서 투석기를 비롯한 많은 기계장치들을 개발하였다. 이는 로마 문명의 기술적 성취를 이루며 군사와 항해에 영향을 끼쳐 육해군을 탄생시켰다. 또한 접합제인 시멘트의 발명은 효율적인 석조건물의 건설과 함께 각종 도로망과 수로망을 공고히 다졌다.

그리스인으로 로마 황제의 주치의였던 갈레노스의 해부학과 생리학, 키케르, 베르길리우스 등의 문학이 로마문명의 번영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사회적 역할이 미비했으며 과학의 제도적 수준은 빈약하였다. 또한 저렴한 노동력(노예)이 풍부했고 자연지식을 실용적 목적에 응용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적 기술, 과학에 회의적인 기독교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 과학의 쇠퇴를 초래하고 7세기에 이르러 종말을 맞는다.

 

2 부. 세계인들의 사상과 행동

 

5 장 꺼지지 않는 동방의 빛

로마 멸망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둔 비잔잔틴 제국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관료체제가 다스리며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될 때까지 1천년 동안 유지되었다. '비잔틴'은 미로처럼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뜻이다.

7세기에 아랍인들에게 이집트와 나일강 유역의 풍부한 자원을 빼앗겨 경제와 사회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또한 유럽 기독교 십자군의 위험 아래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중심지의 사산왕조는 관개농업 경제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권력이 제도화된 과학체계를 만들었다. 중동은 이슬람의 보호 아래 또 다른 과학 문명을 낳았다. '이슬람'은 신의 뜻에 복종함을 의미하며, 무슬림은 신에 뜻에 복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슬람 군대는 불과 30년 만에 아라비아 바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다. 이는 페르시아 권력을 교체했고 비잔틴 제국을 축소시켰다.

100년 남짓 기간에 포루투갈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이슬람의 과학 문화는 500년 이상 번창하였다. 이슬람의 성공은 신앙심 투철한 농부와 군대의 공로가 컸다. 농업 생산성 향상으로 전례없는 인구 팽창, 도시화, 사회의 계급화, 정치적 중앙집권화, 고급지식의 국가적 지원 등이 이루어졌다.

중세 이슬람은 그리스 과학의 주요 계승자가 되었고, 이슬람 문명은 800년에서 1300년까지 과학의 전 분야에서 세계 최고였다. 이슬람 세계 전역에 퍼져있던 합법적 고등교육기관인 '마드라사'는 외래 과학도 포함된 고급지식을 배우는 곳이었다. 가장 중요한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교육은 권위있는 원전의 암기와 낭송을 강조했고, 학생들의 숙식비, 수업료, 강사들의 보수, 건물 유지비 등은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

도서관은 이슬람 문명의 자연과학을 육성한 주요기관으로 마드라사나 모스크에 딸려 있었으며 수백 개나 설립되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번창했던 이슬람 문명이 근대 과학으로 도약하지 못한 이유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이슬람 세력이 거대해질수록 종교적으로 더 엄격해지며 문화는 다원성을 잃어 갔다. 결과적으로 창조적 과학자들이 설 문화적 공간이 줄어들었고 과학적 활력 또한 줄어들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사회문화적 분열과 경제적 쇠퇴는 과학 연구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와해시켰다.

 

 6 장 중앙의 왕국

기원전 221년 최초로 통일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거의 유럽과 크기가 같은 거대한 국가였다. 1200년에 1억 1천 5백만 인구로 유럽 인구의 2배였고 인구밀도는 5배 정도였다. 최초의 중국 문명은 황허강 유역에서 발생했으며 전향적인 관개문명이었다.

독자적으로 개발된 갑골문자는 표음과 상형문자의 두 요소를 다 지니고 있어 복잡하고 어렵지만 수천년을 이어오는 중국의 문화적 과학적 전통을 기록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중국 송왕조때 과학과 기술은 황금기를 맞았다. 농사기술의 발달은 점점 더 많은 잉여농산물을 축적하며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황제의 중앙집권력과 거대한 정부 관료의 통제력은 '천자'를 호위하며 중국인 삶 구석구석까지 미치기에 이르렀다.

현자였던 공자의 가르침은 국가의 공식적인 이념으로 신유학(성리학)을 탄생시켜 고급문화로 자리잡았다. 자연이나 인간사 외부의 세계가 아니라 가족, 인성, 사회에 촛점을 맞추어 인간 행위와 정치의 도덕성,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회유지를 강조하는 실천적 철학이었다. 유학은 기존의 체제와 당대 사회의 가부장주의를 지탱했다.

 

그 문화에 오래도록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충효사상을 인간의 도리로 알고 실천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다. 지금은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많이 퇴색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 미덕으로 지켜지고 있다. 송대의 제국 관료체제는 능력주의로 국가 공무원 시험을 통해 이루어짐으로 귀족의 정치권력을 제한하였다. 과학과 기술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험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자연히 약해질수 밖에 없었다.

유학은 상업과 이익추구, 사유재산 축적을 반사회적인 악덕으로 여겼으며 상업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따라서 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중국 기술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정부가 생산 및 상업의 주체였으며 독점적 사업으로 나오는 이익은 엄청난 군사비용을 충당했다. 세금으로 거두는 이익은 화폐경제를 확산시키며 정부 조폐국에서 만든 동전, 화폐(세계 최초)는 중국 문명의 기능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의 관개기술에서 운하의 건설은 강제노역으로 이루졌으며 곡물 운반 등으로 엄청 난 부를 창출케 하였다.

도자기 제작술은 11세기 이후 선례없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며 송대와 명대의 부유했음을 보여주며, 유럽 도자기 산업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또 주요산업으로 직물 생산을 들 수 있다.  기계화 한 방직 산업은 종이 제작에도 영향을 주어 공식적인 인쇄소가 생겼으며 이는 제국의 행정에 기여했다. 도자기로 만든 최초의 이동식 활자는 1040년경에 발명했다. 한국의 활판인쇄술이 중국보다 더 발달한 이야기도 나온다. 1377년에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소개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해준다.

중국의 군사적인 수요로 비롯한 철 생산 기술, 화약의 발명은 중국문명의 활력을 더한다.

남송 시대부터 명 왕조 초기까지 강력한 해군은 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중국의 존재를 확고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7차례에 걸친 해상 원정은 아시아 전지역은 물론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항해함으로 여러 속국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내부로 관심을 돌리게 되자 기술적인 정체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사상가들은 순수과학을 목적으로 삼아 연구한다는 생각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구 과학자들에게 사회적 역할을 제공하지 않음으로 과학을 위한 일터나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중국의 세계관은 자연을 서양보다 더 전체적이고 유기론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다. 즉 두 개의 상보적인 힘인 음과 양이 자연과 인간사의 변화를 지배하며 더 나아가 5개의 국면인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가 있어 역동적으로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었다.

 

중국의 교육제도는 과학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직업교육에 목표를 두고 국가 공무원 시험에 대비한 교육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통치를 위해 유용한 지식을 관료적으로 발전시키고 기술전문가들을 고용해야 했다. 원초문명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글쓰기와 응용수학이 중국 문명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천문학은 곧 황제 지배를 상징함으로 국가의 중대사로 다루어졌다. 몽골 원 왕조에서 17년간 관료로 일했던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의 의하면 국가가 5,000명의 점성술사와 점술가를 고용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중국인의 우주론의 중심점은 하늘의 아들(천자)인 황제였고, 중국은 동서남북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의 왕국'이었다. 중국 과학은 3차례에 걸쳐 외래의 영향을 받는다.

첫째, 불교를 비롯한 인도사상이 밀려 들어와 중국 불교도들은 경전을 구하기 위한 인도 순례를 감행한다. 이는 경전 번역으로 이어져 인도 세속과학이 들어오게 된다.

둘째, 이슬람세계로부터 들어온 외래물결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이슬람 천문학 관청을 설치하여 전통으로 유지시켰다. 또 1303년의 대지진으로 80만명이 사망한 사건은 지진관측, 지도 제작 등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째, 17세기에 서유럽에서 들어온 외래 물결이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마테오리치'는 여러 분야의 서양문물을 전하며 왕실 천문학자 겸 수학자가 되었다. 황제는 천문학 관청의 지휘권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넘겼다. 이로써 중국 과학사는 세계 과학으로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7 장 인더스, 갠지스, 그리고 그 너머

인도의 자연과학 연구 전통은 중국이나 이슬람 세계에 비해 덜 활발했다. 인도 종교의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성격이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6세기까지의 인도사는 불분명하며 전적으로 기원전 1500~1000년에 만들어진 '베다'라는 종교적인 책과 그후 500년 동안 축적된 브라만 주석가들의 글에서 얻은 증거에 의한다. 그 문헌의 일부는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것이며 종교적 의식 등을 위해 달력을 만들어 보존했다. 인도 대륙은 외세의 영향에 많이 열려 있었고 따라서 인도 과학과 기술 역시 열려 있었다. 폐르시아인의 200년간 점령으로 바빌로니아 천문학이 전해졌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은 그리스 과학이 인도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4세기 비교적 강력한 마가다 왕국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최초로 통일제국을 세우고 영토를 확장했다. 마우리아 제국의 거대한 관개농업 문명은 2모작을 가능하게 하여 농민에게서 소작료를 거두어 들였다. 도시는 부유지고 확대되었지만 아소카와왕의 죽음 이후 쇠퇴하면서 수많은 왕국과 영토로 분열되었다. 수학,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연금술이 번성하여 연금술사들은 고도의 화학적 지식을 터득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의학에 이용하였다.

인도의 가장 큰 산업은 방직으로 세계 최대의 직물 생산국이었다. 방직자 카스트에 속한 사람의 수는 농민 다음으로 많았으며, 화학산업과 염색업, 의류 생산업 같은 보조 산업이 발생했다. 인도양 교역을 위한 조선업 역시 주요 산업이었다. 철, 도기, 유리 제작 등 거대 문영을 떠받치는 기술적인 성취는 19세기 영국의 지배로 인해 탈산업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서기 1000년 이후 이슬람의 칩입은 북인도 농업에 더 향상된 관개기술을 도입하여 인공수로를 이용하였다. 이슬람의 문화적 제도적 성공은 전통적인 흰두교 과학과 지식의 종말을 고했다.

인도 본토의 침공을 받은 스리랑카는 관개농업 문명의 영향으로 도시인구가 팽창하였으며 과학적 기술적 성과를 이루었다. 또한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은 전성기에 도달하여 동남 아시아 최대의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었다. 크메르 왕들은 관개시설과 고속도로망을 건설했으며 거대한 건축 중 하나로 앙코르와트를 들 수 있다.

40여년이 걸려 1150년에 완공된, 세계 최대의 사원 복합단지 앙코르톰이다. 그 규모의 거대함과 과학성은 놀랍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크메르 왕실은 과학과 유용한 지식을 지원하여 인도 각 분야의 전문 인력들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칩입으로 군사력이 타격을 입고 그 피해는 인구를 급감시키면서 제국은 붕괴했다. 그 결과 산스크리트어는 동남아시아의 지식인 언어에서 사라졌으며, 덜 세련된 양태의 불교가 번성했다.

'덜 세련된 양태의 불교'라면 토착화한 불교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수많은 절이나 점집이 불교를 왜곡시켜 무지한 대중을 현혹시키는 처럼...    

 

8 장 신세계

구세계의 이슬람, 중국, 인도 과학 문명과 거의 동시대에 신세계에서 마야, 아스테크, 잉카 문명이 발생했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야만행위로 인해 마야 문명의 그림문자는 대부분 사라졌다. 오랜 연구 끝에 마야의 글은 표음적 요소와 상형적 요소를 모두 가진 독특한 마야어로 표기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야 상류 계층의 필기사들이 고도의 계급화된 사회에서 최상위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발명한 달력 순환체계는 정교한 예언 장치 기능을 함으로 점성술과 천문학을 고도로 발전시키며 마야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다. 마야문명의 몰락은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전쟁, 가뭄, 숲의 황폐화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중앙아메리카는 톨텍문명과 아스테크 문명도 발생시켰다. 톨텍인들은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아스테크인들은 원래 반유목민이었으나 14~15세기에 중앙 아메리카 최강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어떤 신비한 징조(선인장 꼭대기에 앉은 독수리)에 이끌려 호숫가(지금의 멕시코 시티 자리)에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호수, 습지를 이용한 고밀도 농업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막대한 잉여 농산물은 아스테크 문명을 지탱할 수 있었다. 허나 에스파냐 탐험가 에르난 코르테스가 동료 500명과 함께 1519년 해안에 상륙하고, 거대한 아스테크 문명을 2년 만에 정복했다.

 

콜롬버스 이전 남아메리카의 고대 잉카는 글이나 형식적인 수학체계는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복잡한 매듭을 이용한 정보 기록 방법을 개발했다. 십진법과 표준적인 무게와 길이의 단위도 있었다. 태음력과 태양력을 사용하였으며 의학과 식물학 지식은 매우 발전한 수준이었다. 잉카 문명 역시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끈 에스파냐군의 침공으로 1532년 멸망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집단들은 '둔덕을 쌓은 자들'로 불리며 만개한 문명을 이루지는 않았으나 경험적 기술과 자연에 의존하며 살았다. 한 예로 아나사지 문화 집단의 '태양 단검'은 고고학적, 천문학적 독특한 인공물로 입증되었다. 200년이나 번영했던 그들에게 오랜 기간의 심각한 가뭄은 종말을 가져오고 말았다.  

왜 인간은 나누어 먹으며 함께 공존할 수는 없는걸까? 한쪽의 지나친 욕심은 다른 한쪽을 완전히 파괴해야만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는걸까? 예전에 읽었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책은 인디언 멸망의 과정을 소상히 보여준다.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는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을 여실히 보여준다.     

 

 3 부. 유럽

 

9장 쟁기, 등자, 총포, 페스트

1000년 경의 기독교 유럽은 동방이나 중세 이슬람 문명에 비교하면 공백기간이나 다름없었다. 기후적 여건 등으로 정부의 개입이 확립되지 않았다가 도시화된 문명이 고밀도 농업 방식으로 발전됨에 따라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세계의 주역이 되었다. 15세기부터 화학무기 기술과 대양 항해 기술에 기반을 두고 해외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중세의 농업혁명은 인구 증가와 농토 부족으로 인한 대응책이었다. 목재와 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구인 쟁기는 습한 저지대 경작을 가능케 하여 생산을 증가시켰다. 중국에서 도입했을 말에 거는 가슴걸이와 편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 새로운 3단계 윤작 체계의 도입으로 생산량을 대폭 늘일 수 있었으며 마을의 단결력을 강화하며 공동 경작을 하는 장원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새로운 유럽은 토지 부족, 목재기근, 인구 압력, 가혹한 제국주의, 전염병, 세계 대전, 환경오염 등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유발하였다.

 

유럽 봉건체제의 특징 중 하나인 갑옷입은 기사는 '등자'가 만들어 낸 산물이다. 이는 중세의 탱크로 진화하면서 막강한 무기가 되었다. 유럽 기술자들은 새로운 기계와 동력원을 연구 개발하였다. 그 예로 수력을 이용한 수차, 바람을 이용한 풍차, 조수의 흐름을 이용하는 조수차 등은 기계에 동력을 제공하며 노동력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유럽 문명은 자연을 인류를 위해 기술적으로 이용할 에너지의 원천으로 보는 세계관을 다른 어떤 문명보다 강하게 발전시켰다. 이로써 과학과 자연철학을 위한 새로운 외적인 환경을 마련했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학문과 교육이 유럽에서 발생할 터전을 닦았다. 

 

12세기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대학들은 과학과 지식 제도화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대학은 수도원처럼 농촌적인 기관이 아니라 도시적인 기관으로서 교육비를 지불해야 하는 합법적 특권을 지닌 집단이며 자치적인 기관이었다. 그리스와 이슬람 과학 지식을 대학의 기초로 삼기 위해서는 번역 활동이 선행되어야 했다.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은 아랍어를 히브리어나 에스파냐어로 번역했고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 결과 1200년경 고대 과학 대부분을 회복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과학적 철학적 성과를 확보하였다. 

13세기는 유럽 지식인들이 그 모두를 흡수하여 동화한 시기였다. 사상가 토마스 아퀴나스, 시인 단테 등이 등장하였으며 신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지적 충돌이 불가피했다. 1277년 교황을 등에 업은 파리 주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범한 219개의 '저주스러운 오류'에 유죄판결을 내려 보수적 신학이 승리한 듯 보였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철학을 신학에 종속시켜 전지전능한 신이 세계를 얼마든지 다르게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교양학부 선생들에게 모든 과학적 다양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공한 일반적인개념틀 아래 스콜라 자연철한자들은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를 창조적으로 활발하게 수행했다.

 

14세기에는 춥고 습해진 기후와 전례없는 기근, 뒤이은 경제 침체, 또 흑사병인 폐스트의 발병이 유럽 인구의 단절을 불러왔다. 또한 기독교의 통일성이 깨지고 카톨릭이 여러 유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농노반란 등은 유럽을 초토화했다.

15세기에 등장한 화약과 신무기들, 잔다르크의 활약은 전쟁기술의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대포로 무장한 요새들은 정부의 재정이 대폭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이같은 군사 기술을 담당할 중앙집권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리적, 환경적 요건은 국지적인 성격이 강하여 서로 경쟁하는 민족국가 집단을 형성하였다. 나폴레옹 제국도 겨우 10년 정도에 그쳤다.

육상 군사 기술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해전 혁명은 유럽의 세계 정복 과정의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즉 캐러벨(소형 범선)과 갤리언(대형 범선)의 개발은 식민지 정복의 물결을 일으켰다. 포루투갈과 에스파냐가 주자가 되어 프랑스, 네델란드, 영국 등이 합세했다.

과학에 의하기보다는 경험적 솜씨에 의한 기술로 시작한 유럽 정부가 근대에 들어서야 더 큰 경제적 이득을 위해 과학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0장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시작하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쓴 태양 중심 우주론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 책 초판본을 받았다. 전통적 지구 중심론과 결별함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과학의 사회적 효용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가 과학혁명의 근본적인 요소 중 하나였음이 밝혀졌고, 특히 실험적 과학의 발생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의 핵심적인 특징이 되었다.

요한네스 구텐베르크는 아시아의 인쇄술에 의지하지 않고 이동식 활자를 이용하는 인쇄술을 발명했고 이는 1450년 이후 근대 유럽의 문화적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화적 삶과 예술의 부활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회화의 전형적인 특징은 원근법의 사용이다. 또한 해부학 연구의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마술과 신비주의(점성술, 연금술.악령학, 마술, 신플라톤주의, 장미 십자회, 카발라 등)도 르네상스 과학과 자연철학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었다. 

 

마틴 루터로 야기된 종교개혁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지며 피비린내나는 종교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최후의 고대 천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이 혁명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태양중심론을 채택함으로 2,000년 동안 유지된 천문학의 핵심적인 이론적 문제를 사라지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어서 덴마크의 귀족이자 유능한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는 이에 힘을 보태어 천문학 관찰 연구에 힘을 쏟아 영향력을 끼쳤다. 또한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 '세계의 조화', '새로운 천문학' 등의 저서는 우주의 신비한 조화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며 발전시켰다. 신체적 결함이 많아 불우했던 케플러의 업적은 당시에는 거부 당했지만 과학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11 장 갈릴레오의 죄와 벌

피사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성장한 갈릴레오는 의학부 학생으로 피사 대학에 다녔지만 은밀히 수학을 공부하여 수학교수가 되었다. 허나 임금이 신학교수의 8분의 일에 불과한데다 온갖 과목의 강의를 해야 했으므로 연구에 방해가 되었다. 그는 기하학적, 군사적 컴퍼스를 발명하여 판매하였으며 또한 20배, 30배의 망원경을 제작하였다. 메디치 궁정 과학자가 되어 메디치 가문의 왕위 계승자를 가르치며 자연철학자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그는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하여 메디치의 별이라 이름 붙여주었다. 그가 전통적인 대학을 떠났다는 것은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이 대학의 기반을 둔 중세의 과학 양식과 다르게 대중들 사이에서, 궁정 권력자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아카데미는 후원자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음으로 가능했다.

 

과학과 자연의 관한 인간의 탐구가 전통적인 신학에 선행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학설은 신학자들의 적의를 불러왔고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적극 옹호하면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장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내용의 저서로 '두 개의 주요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책은 최대한 많은 독자들이 읽게 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어로 썼다. 이해하기 쉽도록 4일간의 벌어진 대화 형식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 책은 교황을 조롱하였다며 교회 권위자들의 책략에 의해 노년의 갈릴레오에게 굴욕을 안겼으며 수인으로 가택연금 생활을 하게 했다. 이어 그는 저서 '두 과학'에서는 그의 수학적 사고를 더욱 확고히 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이동 거리는 낙하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낙하법칙이다. 갈릴레오는 실명한 채 1642년 사망하고 한때 친구였던 교황은 그를 기리는 모든 기념물을 금지했다. 그 해에 뉴턴이 태어났다. 

종교가 권력이던 시대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오늘날에도 종교집단의 권력화는 세력모으기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보면서 위험성을 느낄 때가 많다. 

르네 데카르트는 네델란드에서 살면서 20여년 새로운 과학연구에 기여하며 실용철학을 주장했다. 과학이 유용한 지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장 강력하게 내세운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에서 인간으로 관점이 바뀐 것이다.

 

12 장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데카르트, 갈릴레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주론과 물리학에 관한 이론적 탐구의 전통을 완성했다. 보편적 중력과 운동법칙들을 앞세운 뉴턴의 물리학은 천상과 지상을 통일하였다. 그는 살아 생전 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사후 200년 동안 과학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병약했으며 조부모에게 양육되어야 했다. 신경장애를 지녔으나 영리했던 그는 농사 대신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수학교수가 되었다. 교수는 영국 국교의 성직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신학과 성경의 예언을 공부하였으나 기독교 정통 교리를 거부하고 이단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신비로운 지식을 추구한 그의 연금술 연구는 역학, 광학, 수학에 관한 자연철학적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실험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왕립 학회와 파리 과학 아카데미는 17세기 과학의 제도적 혁명의 선봉에 있었으며 이를 본뜬 기관들이 전 유럽과 식민지에 퍼져 나갔다. 따라서 18세기에 국립 과학 아카데미와 학회가 성장한 것은 과학혁명 이후 과학이 사회에 흡수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국립 천문대, 국립 식물원 등이 설립 운영되기 시작했다.

1687년 왕립학회 승인하에 출간된 뉴턴의 '프린키피아' 책은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을 통해 신을 알 수 있다는 자연 신학의 결론에 이른다. 그후 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도 불구하고 영국 조폐국의 감독이 되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런던 왕립 학회장이 된 것은 과학자들이 점점 중앙정부 관료체제나 국립과학 학회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을 통한 증명'을 제시하는 책 '광학' 역시 세 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련의 과학적 연구 과제들, 즉 유명한 수사학적 질문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뉴턴의 우주론과 자연철학은 영국의 지배적인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며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충실하여 영국 국교의 예식을 거부하고 죽었지만, 그는 국민적 영웅이자 이성적인 과학자의 모범으로 부활하여 시인을 노래하게 하였다. 

'자연과 자연법칙들은 어둠 속에 있었네. 그때에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네.'

뉴턴 과학과 뉴턴적인 계몽운동에 합세한 계몽철학자들의 세력은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 혁명적이었다.

 

4 부. 용감한 신세계

 

18세기 인간의 실존을 바꾸어놓은 산업화는 주요활동이었던 농업을 물러나게 하고 공장에서의 기계화된 제품 생산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산업혁명의 기술은 여전히 과학계에 의존하지 않다가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용적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과학이 출현했다. 전기학, 열역학, 운동학, 공업화학, 분자생물학, 유체역학 등이다. 과학 그 자체에 있어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현대적인 세계관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고 과학과 기술은 융합하여 용감하지만 불안한 신세계를 이끌었다.

 

13 장 산업혁명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는 1만 2천년 전 인류가 채집생활을 버리고 식량 생산을 한 신석기 혁명이나 5,000년 전 문명화된 도시혁명 이후 전례없이 거대했다. 지난 2,000년 동안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난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주원인이 산업혁명이다. 산업화는 기술적 혁신과 경제 성장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도시에 저소득 공장 노동자 인구를 급증시켰다. 가정은 생산의 중심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노동분업이 발생했다. 수백만 명의 유럽인의 이주는 세계 곳곳을 변화시키고 분쟁을 일으켰다.

공유지를 사유화하여 경작한 노퍽 농법은 중세의 3단계 윤작 체계를 밀어내고 4단계 윤작 체계를 채택함으로 농업생산성을 향상시켰지만 상당수의 농민을 산업 노동력 시장으로 내몰았다.

 

목재의 기근으로 인한 제철산업, 탄광업의 발달은 증기기관을 발명했으며 철도의 필요성은 철생산을 더욱 증가시켰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노동착취는 아동에게까지 이르렀으며 상업자본주의의 발달로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방임 자본주의를 불가피하게 선포하였으나, 새로운 경제적 관계에 대해 비판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노동자와 소유주 사이에 계급투쟁을 예고함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과학활동 자체는 여전히 헬레나풍으로, 사회의 실용적인 사안과 별 상관없이 이루어졌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산업혁명의 기술적 토대는 학교를 다니지 않은 장인들의 천재성에 의했을 뿐이다. 

 

14 장 현대과학으로 가는 길 :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뉴턴의 '광학'은 18세기에 베이컨 과학들이 발전할 수 있는 개념적인 발판을 제공했다. 베이컨 과학의 개념은 18세기의 기상학, 자연사, 식물학, 지질학 연구로도 확장할 수 있었다. 18세기의 과학을 고전과학과 베이컨 과학이라는 두 개의 전통으로 나누어볼 때 전통적인 연금술에 뿌리를 둔 화학은 매우 실험적이고 도구 의존적이었다.

제2의 과학혁명은 과거에 별개였던 전통들이 과학적으로 통합되어 오늘날 물리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전적 세계관이라 불리는 것은 물리학의 전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며 19세기 말에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물리학 자체를 종결시키는 듯 보였다.

광학의 발전은 제2의 과학혁명의 핵심적 요소였다. 빛의 파동이론은 빛이 퍼져나갈 수 있게 해주는 물질이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제기했으며 모든 곳에 충만한 우주적인 에테르를 매질로 하는 파동이라는 답으로 통합되었다.

 

열에 관한 과학과 운동에 관한 과학을 통합한 열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 분야가 탄생되었다. 열역학은 자연 세계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과학의 두 분야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진화론이었다.

세계를 이루는 물질적 재료(원자와 분바)는 입자들이 큰 덩어리로 뭉치게 하는 중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중력은 보이지 않는 원자 세계와 역학과 천문학이 연구하는 거시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19세기 생명과학의 역사에서 생물학(1802년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에 의해 명명됨)은 화학과 생리학을 실험실에서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전통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과학자가 사회적 직업적 존재로서 완성되었다.

전류에 관한 연구는 여러 응용과학 산업을 낳았으며 대표적인 예로 전신 기술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전기조명 산업과 전파 통신 산업의 발달은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기술을 개량하고 확장하는 일에 힘쓰는 산업체 연구소는 여러 산업으로 폭넓게 확산되었지만, 제로그래피(최초의 건식 전자 복사 기술), 개인용 컴퓨터 같은 획기적인 발명품들은 독립적인 발명가가 만든 작품이다. 

 

15 장 생명 그 자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에 출간되어 유럽 과학사에 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종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각각 별개로 창조되지 않았고, 자연선택의 과정 속에서 진화했다며 생물학적 진화와 지질학적 변화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점진적으로 전개되었고, 인간은 자연 역사의 산물에 불과하며 자연에 대한 연구에서 신의 계획 같은 것은 입증할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적 믿음에의 이탈과 다윈의 종이 고정되어있다는 믿음에서의 이탈, 이 두 혁명은 하늘과 땅이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르며 인간과 짐승은 생물학적인 뿌리를 공요하고 있다는 과학적 세계관을 탄생시켰다.  라마르크가 주장한 획득 형질의 유전은 다윈의 진화론에 힘을 보태었고, 축적된 화석 및 지질학적 지층자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지구의 나이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반박했다.

 

다윈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도 재미있다. 피를 보며 구역질을 하여 의학을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려던 그는 자연학에 이끌려 남아메리카 지도 제작을 위한 2년간의 여정에 참가한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관찰한 고립된 지역의 변양태들을 신의 창조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종의 진화과정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종들의 전쟁이 일어난다는 자신의 통찰을 사회적 변화에 적용했지만 다윈은 이를 식물과 동물에 적용하여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에 도달했다. 만성적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40년 이상 그가 연구한 업적은 어마어마하였다. 외톨이 과학자 월리스가 말레이 제도를 탐험하면서 진화의 추진력이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을 발표하자 뒤질세라, 그는 20여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1859년 '종의 기원' 이후 발표한 '인간의 유래'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유인원과 유사했으며 진화는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산출했을 뿐 아니라 본능과 행동과 지능, 감성과 도덕성의 발달에도 기여했다고 주장했지만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멘델의 개별 유전 원리, 방사능 발견과 아인슈타인의 물질과 에너지 등가성은 다윈은 의구심을 정당화했다. 즉 태양계의 추정 나이는 수십억년으로 점차 증가하여 진화론이 요구했던 시간을 확보하였다. 또한 염색체의 발견과 그 안에 유전의 단위가 들어있음이 입증되었다.

 

대표작으로 '유전학과 종의 기원', '신종합설', '종의 기원과 체계' 등 여러 책들이 설득력 있는 진화론을 제시하였다. 또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분자 구조가 이중나선 모양이며 유전과 새로운 변이 발생의 기제라는 것을 밝히며 노벨상을 받았다. 그들의 발견은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였으며, 생명의 암호는 화학적 구조로 환원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적 반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30년에 동물행동학자 콘라도 로렌츠의 동물행동학 창시와 E.O.윌슨의 '사회생물학' 책이 출간되면서 진화론은 확고해졌다. 

오늘날에는 종들이 진화의 산물이며 진화의 주요 기제는 자연선택이라는 근본적인 교설에 대해서 보편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 지난 150년 동안 생명과학은 대체로 다윈의 일생을 되풀이 하였다. 

신의 창조설을 믿는 이라면 꼭 이런 책들을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무지해서 선택한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면...

 

16 장 도구 제작자, 지휘봉을 잡다

세계적인 산업화는 영국에서 시작하여 벨기에, 독일, 프랑스, 미국으로 번져갔다. 전기학, 화학의 발전은 새로운 과학적 산업을 등장시켜 고등교육을 가능하게 하였다. 기술교육은 기초과학을 대폭 수용하여 유럽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식민지 개척의 신제국주의가 건설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인도를 들 수 있으며 독자적인 산업화의 가능성을 잘라버렸다. 또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는 '전쟁의 산업화'로 전쟁물자 생산에 산업적 방법을 적용하였다. 이는 1차 세계대전에서 더욱 확산되어 화학자들의 전쟁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정부는 국가의 산업화에 속도를 가하여 2차 세계대전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 다음 가는 생산 경제를 갖추었다. 

1854년 강압에 못이겨 해외교역을 시작한 일본은 인도와 달리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며 메이지 유신이후 상인계급과 진보적 공무원들이 연합하여 산업발전을 이끌었다. 20세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앞서있던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굴욕을 겪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전으로 작은 국토가 양분되는 비극 속에 처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미국을 산업혁명의 선두주자가 되게 한 일등공신은 헨리 포드가 개척한 자동차 공업과 대량 생산 기술이었다. 그 과정에서 포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올림으로 노동자들 자신이 소비자가 되는 효과를 거두었다. 최소한의 운영경비를 아끼려고 인재사고를 반복하는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기술적 혁신은 20세기 산업문명을 계속해서 변화시켜 전기가 다대다능한 에너지원으로서 산업과 가정에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중산층이 확산되고 삶의 질은 향상되었지만 빈부의 격차를 확산시키고 삶의 속도를 가속화했다. 또한 경제발전을 이끄는 소비주의는 지구환경의 심각한 오염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17 장 새로운 이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헬레나 자연철학의 전통은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이론적 혁신이 일어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아닌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빌헬름 뢴트겐의 X선 발견, 마리 퀴리의 방사성 등은 원자의 고정성을 파괴하였다.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우주 속에는 특권적인 기준틀이, 표준 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관찰은 상대적이며 관찰자의 위치와 속도에 좌우된다. 질량 에너지 법칙의 공식 E=MC제곱을 제시한다. 전자와 방사선의 발견으로 원자이론은 이론적 실험적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1920년대 이르러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행렬역학과 파동방정식에 힘입어 더욱 확장되었다. 이는 자연에 대한 비결정성을 드러내고 우연과 무작위성은 자연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1932년 중성자, 양전자가 발견되어 반물질의 존재를 알렸다. 반물질은 특수한 종류의 물질로서 인반적인 물질과 만나면 함께 소멸하여 순수한 에너지가 된다. 1954년에는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 핵물리학자들은 점점 더 규모가 커진 입자 가속기를 이용하여 대부분 수명이 메우 짧은 원자 구성 입자를 200종 이상 산출하고 확인하였다. 세계를 이루는 물질적 재료를 알아내기 위한 노력은 전례없는 성취에 도달했으며 양자장 이론이 확립한 틀 속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상대성 이론과 입자물리학은 1930년대부터 우주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물리학사의 분수령이 된 '3도 배경복사'(로버트 윌슨의 우주의 잔여열)의 발견은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의 통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플레이션(급팽창)'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00억 년 전에서 150억년 전 사이에 거의 상상할 수 없는 '특이점'에서 격렬한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입자물리학은 빅뱅 이후 극히 짧은 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우주가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처음엔 자연의 힘과 에너지와 물질이 통일되어 있었다가 엄청난 급팽창이 일어나면서 우주는 물이 끓는 것 같은 상태 변화와 유사한 '위상변화'를 겪으며 10의 75제곱배로 커졌다. 이어서 원시우주는 계속 식으며 팽창했고 10만 년 후에 에너지와 물질이 분리되었다. 이후 수십억년 동안 은하계와 별들이 진화했고, 지금으로부터 약 50억 년 전에 태양계가 형성되었다. 이 모형에는 아직 불확실성이 있고 계속 연구진행중이다.

 

현재 연구자들은 우주의 영원한 팽창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결손질량'을 찾는 중이다. 과학연구가 점점 실용성에 기우는 20세기에 있어서도 헬레나 전통에 맥을 잇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순수과학이 유지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DNA 발견 이후 인간과 나머지 생명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원리로 삼았던 과거의 세계관은 오늘날의 생명과학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동물계에서 이룬 과학적 발견들을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적응하는 시도는 여전히 저항받고 있다. 사회생물학과 진화론적 심리학이 대표적이다. 

64억 킬로미터 밖 우주선에서 찍어 보낸 '창백한 푸른 점'의 지구 사진은 지구와 인근 행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무조건 신의 세계로 안주할 것이 아니라 한없이 겸손한 태도로 끊임없이 연구해야 할 일이다. 우주계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다면...

 

18 장 오늘날의 응용과학과 기술

오늘날 과학자의 역할과 과학자가 되기 위한 절차는 매우 엄격하다. 기본적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이나 특수 연구기관, 산업체에서의 응용과학 연구 등 그 분야가 다양하다. 젊은 과학자들일수록 연구보다는 과학행정쪽으로 종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물리학과 화학분야에서 2개의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퀴리, 핵분열과 원자폭탄에 기여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DNA 이중나선 발견에 기여한 린드 프랭클린 등 여성과학자들의 진출도 활발해졌다. 과학연구 대부분은 비용이 많이 들고, 후원비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공학과 기술은 과학과 다름없이 전문적인 직업으로 정착했다. 과학 연구의 산물은 새로운 지식이지만 응용과학자와 기술자와 공학자들은 유용한 물질이나 공법을 산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인용하고 이용하면 직업적인 명예를 얻으므로 비금전적인 사회적 보상을 바라고 연구 결과를 보여주려한다. 반면에 공학자와 응용과학자들의 생산물은 현실적인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특허가 나올 때까지 숨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및 기술 사이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일이다. 따라서 생명공학이나 컴퓨터 분야의 과학적 발견은 출판되고 공개되는 대신 특허권으로 보호받는다.

전통적인 인문학과는 달리 과학적 지식의 유용성과 인용의 정도는 현재를 지향하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감소한다.

원자폭탄을 가능하게 한 과학적 이론은 1938년에 나와서 1939년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거론함으로 연구개발 사업(맨해튼 프로젝트)이 탄생하고 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이로 인해 더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고, 응용과학 사업(레이더, 페니실린, 제트 엔진,최초의 전기 컴퓨터)에도 활용되었다. 동시에 미소 냉전시대에 접어들게 되고 과학과 정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하였다. 즉 정부가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에 대규모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과학 지원을 이끌어 낸 가장 큰 요인은 군사 및 국방부문의 수요였다. 또한 의학에 있어 응용과학 기술이 이룬 성취는 엄청나지만 항생제, 살충제 사용의 확산에서 나온 내성 박테리아 문제, 불임 치료에 따른 윤리적 법적 문제 등 그 부작용도 많다.

컴퓨터 과학은 인공지능에서부터 새로운 계산장치, 게임 등 사회 전반적인 삶을 혁신시켰다. 과학과 기술이 서로 연합하여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막강한 힘이 되었다. 허나 반과학적 반 기술적 사회운동의 물결도 발생하여 사회활동가들은 환경, 쓰레기 재활용, 적절한 기술, 녹색정책에 관심을 기울이며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20세기는 과학을 경제적 생산의 엔진과 완전히 통합시켰다.

 

결론 - 역사라는 무대

인간이 자연에 관하여 진술하는 이성적인 이야기가 과학이라면, 자연철학이 사회적 지적 활동으로 존속하는 한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변해갈 것이다. 실제로 과학사가 주는 한 가지 교훈은 당대의 과학 이론은 대부분 실패했으며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오늘날의 과학도 역사 속에서 탄생했고 미래에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과거로부터 배운 것은 미래를 이해하는 데 제한적으로만 유용할 것이며 영향력은 더더욱 제한적일 것이다. 진보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필연적으로 지속되는 것만도 아님이 분명하다. 산업혁명과 그 귀결들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세상을 급속도로 또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현재 인류의 강화된 산업적 실존 양식은 지속되기 어려워 보인다. 확실한 건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변화해갈 것이라는 생각이다.   

 

역자후기 - '즐거운 과학'을 위하여

정부가 앞장 서서 첨단과학이, 첨단 생명과학이 우리의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거라고 한다. 과학이 진리에 대해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절대적 강자가 되었다. 이 책에는 과학과 기술이 주연이고 정부와 산업이 조연격이다. 과학과 기술이 별개의 활동이었다가 20세기 들어 '과학기술'로 융합되었다.

'즐거운 과학(학문)'은 철학자 니체가 쓴 글의 제목인데, 역자는 과학에 대한 사랑이, 과학자의 연구생활이, 과학교육이 다 즐겁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한 사랑과 예리한 비판의 눈이 필요하다.

 

오래 전 친구가 사준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수많은 주요 과학자들의 이론을 간략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다.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이렇게 상세하게 서술한 책을 처음 읽으면서 여러 가지 방면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험 같은 것을 보지 않으니 더더욱...ㅎ 

세계역사학회가 수여하는 최고도서상을 수상한 책이니 만큼 대학 교양 도서로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