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자연, 과학 외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나무^^ 2024. 4. 27. 15:59

 

지은이  이지환 

펴낸 곳  부키

 

이 책을 재작년에 사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야 다시 살펴보고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서문에서 밝히길, 수많은 업적을 남긴 천재들이 병약한 신체임에도 생전에 적절한 진단이나 치료를 받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겨 지금이라도 탐정의 시각으로 질병을 잡아보겠다 한다. 작가는 문학과 역사를 좋아하는 정형외과 전공의이다. 책의 내용은 10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의 숨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보인다. 

 

1. 세종의 허리: 조선 최고의 리더가 운동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본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이다.

매사에 완벽주의자이며 문무를 함께 중히 여겼던 세종이 운동을 꺼려했던 것은 이미 30대에 무릎과 허리통증이 심했던 것은 독특한 질병인 '강직성 척추염' 때문이다. 또한 40대부터 심해진 안질도 이 환자에게 생기는 합병증 포도막염으로 인한 것이다. 게을러서 운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질병에 시달려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가운데 그토록 백성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이었다.

 

2. 가우디의 뼈 : 천상의 건축가는 왜 하필 해골집을 지었을까?

부자들이 모여사는 스페인의 고풍스러운 거리 그라시아에 해골을 연상시키는 건물 '카사 바트요'는 최고 건축가상을 받은 안토니 가우디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인간의 뼈대와 나무의 기둥보다 훌륭한 구조물은 없다.'고 말한 그는 6세 때부터 관절염으로 뼈가 아픈 장애를 지니고 자라서 사회성이 부족한 대신 자연과 뼈를 깊이 관찰하였다. 그 덕에 그가 지은 7채의 건물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여러 종류의 관절염을 추정한 결과 그는 '소아기 특발성 관절염'일 가능성이 높다. 74세의 그는 달려오는 노면 전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치여 의식불명인 채 하룻동안 병원에 방치되었다. 아픈 발을 칭칭 감고 남루한 복장을 한 그를 사람들은 거렁뱅이로 오인하였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빛의 건축물, 최고의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건축한, 평생 청렴하게 산 독신의 그는 가난한 이들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성스러운 그의 내면이 위대함을 느낀다.

 

3. 도스토엡스키의 발작 : 세계적인 대문호가 도박꾼이 된 사연

그리이스 정교 신자였던 도스토엡스키의 방탕한 도박성은 돈 때문에 글을 써야만 하는 위기에까지 놓이고 친구들은 그에게 속기사를 고용하게 한다. 그리고 탄생한 소설이 <노름꾼>이다. 속기사였던 그녀와 결혼까지 하지만 결혼식 피로연에서 발작하여 신부를 놀라게 한다. 간질 환자였던 그의 뇌에는 '흥분 신경 세포군'이라는 전기 뱀장어가 산다고 필자는 말한다. 이 환자들은 도박에 취약하다는 주장이 있고 작가는 9편의 소설에 간질환자를 등장시킨다. 그가 묘사한 발작은 '강직 간대성 발작'으로 온몸의 근육이 강직되었다가 홱 비틀기를 반복하고 혀가 말리며 호흡이 힘들다. 그의 소설 속 발작은 자화상과 같았다. 발작의 조짐은 고양되는 기분으로 감지한다. 발작 후 일시적 실어증과 우울한 기분, 그는 인간의 영혼에 대해 깊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중성에 회의하며 괴로워하던 그는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죽은 예수의 시체> 작품에 매료되면서 희망과 함께 소설 <백치>를 집필한다. 결국 그의 모순된 이중적 자아가 그를 훌륭한 문필가로 만든 것이다. 

 

나는 감동적인 최고의 작가로 나는  도스토엡스키를 꼽는다. 그처럼 세밀하고 날카롭게 인간의 정신을 파헤치고 묘사한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의 전집을 오래 전에 사놓고는 아직 전부 다 읽지 못하였다. 

교사 시절 한 어린이의 간질 발작을 보며 식겁했던 적이 있었다. 측은한 마음에 그 작은 아이를 감싸안고 있다 보면 발작이 조용히 가라앉곤 했다. 무사히 일년 동안 가엾은 그 어린이를 주시하며 보냈던 경험이 생각난다.   

 

4. 모짜르트의 부종 : 음악 신동의 사인은 질투인가 돼지고기인가?

1791년 12월 35세의 모짜르트는 숨지기 직전까지 제자에게 휘파람으로 악보를 적게 했다. 죽은자를 위한 미사곡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6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며 고달픈 광대의 삶을 살았던 그는 성인이 되어 자신을 총애하던 귀족과 왕가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충격을 받은 그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그와 라이벌이었던 '살리에리'의 독살설은 음모였다. 부부 금슬이 좋았던 그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는 것도 낭설이다. 포크커틀릿의 선모충 감염설도 맞지 않다고 필자는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그는 감기와 고열이 선행했고 갑자기 전신부종이 발생하고 허리와 등에 통증을 느꼈다. 또 죽기 전까지 정신이 온전했다. 증상 발생후 15일 뒤 사망한다는 이 모두는 신장을 파괴하는 질병에서 비롯된다. 1800년대 영국 템즈강은 오물에 감염되어 수많은 사망자를 냈으며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빈 전역에 모짜르트와 같은 증세의 사망자들이 늘어났다. 그는 연쇄 구균 감염 후 사구체신염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모짜르트는 '템포 루바토' 주법에 능숙했는데 그의 삶 또한 그러했다. 높은 음을 연주하는 오른손은 박자를 벗어날 듯 아슬아슬하고 화려하지만 낮은음을 연주하는 왼손은 정확한 템포를 지켜 분위기를 안정시킨다. 필자는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의 인생을 지휘한 건 정직한 왼손 박자다. 왼손으로 묵묵히 연주된 모짜르트의 성실한 삶'이라고 표현한다. 천재음악가의 요절을 후대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5. 로트레크의 키 : 물랭루즈의 천재 화가는 왜 난쟁이로 태어났을까?

'석판화의 거장이자 상업 포스터를 예술로 끌어들인' 로트레크는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만국박람회 심사위원이었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가문의 장남이었던 그는 불행히도 불품없는 외모로 쇠약한 가운데 성장했다. 잦은 골상으로 더욱 키가 자라지 못한 그는 냉대를 이기고 화가의 길을 택하였다. 어린 시절 엉덩이 관절 성장판을 다친 그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유전성 질환을 앓았을 확률이 더 높다.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쇄골두개이형성증이 보이는 증세와 합치하는 외모다. 귀족들의 근친혼은 기형을 유발하지만 그들은 부와 권세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근친혼을 선택하고 그 결과 로트레크는 난쟁이로 태어난 거다. 그의 병을 '피크노디소스토시스'라고 진단한다. 즉 '뼈가 충분히 단단하지 못해 발생한 골격계 이상'으로 100만명당 1명 이하의 열성 유전 희귀 질환이다. 이 질병은 툴루즈 로트레크 증후군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순교자의 산'이라 불렸던 몽마르트르에 터를 잡은 그는 술과 그림으로 생을 버티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비운의 삶을 마쳤다. 그의 이야기나 그림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결점을 희화하며 의연했던 그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6. 니체의 두통 : 실존 철학의 선구자는 어쩌다 정신병원에 입원했을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5세때 아버지가 심한 두통을 앓더니 사망했다. 사망보상금으로 어린시절을 살아야 한 그의 생활은 신실하고 음악에 심취했다. '니체의 새로운 종교는 예술이었고 교주는 바그너였다' 박사학위 없이 바젤대학교의 교수가 될 만큼 뛰어났던 그가 바그너를 만나 영향을 받지만 바이로이트 축제를 계기로 그에게 실망하며 멀어진다. 지나친 심신의 소모는 두통과 시력장애, 불면증으로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폭발적인 집필을 한다. 1889년 토리노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을 부등켜 안고 우는 등 그는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친구는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다음해 가족에 의해 퇴원했지만 회복하지 못한 채 1900년 폐렴으로 숨진다. 정신병원에서 받은 신경매독은 엉터리 진단이었다. 뇌종양으로 전두엽이 손상된 뇌는 유치한 행동과 공격성, 성격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필자는 '니체의 증상은 뇌혈관이 막혀 발생하는 뇌졸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라며 뇌종양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카다실(대뇌피질하 경색 백질뇌병)은 단일 유전 이상으로 발생하는 소동맥 치매 질환 중 가장 흔하다. 19번 염색체의 13부위가 손상되면 발생한다는 사실은 1993년에 밝혀졌다.' 며 이 환자는 두통으로 병을 시작한다고 했다. 동생에 의해 변질된 니체 철학이 히틀러에게 이용되지만 하이데거 등의 노력으로 오명을 벗고 세계적인 사상가가 되었다. 

 

7. 모네의 눈 : 인상파의 거장이 추상화처럼 그릴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인상파의 시작인 모네는 빛에 주목하며 원근법과 기존의 색조표현을 거부했다. 프랑스 혁명후 자유로운 철학사조가 번지며 화가들도 장인에서  철학가로 변했으며 저렴해진 주석 물감 튜브는 혁신 그 자체였다. 모네는 이 물감을 들고 자연으로 나가 자유롭게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살롱전에 입상하지 못해 냉대를 받던 그와 동료들을 미국에 소개한 그림상 덕분에 성공하자 그들의 그림이 역수입되는 일이 벌어지고 모네는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모네 미술관 건축을 계획하던 중 1908년부터 모네는 백내장에 걸려 색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고 호소한다. 오른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노년에 따른 노화와 야외활동으로 인한 과한 자외선에의 노출, 평생 즐긴 흡연 등으로 백내장이 심해져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지면써 마치 추상화처럼 변한다. 백내장 수술을 했지만 '후낭 혼탁'으로 문제가 남자 다시 재수술을 받고 안경을 교체하여 1926년 사망하기까지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백내장을 앓으며 그렸던 그림을 없애버린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추상화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8. 프리다의 다리 : 자화상의 대가는 왜 자기 자신을 붉은 과일로 그렸을까?

강렬한 자화상을 많이 남긴 프리다는 유년기 때 소아마비 바이러스로 다리에 장애를 겪는다. 청소년기에는 참혹한 교통사고를, 성년기에는 수차례 유산과 허리통증을 겪으며 그림으로 그 고통을 표현했다. 그녀의 좌절하지 않는 당당한 성격은 시련에 굴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며 삶을 버텨내고 드디어 1년만에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특수 이젤을 만들어 주어 누워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취가 없이 재빠르게 외과 수술을 해야했던 의사의 '치사율 300% 수술 이야기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로 전해진다. 다행히도 프리다는 '전신 석고와 상처 부위를 말끔히 정리하는 시술조차 최신 기술'을 받았지만 진통제가 없는 치료는 더욱 고통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다. 21세의 혁명을 꿈꾸던 프리다는 42세의 거장 디에고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결혼했지만 세 번의 유산과 남편의 잦은 외도로 이혼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척추뼈 유합술' 수술에 이어 몇 번의 재수술을 받으며 만신창이 되어갔다. 더군다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을 때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발이 왜 필요하겠어?' 라고 말했다니 그녀의 굴하지 않는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물심양면 그녀를 도와주던 아버지의 임종을 맞은 후 그녀는 과일을 그린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자화상'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속살이 드러난 과일 그림에 <드러난 삶의 풍경 앞에서 겁에 질린 신부>라는 제목을 붙이는가 하면, 세상을 떠나기 8일 전에 그린 자른 수박에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문구를 새긴다. '껍질이 벗겨진 과일은 무장해제된 프리다와 같다.'는 필자의 표현에 공감한다. 침대에 누운 채 마지막 개인전에 참석하여 인사를 나눈 그녀는 '행복한 외출이 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는 말을 일기장에 썼다. 프리다의 몸을 가른 의사의 칼처럼 그녀는 붓으로 내면의 고통을 캔버스에 담았다. 필자는 '프리다는 혁명의 해에 태어나 그림으로 반란을 이뤘다. 삶은 혼란스럽고 평가는 후대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프리다의 인생은 분명히 혁명적이다.' 고 말한다. 1907년에 태어나 1954년까지 치열한 삶을 산 화가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9. 퀴리의 피 : 노벨상 2회 수상 과학자가 정말 방사능의 위험을 몰랐을까?

1898년 원자 고유의 성질 방사능을 밝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몸은 방사선이 몸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며 그녀를 쇠약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로 부터 촉발된 방사선을 이용한 항암치료는 오늘날 수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구한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던 마리,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에서 애국심 강한 아버지의 실직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지만 가정교사를 하며 언니의 학자금을 지원하던 중 아버지의 취직으로 파리로 가서 소르본 대학에 다니며 수석으로 졸업하고 '피에르 퀴리'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돕던 중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고 딸을 낳는다. 이때는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을 때이다. 그녀는 우라늄 방사선 강도와 전기 전도성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어서 발표한 <우라늄 화합물과 토륨 화합물에서 방출되는 방사선> 논문을 발표하며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부부는 이 연구에서 화합물 찌꺼기 속에 새로운 미지의 원소 '폴로늄'(조국 폴란드를 칭함)을 발견하지만 입증하기 어려운 난국에 처한다. 지지해줄 조국도 박사학위도 없는 가난한 그녀는 소르본 대학에서 해부용 시신을 보관, 실험하다 방치된 헛간을 빌려 지난한 실험을 이어간다. 4년 만에 염화을라늄 0.1그램을 추출하는데, 이를 위해 사용된 역청 우라늄이 8톤, 물이 400톤 이상 필요했다. 은은한 초록빛을 띄는 라듐을 강연장에 들고와 스크린의 빛을 밝히고 필름을 인화시켜 신중한 과학자들 모두를 매혹시켰다. 의대생 '에밀 그루브'는 최초로 유방암 치료에 X선을 이용하여 치료에 성공한다.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암과 피부퀘양, 건선, 류마티즘 관절염, 홍반성 루프스, 새균 감염 환자까지 영역을 넓히며 허무주의에 빠진 의료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라듐을 과장 사용하여 사망한 사례들도 많았다. 

 

환풍기도 없는 실험실에서 36년간 라듐을 만지며 생활한데다 제 1차 세계대전시 X선 장비를 차에 싣고 다니며 병사들을 진단하였다. 지독히 많은 양의 방사선과 라듐에 노출된 그녀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그녀를 사망하게 한 백혈병도 피를 생산하는 골수에 이상이 생겨 발생했다.

남편이 마차에 치여 죽자 그의 강의를 이어서 하던 마리는 딸과 함께 염화라듐을 전기분해하여 '금속 라듐'을 추출한 공로로 또 노벨 화학상을 받는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최초로 2번 노벨상을 받았다. 방사능은 한 해 800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고 원자력 발전소는 도시의 전기를 공급하며 핵융합 연구는 물리학의 비밀을 풀 열쇠지만, 원자 폭탄의 피해, 원자력 발전소 폭발 등 재앙 또한 엄청난 것이다.   

 

10. 말리의 피부 : 희망을 노래한 레게의 대부는 왜 암을 방치했을까?

괴한의 총탄도 이겨낸 그는 발가락에서 움튼 종양을 방치하다 뇌와 폐까지 전이되어 사망했다. 중남미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 자메이카가 영국의 식민지일 때 출생한다. 영국군 대위였던 50대 아버지, 악마의 신을 쫓아내는 무당의 핏줄이었던 18세 식민지 흑인 여성이었던 어머니,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여 조부는 상속권을 박탈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빈민촌에서 생활하는 모자를 두고 말리가 10세 되던 해 사망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 대신 음악을 선택한 그는 자메이카의 현실을 치유하는 노래를 불렀다. 1962년 자메이카가 독립하고 그는 17세 때 '밥 말리와 웨일러스'를 결성하였다. 그는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 와중에 가난하고 비참했던 자국의 현실을 치유하고자 노래 불렀다. 흑인 메시아가 고통받는 동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의 '라스타파리' 종교인이 된 그는 교리를 따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명상을 위한 대마초를 피웠다. 젊은이들 사이로 유행처럼 번지며 '레게'라는 새로운 장르를 온 세계로 전파시켰다.

 

세계 반전 시위 현장마다 밥 말리의 <잠에서 깨, 떨치고 일어나. Get up, Stand up>가 울려퍼졌다. 그는 총격을 당했지만 살아난다.

총상이 채 회복되지 않은 몸을 드러내보이며 미국 공연을 마치고, 기자들과 축구를 하던 중 흥분한 프랑스 기자의 깊은 태클을 받고 엄지 발가락을 다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증상이 점점 악화되자 공연을 중단되고 병원에 가서 받은 진단은 '말단흑색점흑색종' 이라는 피부암이었다. 신체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그로서는 발가락을 자르는 것이 괴로웠고 그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치료가 충분치 않았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이 노래는 병상을 지키며 우는 어머니를 달래기 위한 노래였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 그를 젊은이들은 장례 행렬이 지나간 도로에 옷과 종려가지를 깔며 추모했다. <짐바브웨>를 비롯한 그의 노래는 아프리카의 희망을 노래하며 민중을 화합하게 하였다. 

나는 그의 노래들을 다시 들어보면서 고귀했던 그의 정신을 느껴볼 수 있었다.

 

나가는 말 책의 피부를 봉합하며 : 의사는 손톱을 기르지 않는다.

신도, 삶도 사소함에 깃든다고 말하는 필자는 천재들의 사소함에 주목하여 '진단은 사소함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에는 원인을 밝히겠다는 철저함과 환자를 대하는 따뜻함이 함께 한다.' 또 '미학은 시대가 강제하는 시선을 비주얼 레짐Visual Regime이라 하며, 과학 철학은 패러다임Paradigm이라 한다. 시대가 강제하는 시선은 강력해서 사람을 눈뜬장님으로 만들기도 한다.' 며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의학은 최신 기술을 가장 먼저 적용받으며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학문이다. 의학에 문외한인 독자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