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한국 영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나무^^ 2025. 3. 12. 12:54

 

감독  정지영  

제작  성일씨네아트 (1991년. 110분) 

출연  최진영, 김금용, 전무송 외 다수 

 

TV 지미에서 3월 무료영화를 살펴보다 본 영화였는데, 신성일씨가 감독한 영화인 줄 알았다. 늘 연애 영화에 출연하던 느끼한 인상의 그가 삭발하고 스님으로 나오는 것도 별달랐고, 무엇보다 주인공 심해 스님으로 나오는 최진영의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10여 년 전 스스로 목숨을 거둔 최진실 남매인 것도 모르고 보았다. 검색하는 과정에서 점차 변해가는 그의 모습에 좀 놀라웠다. 19세 젊고 앳된 스님의 모습을 연기하여 1991년 청룡 영화 남자 신인상을 받았다. 그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매력적이었다. 함께 상을 받은 여자 주인공의 인상은 비구니의 맑음보다는 좀 진한 인상을 풍겼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시사하는 바는 강렬한 불교 영화이다.  젊은 남여의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연정을 종교라는 억압으로 누르고 죄악시하는 내용이다.  사미승 침해가 우연히 본 비구니 묘연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고 묘혼 역시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리움을 누르지만 그에게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알아차린 노승들은 엄히 꾸짖고 벌함으로 그들의 정진 수행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만 어디 사람의 마음이 잡을 수 있는 것이던가! 더군다나 심심산중에 묻힌 이팔 청춘 남녀의 첫사랑 감정을...

 

기이한 건 평생 정진에 몰두하고 살아온 고승 법연이 입적하기전 묘혼을 불러 그녀의 나신을 보여달라 요구한 사실이다. 그리고 '무불당!' 외치며 벌떡 일어나 앉은 채 죽는다. 심해는 문밖에서 방문에 비친 묘연의 나신과 고승의 외침을 들으며 충격을 받는다. 다비식날 스님은 그러한 고승의 파계를 '깨달음을 준 것'이라며 합리화한다. 한글로만 표현된 '무불당'이라는 말의 참 뜻을 잘은 모르겠지만 부처란 없다는 당위성을 외친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평생을 수양 정진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욕망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단 한 번도 여자의 육신을 품기는 커녕 보지도 못했던 고승의 마지막 소원으로 영화는 종교의 엄격함 내지는 허무한 위선을 깨부수는 느낌이 들었다. 불교계에서는 퍽 반발했을 것 같은 장면이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파계승 무불스님의 초연한 이야기를 들으며 속세에의 동경을 품었던 심해는 결국 산을 내려가고, 묘연은 자신을 속박하기 위해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며 정진에 몰두한다.  그 두 사람은 주위의 억압된 규율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감정의 싹을 짓밟으며 스스로 상처받는다. 

종교는 마음의 구원을 받아 평화에 이르기 위함이거늘 묘연은 그 수행을 위해 신체에 가해를 하는 것으로 수단을 삼고 심해는 그녀를 포함해 절을 떠남으로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차라리 심해의 속세행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인간이란 가보지 않은 길을 동경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를 꿈꾸는 존재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나약하여 수시로 의존할 대상을 구하고, 또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을 자학하며 무언가 대단한 진리가 있지 않을까 방황한다. 하지만 내가 배우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삶에는 뽀족한 구원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이리저리 엇나가려는 방향을 잡으며 바르게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 바르게 살고자 하는 지향점을 위해 죽을 때까지 배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가치관이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아름답고 맑은 두 영혼의 만남을 보는 즐거움과 종교라는 집단의 허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종교는 본질을 벗어나 종교지도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변질되고 오염되어 눈살을 찌프리게 한다. 인간의 머리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들이 참으로 오랜 기간 인간을 지배해오고 있다. 음식을 먹어봐야 맛을 알듯이 종교도 경험해보아야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편협된 종교관을 지니고 타인을 배척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처럼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도 존중받아야 한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세상은 편협해지고 점차 병들게 된다.

앳된 최진영 배우가 이렇듯 영화 속에 남아 그의 예술성을 각인시키며 확실한 존재감을 부여했다.

김소월의 비장한 시 '초혼' 의 첫구절을 영화 제목으로 한 것도 멋있고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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