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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나무^^ 2014. 7. 1. 16:10

 

파드마삼바바 지음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에반스 웬츠  편집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출판

 

이 책 표지에는 '죽음의 순간에 단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해탈에 이른다는 티벳 최고의 경전' 이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심한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 말고도 나이 만 60세, 환갑을 넘기면 거의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인생을 한바퀴 돌아 다시 산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쯤이면 자식들이 독립해 결혼을 하고, 다시 그 자녀들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때이므로 가장 무겁고 중요한 책임에서 벗어나 삶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요즘은 결혼 적령기라는 것이 없어지고 나이 많은 자식들이 독립하지 않고 그대로 부모곁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마음껏 누려야 하는 삶의 자유로운 시기가 부모도 자식도 모두 늦어지고 있다.

옛날보다 십년쯤 젊어보이는 외모 대신 십년쯤 늦어지는 정신적 미숙함을 겪게 되는 셈이다.

 

나는 이십대 때부터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마도 몸이 병약했던 탓에 마음 또한 약했었는지...

정신적으로 어렸을 때 생각했던 죽음이란 막연히 '아름다운 동경'이었다.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맞는 죽음, 그건 노화를 거부할 수 있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의미했다. 이제는 점차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현실적인 대비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외적으로는 유언장을 미리 쓴다든지, 잡다한 물건들을 남에게 주거나 버리면서 신변을 정리하는 일이다. 내적으로는 삶을 죽음과 동일한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평화롭게 맞을 준비를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나의 주의를 끌었다. 사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어찌 알겠는가마는,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믿고 선택하며 살아간다. 우주적 차원에서 볼때 나라는 한 존재는 티끌에 불과하다. 반면 나 자신이 하나의 우주인양 집약된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이미 알려진 사실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무궁무진한...

과학의 힘으로 육체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으나, 정신에 있어서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있으므로 심리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의식세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책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개된 글귀들인데, 죽음에 대한 간결하고도 확신에 찬 문장들이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과학이며 모든 과학을 초월하는 것임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죽는 법을 배울 만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너무도 적구나. 나는 그대에게 이 신비의 가르침을 주노라. 이 가르침은 그대 영혼의 행복에 큰 도움을 줄 것이고, 모든 아름다운 삶의 근본이 되리라.'  <오올로기움 사피엔티아> 14세기

 

'인간이여, 그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죽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그대는 사는 법을 배우게 되리라. 죽음을 배우지 못한 자는 삶까지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기술> 중에서 모든 여행 중의 여행- 인간에게 죽는법을 가르치다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있는 것이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있으리라.

이곳에 있는 것과 그곳에 있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참된 마음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잇으니, 그곳은 이곳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곳이 이곳과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카타 우파니사드> 제4장

 

'옮긴이의 말' 중 이 책의 이해와 배경을 돕는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글의 저자인 '파드마삼바바'는 '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으로 부른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그는 인도의 최고 대학 나란다 불교대학의 교수이며 탄드라의 대가, 신비 과학에 능통한 이였다. 티벳왕의 초청으로 3년에 걸친 여행 끝에 히말라야 설산에 도착한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신비 경전들을 티벳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 분량 또한 방대하여 수백장에 이르는 책이 100 여권이 넘었다. 그는 아직 세상에 공개하기 이르다 생각하여 티벳 전역의 히말라야 동굴 속에 한 권씩 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명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전수했다. 즉 환생하여 비밀의 경전을 세상에 꺼내놓는 일이었다. 그들을 티벳어로 '보물을 찾아내는 자' 라는 뜻의 '테르퇸'이라 불렸다. 바로 그 테르퇸 중의 한 뛰어난 인물인 '릭진 카르마 링카'가 북부지방 동굴에서 찾아낸 비밀의 책이다...

       

깊은 동굴이란 우리 자신의 어둠과 무의식, 릭진이 이 책을 찾아냈을 때 그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이다 '바르도'는 낮과 밤 사이, 황혼녁의 중간상태,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틈새이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의 중간 상태를 바르도라고 부른다. 그 상태에 머무는 기간이 49일이다. '퇴돌'이란 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라고 번역된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이다.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진리는 바로 그 환영의 세계를 속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티벳 사자의 서>는 '닫힌' 책으로 시작해 '닫힌' 책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읽는 사람의 영적인 이해력에 따라서만 그것은 책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끝내 닫힌 책일 수도 있지만, 마음을 열고 모든 편견을 넘어 진리의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자에게는 그 책장을 눈부시게 열어 보일 것이다...

동굴에서 꺼내진 뒤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티벳과 히말라야 인접국가에 전해지다가, 20세기 초 한 영국인 구도자이자 티벳불교 연구의 선구자이며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에반스 웬츠'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곧 티벳의  승려 '라마 카지 다와삼둡'의 제자로 입문했다. 승려인 그는 영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한 위대한 학승이었다. 그들은 1919년 시킴의 강톡에서 <바르도 퇴롤>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은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했고 에반스 웬츠는 그가 구술하는 주석과 해설을 받아 적었으며 책의 편집을 맡았다. 그리고 그 초판본이 <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1927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인쇄되었다...'

 

그 당시 대표적 심리학자 칼 융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는 이 책에 대한 심리학적 해설을 썼다고 한다.

류시화 씨는 책을 번역하기 10여년 전 뉴욕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번역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후 10 여년의 여행과 공부가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한 선수학습이였음을 고백한다.

 

영어 교사로 종교철학을 전공한 남편과 살때 나는 그의 책장에 이 책이 꽂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10 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식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의미한다. 몽매한 정신과 고정화된 학습의 영향으로 나의 의식이 깨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숱한 고통과 불안, 부질없는 욕망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 후에야 올바른 의식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지 못한 사후의 신의 나라를 굳건히 믿는 신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이 크게 다를 바 없는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환영인 것을 깨닫는 일은 누가 알려줘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확고한 믿음이나 각성이 생기기까지 참된 의식을 지닐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듣고 또 들어야 할...      

         

다음은 죽은 후 사자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위대한 가르침' 중 일부이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공포스러운 어떤 광경이 보일지라도, 그것들이 그대 자신의 마음의 표현임을 알라...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대가 수많은 경전들과 신비한 경전들을 공부하고 한 겁(劫)동안 종교를 닦았을지라도 붓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하나의 중요한 기술이나 말 한마디로 그대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 그대는 붓다의 경지에 이르리라...

그대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사념체이기 때문에 베이고 잘리고 토막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대의 몸은 실제로는 텅 비어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신의 신체들 역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텅빈 것이 텅빈 것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을 떠나면 평화의 신이나 분노의 신이나 피를 마시는 신이나, 여러 형태의 머리를 한 신들이나 무지개 빛이나 죽음의 대왕의 끔찍한 모습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일 이것을 알면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 속으로 하나가 된 상태로 녹아 들어가 붓다의 경지를 얻게 되리라... 

 

"아, 사후세계를 방황하고 있는 나를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가 나를 저버리지 말게 하소서."

또한 피를 마시는 신들을 믿고 그들에게 이 기도를 바치라.

아, 환영이 너무 깊어 윤회계를 방황할 때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없는 빛의 길에서 붓다들과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여, 나를 인도하소서. 하늘의 풍요로운 여신들은 나를 뒤에서 지켜 주소서. 사후세계의 무서운 여행길에서 나를 구하소서. 완전히 깨달은 붓다의 경지에 나를 있게 하소서.

가까운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텅빈 형상들이 나를 비춰 주고 있을 때 붓다들이여, 그대들의 자비의 힘으로 사후세계의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오지 못하게 하소서...

 

다섯개의 밝은 지헤의 빛이 빛나고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에 덜지 않고 그것을 깨닫게 하소서.

평화의 신들과 분노의 신들의 신성한 몸이 여기서 빛날 때 두려움 없는 확신으로 이 사후세계를 깨닫게 하소서,

나쁜 카르마의 힘 때문에 불행을 맛볼 때 수호신들이여, 그 불행을 없애 주소서.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자연스런 소리가 천 개의 천둥처럼 울려 나올 때 그것들이 여섯 글자의 소리로 변화게 하소서.

(여섯 글자: 六字眞言. 티벳의 수호신 첸라지, 즉 관세음보살의 핵심적 만트라로 '옴 마니 밧메 훔'을 가리친다.)

무방비 상태로 이곳에서 카르마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을 때 자비의 신이시여, 나를 보호하소서.

이곳에서 카르마로 인해 고통받을 때 투명한 빛의 더없는 행복이 나를 비추게 하소서.

다섯가지 원소들이 적이 되어 나타나지 말게 하소서.

깨달음을 얻은 다섯 붓다들(오선정불)이 사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이와 같이 진실한 믿음과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대는 틀림없이 붓다의 경지를 얻으리라. 그대여, 이것은 더없이 중요하다. 마음을 집중해 이것을 세 번 또는 일곱번 반복하라...' 

 

아,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가!  

나이에 비례하여 가속도가 붙는다는 말처럼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면, 언제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가? 꿈만 같이 느껴진다. 반복되는 삶의 윤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저장되는 나의 기억들이라고 할 때, 나는 이 책을 읽은 것이 다행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탄생과 죽음의 사슬을 넘어서고 싶다. 20세기 유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는 의식 전환만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설한다. 즉 붓다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붓다의 말을 깨달은 그는 노후에 실명한 자신의 눈조차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가 '은총의 시'에서 표현한 시귀를 보면 알 수 있다.

"절묘하신 신의 솜씨를 보라!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책과 어둠을 동시에 주시다니!"

 

우리는 어쩌면 매일밤 '잠'이라는 휴식을 통해서 죽음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죽음은 그저 알 수 없는 두려운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삶과 죽음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니 두려움도 슬픔도 불행한 마음도 사라졌다.

어제에 이어 다시 시작되는 오늘, 이 하루를 존재하며 보고 느끼는 신비롭고 기적같은 수많은 일상들이 감사하고 기쁘다.

그리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무지로 인하여 지은 많은 업보를 담담히 치루자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