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같은 글 67

나의 노래 4 : 환상의 춤

나무  31. 자살  늙은 어미와 막막하기만 한 시간을 함께 살았다우는 어린 아들을 돌봐주려고 그녀에게 오셨다철없는 며느리를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오셨다평생 지고 있던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오셨다 연수가 끝나고 집에 가기 싫은 그녀 친구와 잠들었다길고 긴 밤을 보낸 그는 어제 지겹게 물고 늘어졌다그녀는 멈추고 싶은 강한 충동을 더는 누를 수 없었다순진하게 정의라 믿었던 선택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도무지 알 수 없는 그를 벗어나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불 꺼진 방처럼 어둡고 갑갑한 삶 아주 떠나고 싶었다  그는 피 흘리는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헤어진 손목은 꿰매지고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그녀의 말없는 눈물은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늙은 어미는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딸을 떠났다.  32. 늙은 어미의 죽음..

시 같은 글 2014.10.06

나의 노래 3 : 꽃피는 시절

나무 21. 노래하며 방황하며 을씨년스러운 교정엔 바닷바람이 끊이지 않고 불었다. 맨발의 건강한 여학생을 비웃는 교수님의 코메디도 끊이지 않았다. 고지식한 교수를 비웃는 학생들의 코메디도 지루해져 버린 날들이다. 깡소주를 들이키는 복학생은 한 끼 밥을 사먹을 돈이 없어 허기졌다. 가난한 그들은 산으로 바다로 몰려가 주체할 길 없는 젊음을 노래했다. 기차를 놓치는 날엔 한 시간 지나야 오는 기차 대신 자유를 즐겼다. 그녀가 종강하고 떠난 여행은 재시험을 놓쳐 재수강으로 넘어갔다. 배가 고파도 사랑하고 싶은 그들은 서로를 부등켜 안고 싶었다. 괜히 수컷 짐승들처럼 이웃학교 남학생들과 싸움질을 벌였다. 그의 애궂은 기타줄은 절망을 노래하다 깡소주를 들이켰다. 꼬리를 무는 애정 행렬을 그치..

시 같은 글 2014.09.21

나의 노래 2 : 알에서 깨다

나무 11. 이슬비   학교에서 돌아오던 계집아인 우산이 없었다뛰어가는 계집아이 불러 우산 씌워 준 소년은 셋방 사는 까까중늙은 어미는 함께 집에 온 두 아이를 잠시 쳐다보았다둘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셋째 오래비는 눈을 흘겼다  다음 날 집 앞에서 까만 교복 까까중이 환하게 웃었다계집아인 어제 일이 고마워서 마주보고 웃었다심술궂은 오래비가 까까중을 다짜고짜 때렸다놀라서 말리는 계집아이를 밀쳐내고 때렸다계집아인 제 편이었던 죽은 큰오빠 생각이 났다.  12. 졸업식 하는 날  눈발이 날리는 운동장에 줄 맞춰 앉아서시린 발을 꼼지락거리며 모두 훌쩍거렸다펄펄 날리는 눈처럼 정든 시간이 사라져갔다 늙은 어미와 양복입고 젊어보이는 아비와공작처럼 멋 부린 선생님과 사진 찍었다.정든 학교를 뒤돌아보며 나와서 짜장면..

시 같은 글 2014.09.18

나의 노래 1 : 유년의 꿈

나무 1. 조용한 아침 가족들이 모두 나간 아침 늙은 어미는 쌍둥이 계집아일 낳았다. 꼬물거리는 버러지 같은 생명에 이어 나온 퉁퉁 불은 한 생명은 숨 쉬지 않았다. 잃어버리는 일에 익숙한 어미는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늙은 어미의 지친 젖가슴은 두 생명을 키울 수도 없었다. 이크,사고뭉치 하나 생겼네!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열네살 큰오래비는 마치 아비처럼 소리쳤다. 세상에 나온 것이 버거운 약한 생명은 지친 듯 잠에서 깨지 않았다. 둘러앉은 식구들 모두 고것을 가슴 졸이며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마당 언덕에 조롱조롱 빨간 앵두 가득히 열린 봄날 한 바가지 가득 담은 앵두를 사내놈들에게 건네고 고게, 어디 살겠나? 인정 없는 시어머니는 돌아섰다. 시아버지는 건넛방에서 길영자(永)를 넣..

시 같은 글 2014.09.14

맑은눈 떠나다

맑은눈 떠나다 나무 착해서 너무 착해서 눈물이 난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견디다 못해 소리 지르며 뛰어오르는 반가움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를 깨치려고 온 생명이던가 거실에서 침실에서 화장실까지 산에서도 어디서도 그림자처럼 곁에 와 앉던 녀석 고쳐보겠다고 엑스레이, 엠알아이, 혈액검사,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부검까지 하고서야 '상행성 척수연화증' 병명만 알았다 무지막지한 산악자전거떼가 작고 예쁜 내친구를 잡았다 잠자듯 사라진 고요한 숨결 귀여운 몸에 닿은 마지막 손길 그대로 떠났다 오래전에 '내가 살아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럽게 생각날꺼야' 그렇게 이별을 말한 사내가 있었지 내가 살아 움직일 때마다 네가 생각날거다 얼마나 고마운 생명이었는지 다음 세상은 더 귀한 사랑으로 태어나라고 대학병원 임상실 육보시를..

시 같은 글 2013.10.21

큰오빠

큰 오빠 나무 생전 늙지 않을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오빠였는데 이십여년 지난 세월 얼굴이 주름지고 등이 굽었다 그래도 금식기도 하는 열성은 동생들도 천국으로 데려 가고 싶다 확고부동한 신념 쓸데없는 집착이 수명 재촉하는 줄 모르나 보다 작은오빠 월남전 갔을 때 그는 추운 겨울 내내 새벽기도를 나갔다. 얼음 박인 귀는 무사히 귀환한 동생을 얼싸 안으며 그제야 녹았다. 도리라고는 모르는 아내 윽박지르며 여동생을 집에 데려다놓고 취직도 시집도 제손으로 보내려던 그와 떨어져 산 긴 세월 나는 웬 못된 놈이 되어 큰오빠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가 돌보지 않았어도 동생들은 제몫을 하며 살았다 그의 하나님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도 모른다 그가 몰라라하는 아버지를 동생들은 묵묵히 보살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시 같은 글 2012.10.30

봄꽃길

봄꽃길 나무 천상으로 가는 길인가 흰 벚꽃잎 날리는 숲 연두빛 새싹이 꽃처럼 피어나고 홀로 걷는 내 마음 아득한 상념 흐드러지는 꽃잎 가득한 시절 피어나는 봄처럼 화사한 마음 모두 담을 산은 어디에 있던가 수줍은 듯 연지 분홍 진달래꽃 난꽃처럼 예쁜 보라색 제비꽃 햇빛처럼 환한 조팝나무 흰꽃 밟혀도 피는 샛노란 뱀딸기꽃 새들의 노래소리 꽃잎이 날리고 지난밤 꿈에 본 봄꽃 같은 그대 그대에게 가는 봄길 꽃이 피네 언젠가 이를 그 길에 꽃이 피네

시 같은 글 2011.04.24

황혼이여!

황혼이여! 나무 그대 번번히 갈아입는 새옷 같은 열정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찬란하게 빛났었다 멀고 먼 길 돌고 돌아 이른 자리는 낡고 부서진 어선, 기름띠 얼룩진 해변 무리지은 바닷새의 배설물 희끗한 신작로 아들의 손을 놓고 꺼억거리며 죽은 곳이다 눈물이 솟을 만큼 휘황한 해는 세상을 물들이고 모든 존재의 남루한 상념까지 화려하게 치장한다 순결한 돛을 팽팽히 당기고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시간이여! 그가 서있는 발치에 내리는 어둠 별이 반짝인다 쏟아지는 별을 가슴 가득 안고 몸살하며 빛나던 욕설을 내밷으며 두고 온 추억들이 눈물되는 밤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던 푸쉬긴의 위안이 농담처럼 그를 조롱하는 삶이었다 세계 최고의 안락한 도시에서 이어지는 불편한 일상을 속옷처럼 꾸역꾸역 ..

시 같은 글 2010.11.19

님이여

님이여 나무 언제나 웃으며 다가와 그윽한 눈빛 남기고 떠나는 님은 돌아서면 고이는 눈물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고아라 달빛 가득 밤꽃 향기 남기며 이별의 아쉬움 지우는 님은 어느 전생에 못다한 사랑이던가 눈이 내리고 나면 꽃은 피고 더위 가시면 찬바람 부는 날들 얼마나 많은 생을 지나고 나면 꿈인 듯 다시 오는 내 님을 볼까 꿈인 듯 다시 오는 님에게 안길까.

시 같은 글 2010.07.19